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메리 앤 섀퍼.애니 배로스 지음, 신선해 옮김 / 이덴슬리벨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은 이덴슬리벨에서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지만,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었을 적엔 매직하우스에서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이라는 제목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리뷰 제목은 읽었던 책 제목으로 한다.) 
 
  떠도는 말에 따르면,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뚜아네뜨는 배고파하는 농민들이 있다는 소리를 전해듣고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지요." 

  식량이 풍족한 시대에 식량이 풍족한 나라에서 살고 있는 나는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이라는 책의 제목을 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왜 맛없게 감자껍질로 파이를 만들어? 거 희한한 사람일세." 

  [감자껍질파이]란, 밀가루도 버터도 없으니까 생활의 지혜를 발현해서 감자껍질로 파이처럼 속을 감싼 요리이다. 어째서 이런 요리를 먹어야 했냐면, 그 때는 세계2차대전의 와중이었기 때문이다. 독일군들이 먹을 것을 징수해가고 남은 걸로 먹고 사는 것은 무척 팍팍했단다. 그래서 [감자껍질파이]같은 기괴한 음식이 탄생한 것이다. 

  로맨틱 영화의 한 장면을 베껴서 박아놓은 것 같은 부드럽고 감성적인 표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내용이다. 그렇지만 또,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에서 풍기는 슬픈 느낌 때문에 피비린내나고 끔찍한 전쟁의 추억이 배어나오는 내용만도 아니다. 말하면서도 이상하긴 한데 이것은 로맨스 소설인 동시에 전쟁소설이다. 두 개가 딱 양립해서 글을 지탱하고 서 있다.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이 서간체 소설인 이유는 두 가지의 이야기를 하나처럼 붙이고 녹여서 자연스럽게 만들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소설의 형식은 두 가지 얘기를 풀어내는데 적합하다. 

  세계 2차 대전은 끝났지만 전쟁의 여파는 어마어마해서 거리는 아직 폐허고 사람들은 전쟁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품은 엄격한 배급제로 나눠진다. 영국에 사는 작가 줄리엣은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줄리엣과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의 만남이다. 

  내가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을 읽어본 서간체 소설은 <키다리 아저씨>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딱 두 편이다. 그 두 편은 모두 주인공인 주디와 베르테르의 편지만을 쭈욱 이어 나간다. 

  그런데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는 그것과는 다르게 줄리엣 외 다수의 편지가 순서대로 이어붙여져 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의 1인칭(이런 것은 가능하지 않지만)처럼 느껴진다. 여러 사람의 입장, 여러 사람의 경험, 여러 사람의 시각이 합쳐져서 2차 세계대전의 풍경에 대해 퍼즐을 맞춘다. 

  전쟁의 참상을 폭탄이 터지는 최전선의 장소가 아니라 폭탄을 만들던 혹은 폭탄이 보관되고 있던 땅에서 풀어내는 것은 처음 봐서 그런지, 상당히 신선했다. 거기엔 최전선과는 또 다른 공포가 존재한다. 전쟁은 군인만 치르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간인이 치르고 있음을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을 읽으며 알 수 있다. 

  자칫 흩어질 수 있는 이야기를 하나로 모아주는 것은 엘리자베스 멕케나라는 여성이다. 엘리자베스는 한 번도 직접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지만 사람들의 편지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의 주인공은 실은 엘리자베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헨젤과 그레텔이 남겨놓은 하얀 조약돌처럼, 그녀의 행적은 반질반질한 빛이 난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멕케나의 발자취를 따라서 책의 끝까지 오면 눈가가 시큰해진다. 줄리엣이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엘리자베스 멕케나에게 매료된 것처럼 나도 점점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그녀는 너무 사랑스러운 인물이다- 마치 그녀와 이름이 같은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 베넷처럼.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독서모임'에 대한 얘기는 그다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전명작이 무수히 언급되는 책을 기대하며 편다면 다소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독서모임과 자신이 사랑하는 책에 대한 이야기는 초반부에 줄리엣과 사람들이 만나고 친해지는 계기이며 전쟁에 대한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풀어나가게 하는, 그리고 엘리자베스 멕케나를 회상하게 하는 단초이긴 하지만 중요한 하나의 주제가 아니다. 되려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줄리엣의 로맨스이다. 

  그래서일까, 줄리엣을 보면 원수의 아들과 불꽃같은 사랑에 빠진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 캐플릿의 모습이 언뜻 떠오른다.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서 일하고 사랑하고 사람들과 사귀는 줄리엣의 모습은, 엘리자베스의 행적을 더듬어가며 전쟁의 참상을 술회하는 것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전쟁 중에 행방불명이 된 엘리자베스가 과거를 말했다면 줄리엣의 모습은 폐허를 딛고 일어나는 현재이다. 전쟁을 버티고 섰던 사람들은 힘들었던 과거를 간직한 채 앞으로 나간다. 엘리자베스의 아기 키트가 줄리엣과 함께 지내게 된 것처럼. 전쟁이 막강한 파괴를 보여준다면, 사랑은 조심스런 창조이다. 

  감자껍질을 먹을 수 밖에 없었던, 나중에는 그마저도 모자라 허덕이던 시절의 이야기. 그 시절에도 사랑하고 증오하고 경멸하고 여러 사람이 뒤섞여 왁자지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이야기. 무엇보다 사람사는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가슴 따듯한 책이었다. 이 책이 메리 앤 셰퍼의 유작이라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덧붙임. 

  오스카 와일드의 친필원고가 발견되는 부분에서 다소 당황했다. 그렇게 극적인 행운은 이 책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데! 하지만 그런 어수룩한 부분까지 재미있는 이야기. 그토록 힘든 나날을 견뎌왔는데 예상치못한 큰 행운 하나를 발견하는 장면도 좋지 않을까.

 

2009.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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