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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여화가가 있다. 당신 그림에는 깊이가 없다는 평을 듣는다. 그녀는 깊이를 찾아 헤맨다. 망가진다. 죽는다. 그리고 평론가는 '그녀의 초기작조차 깊이에의 강요를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그 평론가는, 여화가의 그림에 깊이가 없다고 말한 바로 그 사람이었다.
평론가는 자신이 한 평을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무심코 던진 말에 여화가가 맞아 죽은 것이다. 말이란 얼마나 무서운가!
하지만 <깊이에의 강요>에서 더 깊이 와닿은 것은 남의 의견을 비판없이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의 무서움이다. 세상은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나름 필터링을 해서 받아들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시시콜콜 따지면서 생각하는 것은 힘들다. 그 때 남에게 묻어가면 편하다. 과연 평론가의 말 한 마디가 여화가를 죽였을까?
평론가의 의견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자신의 의견으로 만든 사람들이 죽인 것으로 보인다. 개 중 한 명만 곰곰히 생각해서 "어, 하지만 내가 보기엔 깊이가 있는데."라고 말했다면?
솔로몬 애쉬라는 심리학자가 실험을 하나 했다.
실험실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선분 하나(A)를 보여준다. 잠시 뒤 세 개의 선분(A, B, C)을 보여주고 방금 본 것과 같은 길이의 선분을 찾아내라고 요구한다. 피험자는 A를 고른다. 그런데 다들 A가 아닌 B를 방금 본 것과 같은 길이의 선분이라 주장한다. 그러면 피험자는 대부분 A가 아닌 B를 고른다.
이처럼 사람들은 다수에 묻어가려는 경향이 있다. 기준을 자신의 눈에 두지 않고 남의 눈에 두는 것이다.
<깊이에의 강요>를 몇 번이고 되풀이해 읽으면서, 신문이나 책 그리고 뉴스에서 나온 말을 나 자신의 의견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는가 되물었다. 아주 많았다. 주변인의 생각에 별 생각 없이 동조한 경우도 많다.
가장 큰 비극은,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동조해서 결국 '나는 깊이가 없어!'라고 절망한 여화가에게 있다. 그녀 자신도 스스로를 긍정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자신감을 가지고 있어도, 권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넌 별 게 아니야."라고 말하면 주변 사람들도 "응, 넌 별 게 아니야."라고 말하고, "넌 별 게 아니야."라는 말에 둘러싸이면 어느 순간 "나는 별 게 아니야."라고 생각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별 게 아니야"라는 생각이 별 거인 나를 별 게 아닌 것으로 만든다. 소위 말하는 낙인 효과(stigma effect : 남들에게 무시당하고 부정적인 낙인이 찍히면 자신도 모르게 나쁜 쪽으로 변해가는 현상)다.
지금 이 순간, 예전에 "넌 별 게 아니야."라고 말했던 그 사람은 뭘 하고 있을까.
2008. 6.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