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리와 나 - 한 초보 부부 그리고 강아지 한 마리의 가족 만들기
존 그로건 지음, 이창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세계 3대 지랄견이라고 불리는 개들의 만행을 기록한 포스팅을 본 적이 있다. 입이 떡 벌렸다. 콘트리트 벽조차 갉아댈 수 있는 재능을 지닌 개들. 친척이 키우던 개를 주겠다고 했다고 자랑하는 사람에게 "당신 그 사람에게 뭘 잘못했어요? 어서 빌어요."라고 달린 답글들. 그 포스팅을 보면서 어떻게 저런 개를 키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얌전하고 영리한 개라고 해도 키우는 건 꽤 힘들다. 기운이 넘치고, 계속 말썽을 피우고, 말도 안 듣는 개를 키우다니 해탈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말리는 래브라도 리트리버다. 그런데 우리가 믿고있는 '영리하고 얌전한 래브라도 리트리버'와는 달리, 멍청하고, 말썽부리고,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외로워하고, 천둥이 치면 발광을 한다. 그렇다. 지랄견이다. 말리의 행실을 보고 있자면 나부터 기운이 쭉쭉 빠진다. 그러나 말리의 행동은 결코 밉지가 않다. 저자는 말리를 '멍청한 개'라고 집요하게 부르지만(험담에 가깝다), 그 호칭에서는 짜증이 아닌 사랑스러움이 묻어나온다. 말리가 아무리 말썽을 부려도, 말리 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것이 많아도.


  <말리와 나>는 말리를 키우는 한 가족이 주인공이다. 가끔 말리가 콧망울 정도만 비치는 에피소드들이 있다. 하지만 이 책은 확실히 <말리와 나>다. 말리가 많이 나오든 적게 나오든, 가족의 안에 말리가 있다. '키우는 동물'이 아닌 가족으로써. 낙천적이고 행복하고 기운이 넘치는만큼 말썽을 부리는 명랑한 개 말리를 대하는 저자와 그의 가족의 태도를 보면서, 아 이게 가족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자란 부분조차도 품고 보듬어주는 울타리. 해탈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품는 거구나. 가슴이 따듯해졌다. 그래서 말리가 늙고, 병들고, 그래서 말리가 죽었을 때. 저자가 느꼈던 상실감의 일부가 나에게도 전해졌다. 조금 울었던 것 같다.


  흠이라고 할까.

  말리가 죽고 나서, 말리를 연상시키는 특성을 가진 럭키라는 개의 광고를 보고 저자가 부인과 함께 "보러 갈까?"라고 말을 하며 <말리와 나>는 끝난다. 그런데, 맨 앞의 저자 소개에서 저자는 자신이 말리와 정반대인 래브라도 리트리버 그레이시를 키우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저자의 말과 글의 끝부분에서 느껴지는 간격이 작위적으로 느껴졌다(억지로 감동을 부풀리려고 하는 마무리에 힘을 준 느낌이랄까). 끝부분에 럭키를 보러 간다는 말이 없었거나, 아니면 지금의 얌전한 그레이시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면 작위적인 느낌을 덜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그레이시를 키우게 된 데에도 나름의 역사가 있겠지만). 그게 뭐 잘못은 아니다. 기왕이면 얌전하고 영리한 개가 같이 살기에 수월한 것은 사실이니까. 그리고 그 이유로 그들이 멍청한 개 말리를 사랑했다는 사실이 변색되지는 않는다.


2010. 1. 1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