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 창비시선 292
고은 지음 / 창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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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를 쓰는 사람의 눈과 소설을 쓰는 사람의 눈은 다르다는 소리를 언뜻 들은 적이 있다. 눈 뿐이랴, 뇌도 다르다는 소리를 들었다. 아마도 누군가의 잡담이었을 거다. 나는 그 때, 과연 그렇구나 하고 생각했다.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나는 시보다는 소설을 선호한다. 시는 한 번 읽어서 잘 와닿지 않는다. 몇 번 곱씹어야 알 듯 말 듯, 페이지 한 장이 몇 번이고 읽는데도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은 나처럼 성격 급한 사람에게는 일종의 고문이다. 그래서 내가 아는 시는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교과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 시들 이외에는 찾아 볼 수 없다. 그래서 더더욱, 시는 시이고 시는 결코 다른 것이 될 수 없다는 일종의 붉은 딱지를 시에 붙여놓고 있었다.

  고은 시인의 <허공>은 시집이다. 시집이니 그 안에는 시가 담겨있어야 하는데, 어쩐지 나는 여기에서 여행담을 읽고 푸념이 담긴 수필을 읽고 그리고 신문에나 실릴 법한 사설과 또 두꺼운 역사책에서나 나올 법한 과거의 이야기를 읽었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혼잣말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실 때에 느껴지는 묵직함과 편안함이 동시에 흐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허공>을 시집이 아니라 마치 옛날 이야기 모음 혹은 누군가의 일기를 몰래 보는 마냥 후딱 읽어치워 버렸다. 가슴이 먹먹하기도 하고 웃음이 나기도 하고 왠지 졸음이 오기도 하고 정신이 번쩍 깨이기도 했다.

  어린애가 나이 지긋한 어르신 이야기를 들으며,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아듣지는 못하여도 그럭저럭 느낄 수는 있는 것처럼, 나의 시 읽기는 딱 고만한 수준인 것 같다. 책장을 후딱 넘기고 싶어서 안달이 나면 넘겨버리고, 그러다가 앞으로 가서 다시 읽으며 히죽대고, 그리고 뭐 이해 못하면 말지 하는 기분으로 헤헤거리다가도 이해못함이 미안해지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시를 쓰는 사람의 눈과 소설을 쓰는 사람의 눈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다르고서야, 시에서 그렇게 다양한 장르가 흘러 흘러 와 닿을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허공>에 있는 시를 하나하나 곱씹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겠지만, 꼭 다 이해해야만 그것을 좋아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2009. 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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