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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하의 독도 이야기 살림지식총서 139
신용하 지음 / 살림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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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독도문제로 온 나라가 시끌벅쩍하다. 온 나라뿐만 아니다. 듣자하니 일본에서도 시끄러운가보다. 동해 한 가운데 놓여져있는 섬, 독도. 돌섬이라, 돌을 '독'으로 부르는 울릉도지방 사투리에 의해 만들어진 이름 독도.  이 작은 섬에 대한 논쟁은 뜨겁지만, 우리 귀에 들리는 것은 그저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하는 상투적인 주장뿐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는 점을 의심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도무지 버릴 수 없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도대체 독도를 자기들 땅이라고 주장하는 저들(일본)의 근거는 뭔가?"라는 의문이 그것이다. 아무리 억지라지만 기본적인 근거없이 영유권을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때, 살림출판사에서 발간되어 있던, 작고 싸며 그 분량또한 만만하게 읽을 수 있는 이 책을 떠올렸고, 바로 서점에 나가 구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로 30여년을 봉직하며 한국 사회사, 사상사 연구에 한 평생을 바쳐온 신용하교수의 이름 앞에 붙는 또하나의 타이틀은 '독도학회 회장'이라는 것이다. 독도라는 섬에 대해 오랜 시간을 연구해 온 신교수에게, 특히나 윤건차교수에 의해 이념적 스팩트럼의 가장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장 오른쪽은 조갑제 등의 반동적 보수주의)인 국수주의자로 명명된 그에게 있어서는 치욕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이 책은 최근 독도논쟁 직전에 출간되어 가장 최근까지 발견된 자료들을 꼼꼼하게 살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문장 속에서 다소 격한 감정을 버리진 못하나 일본측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저자의 말처럼 비판을 하려면 적어도 사실관계에 대해서 기본적인 것은 알아야하므로 5000만 국민 모두가 알고 있어야 할 독도에 대한 중요한 지식들을 담아놓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 독도를 자신들의 땅으로 주장하는 직접적인 근거는 1905년 일본이 '무주지(주인없는 땅)'이라며 내각회의에서 독도를 자신들의 땅으로 편입했다는 것인데, 실제로 5년전에 대한제국 명으로 독도를 우리의 땅이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한 바 있으니 그들의 주장의 근거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신교수의 주장을 보며 독도문제의 기본적인 틀을 알게됨과 동시에 왜 독도라는 땅을 지켜야하는지도 생각하게 하니, 이 책은 사실관계를 제공함과 동시에 그에따라 우리의 의무감에도 강한 자극을 주고 있는 것이다.

얇은 이 책을 한 자리에 앉아 읽으면서, 책 말미에 나와있는 저자의 이 말에 밑줄을 그어보았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독도 영유권 분쟁'은 없다. '독도 영유권 논쟁'이 있을 뿐이다."

책의 마지막 장에 나와있는 저자의 처방을 위정자들이 듣고,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책을 덮는다. 사실관계보다는 힘의 논리로 제단되고 있는 현실에 한 숨을 쉬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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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리타 2005-03-23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제사회의 힘이 논리에 독도를 잃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 세계사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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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라는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씌어진 이 소설은 일인칭 소설의 특 장점 중 하나인, 진솔성을 지니고 있다.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소설을 읽는다는 느낌보다는 자서전을 본다는 느낌, 한 실존했던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는 느낌만을 받았다. 그 동안 수 많은 일인칭 소설들을 읽으며 '이건 어차피 사기야'라고 생각했던 나의 습관으로 볼 때, 특이한 일이었다.

이 소설은 일단 내용도 그리 복잡하지 않다. 한 아이와 연상 여인의 애정행각을 그리는 초반부와 나치 전범재판의 '주인공'이 된 여인(한나)의 이야기라는 두 축이 이 소설을 구성하고 있다. 애정행각은 매우 충격적인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그리 충격적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아이는 황달로 아팠고, 그 아픔을 어느 정도 극복해낸 때, 여인을 만난다. 그리고 여인과의 관계에서 자신감을 얻기도 하고, 아픔을 겪기도 한다. 그리고 그 경험은 그의 일생에 걸쳐서 그림자로 남는데 그러한 흔적은 소설의 곳곳에 나타난다. '내가 꾼 꿈들은 모두 비슷했다. 그것은 단 한 가지의 꿈과 테마가 변형된 것이었다'에서는 그녀가 살고 있었던 반호프가의 그 장소에 대한 기억이 나타나 있다. 그는 '나는 이제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한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녀의 '그 얼굴의 아름다움'을 기억하려고 애쓴다.

그녀가 아이와 관계를 가지기 전에 의례적으로 행하는 책읽기의 모습은, 매혹적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뒤에서 유태인 학살과 연결되어 그녀가 문맹이라는 사실이 드러날 때, 솔직히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이 소설의 중간 이후는 솔직히 처음처럼 속도감있게 읽히지는 않는다. 솔직히 중간부분에 유태인 학살에 대한 이런 저런 아이(혹은 작가)의 이야기가 개입될 때는 너무 지루하고 재미가 없어서 와락 짜증이 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설의 후반부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너무 인상적이어서 약간 도덕적이다시피 감동적이라는 삐딱한 생각도 해 보았지만, 그와 그녀가 녹음테이프와 편지를 주고 받는 장면들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름답다. 그녀와의 재회모습은, 더 이상 성교는 존재하지 않으나 그보다 더 강렬하였다. 그녀가 자살한 뒤에 7000마르크의 돈을 기부하는 것이나, 그녀가 그의 편지를 그토록 기다렸다는 교도소장의 말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관객들을 울리려는 감독과 각본의 의도적인 계획으로도 느껴지지만...

다른 소설들보다 재미있게 읽었고, 할 말도 많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으나 막상 덮고 나니 그리 할 말이 많지는 않다. 왜일까? 아마도 그것은 이 소설에서 나의 경험을 추출해낼 수 없어서 일 것이다. 다른 소설들을 읽으며 나는 그 소설들 속에 나를 투영시키곤 했는데 이 소설을 읽어나가면서는 그러한 '작업'을 할 수 없었다..글쎄..한 번쯤 더 읽고 생각해봐야겠다. 아니다.. 이 소설은 두 번 읽으면 그 맛이 떨어질 것 같다. 그냥 한 번 읽은 기억대로 남기고 싶다. 주인공처럼, 희미한 기억 속에서 가물가물하게..가물가물한 추억으로 만들고 싶다. 왜 있지 않은가? 어린 시절에 정말 좋은, 재미있는 소설이나 영화라고 생각해서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다시 찾아보았을 때, 그 재미가 반감하여 과거의 좋았던 기억마저 갉아버리는 그 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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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노벨레 (구) 문지 스펙트럼 9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음, 백종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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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꽃이겠지/잡으면 사라지는/어리석은 눈이겠지/삼류 같고 바위 같은' -김점룡 '지리산정상에서-꿈23' 중에서

고원에 따르면 '부부의 성생활에서 서로 긴장감을 잃어버린 두 남녀가 상대방의 죽음을 꿈꾸며 다른 사람과 성의 쾌락을 맛본다는 것이 <<꿈의 소설>>의 간략한 내용'이다. (고원, '소설과 영화', '내러티브' 제4호, 한국서사학회, 2001)

제목에서처럼 이 소설은 '꿈'의 이야기이다, 아니. 꿈같은 이야기이다. 그렇기에 이 소설에서는 꿈이라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그 역할이란 두 주인공의 성적인 욕망을 대리하는 것이다. 일상에서는 감히 이야기하지 못할 것들이 꿈을 통해서 드러나고, 주인공들은 서로에게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이 자신이 꾼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그 꿈은 그들의 욕망이 꿈이라는 형태를 빌려 나타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물론 주인공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책의 5장은 알베르티네의 꿈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꿈속에서 그녀는 '내가 단지 한 남자의 소유인지 아니면 다른 남자에게도 속해 있었는지'를 모르겠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이야기는, 그것이 꿈이 아닌 현실에서 서술될 때,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꿈(혹은 꿈이라는 변명은)은 그 모든 것을 다 용납한다.
그러나 꿈이라는 것이 때론 현실과도 같은 영향력을 그것을 듣는, 혹은 말하는(꿈을 꾼)이에게 가하는데 알베르티네의 꿈 이야기를 들은 프리돌린의 반응은 그것을 잘 보여준다. 그는 꿈속의 그녀의 행위들-자신을 배신하는 등의- 현실의 일부로 보고, 그녀를 '정조도 없고, 잔혹하고, 배신행위를 밥 먹 듯 하는 그런 여자'라고 간주한다. '이 여자야말로 자신의 꿈을 통해 폭로된 그대로였다.'(p115) 그러나 그 자신도 '수면과 망각 속으로 서둘러 도피하는 것'을 택하고 만다. 꿈이란, 그들에게 불신과 안식을 주는, 그리고 잠시간의 평화('우리 사이의 한 자루의 칼'을 잠시 쉬게 하는)를 보장하는 하나의 통로인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꿈의 문제는, 물론 그것이 현실을 그 바탕에 깔고 있다고 하더라도 꿈이라는 양식을 통해 표출되는 한, 꿈을 통해서 해결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문제가 되는 것, 즉 꿈을 유발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에 대한 해답은 없을 것이다. 다만 추측해본다면 프레돌린의 측면에서 접근해 볼 수 있다. 그는 의사로서,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나름대로 성공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나름의 콤플렉스가 있다. 그중에 몇 가지를 다소 산발적으로 적어보자면,
ⅰ. 그는 길거리에서 그를 치고 가는 '푸른 모자를 쓴' 대학생들에게 대응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을 무력하다고 생각하나 그것을 그 자신에게 숨기기 위해서 끊임없는 자기 변명을 늘어놓는다.
ⅱ. 마리아네의 약혼자인 뢰디거에게 그는 일종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뢰디거는 그보 다 조건이 좋다. 그는 곳 역사학과의 전임이 될 것이다.
ⅲ. 이번에 병원에 새로 부임해오는 휘겔만은 그와는 달리 '학술적으로 제대로 공부한'이 이다. 그는 그 자신이 '과장으로 고려되는 일조차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콤플렉스는 그를 지배하고 자신에 대한 콤플렉스는 타자에 대한 불만과 동시에 타자에 의해 불만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은 재미있다. 그 이유는 공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소설을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허구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어느새 그들 자신의 욕망과 한계, 그리고 가능성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이 예술의 중심장르가 될 수 있었던 이유중의 하나는 '어떤 특정한 신화나 종교의 뒷받침 없이도 일상적, 보편적 기준에 의하여 파악될 수 있다는 확신과 그리고 그 확신을 떠받치고 있는 현실적 기반'에 있다고 한다.(송면, '소설미학', 문학과 지성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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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치는 여자 - 2004 노벨문학상
엘프리데 옐리네크 지음, 이병애 옮김 / 문학동네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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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을 노력해서 겨우겨우 옐리네크의 <피아노 치는 여자>를 다 읽었다.상당히 큰 기대를 갖고 읽어서 그런가보다. 긴 분량의 책인데 읽고 나면 찝찝한 느낌이 남는다. 제목만을 보고, 전에 읽었던 <밑줄 긋는 남자>라는 책이나 <책 읽어주는 여자>와 같이, 다소 서정성이 넘치는 작품인줄 알았다. 독일판 <엽기적인 그녀>인데, 훨씬 더 엽기적이다. 이런 여자가 내 주변에 있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도 아마 다른 사람들처럼 '그녀에게 가까이 가지 않'았으리라. '사람들은 에리카를 빙 돌아간다'(p115)

이 소설은 읽다 보면 알겠지만 상당히 '연극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주인공은 세 명이고 그들 사이의 갈등이 '엽기적'으로 벌어진다. 마치 한 무대에 서 있는 것처럼. 그 연극은, 눈에 생생하게 잡힌다. 좁은 공간과 인물들의 배치는 그 연극성을 뒷받침한다.

'그녀는 의욕 없이 마지막 연주곡을 시작하는 한 마리의 지친 돌고래다.'(p75) 그녀는 항상 힘들고 외롭다. 그녀는 가학적이 된다. 그녀는 레슨을 받는 아이들에게 냉혹한데, '그 망친 콘서트가 끝난 다음에 딸의 머리를 때리며 에리카 어머니가 딸에게 한 바로 그 몸짓'(p79)으로 아이들을 괴롭힌다. 그리고 자신이 당했던 그대로 '수업시간에 그녀는 학생들의 자유로운 의지를 하나씩 하나씩 차례로 꺽어 버린다.'(p128)

악순환의 고리가 지속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녀는 스스로 격리된다. 어머니가 주는 것만을 먹고, 그것만을 모든 것으로 아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녀는 항상 외롭다. '점점 더 심각하게 그녀는 다른 사람이 전혀 알지 못하는 내적 삶의, 멀리 날아 올라가는 풍선 속으로 침잠해 들어간다.'(p104) '에리카 그녀는 결국 다른 한 편에 홀로 선 채, 자신이 외따로 서 있다는 사실에 긍지를 느끼는 대신 그 반대편에 복수를 한다.'(p85) 그러던 순간, 나타난 것이 발터 클레머인데 이는 그녀의 삶을 통째로 바꾸어 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님직한 인물이다. 그러나 속내는, 그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녀와 마찬가지의 존재이나 또한 그녀와 가장 동떨어진 존재인 발터. 그는 처음에는 수줍은 남학생의 모습으로 그녀에게 다가간다. '그의 손은 어둠 속을 더듬지만 잡히는 건 허공뿐이다.'(p100) 그 역시 절망한다.

에리카가 원하는 것은 '누군가가 자신을 감싸주는 것'이다.(p143) '그 사람은 그녀를 열망해야 하고, 그녀를 추적하고, 그녀를 우러러보아야 하며, 끊임없이 그녀를 생각해야 하며, 그녀에게서 빠져나가는 어떤 비상구도 가져서는 안 된다.'(p143) 한 사람의 완벽한 희생을 그녀는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클레머는 그렇게 해줄 수 없다. 그럼에도 그는 '여자를 불안하게 만들어서 그녀의 중심인 음악을 앗아간다.'(p144) 이 둘이 도시에서 서로 쫓고 쫓아가는 장면은 꽤 인상적인데 두 사람이 도시를 헤매고 다니는 이유는 '남자는 자신을 식히기 위해, 여자는 질투심으로 자신을 달구기 위해서다.'(p157) 그녀는 여전히 '고독한 여인'(p167)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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