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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노벨레 ㅣ (구) 문지 스펙트럼 9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음, 백종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아득한 꽃이겠지/잡으면 사라지는/어리석은 눈이겠지/삼류 같고 바위 같은' -김점룡 '지리산정상에서-꿈23' 중에서
고원에 따르면 '부부의 성생활에서 서로 긴장감을 잃어버린 두 남녀가 상대방의 죽음을 꿈꾸며 다른 사람과 성의 쾌락을 맛본다는 것이 <<꿈의 소설>>의 간략한 내용'이다. (고원, '소설과 영화', '내러티브' 제4호, 한국서사학회, 2001)
제목에서처럼 이 소설은 '꿈'의 이야기이다, 아니. 꿈같은 이야기이다. 그렇기에 이 소설에서는 꿈이라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그 역할이란 두 주인공의 성적인 욕망을 대리하는 것이다. 일상에서는 감히 이야기하지 못할 것들이 꿈을 통해서 드러나고, 주인공들은 서로에게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이 자신이 꾼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그 꿈은 그들의 욕망이 꿈이라는 형태를 빌려 나타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물론 주인공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책의 5장은 알베르티네의 꿈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꿈속에서 그녀는 '내가 단지 한 남자의 소유인지 아니면 다른 남자에게도 속해 있었는지'를 모르겠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이야기는, 그것이 꿈이 아닌 현실에서 서술될 때,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꿈(혹은 꿈이라는 변명은)은 그 모든 것을 다 용납한다.
그러나 꿈이라는 것이 때론 현실과도 같은 영향력을 그것을 듣는, 혹은 말하는(꿈을 꾼)이에게 가하는데 알베르티네의 꿈 이야기를 들은 프리돌린의 반응은 그것을 잘 보여준다. 그는 꿈속의 그녀의 행위들-자신을 배신하는 등의- 현실의 일부로 보고, 그녀를 '정조도 없고, 잔혹하고, 배신행위를 밥 먹 듯 하는 그런 여자'라고 간주한다. '이 여자야말로 자신의 꿈을 통해 폭로된 그대로였다.'(p115) 그러나 그 자신도 '수면과 망각 속으로 서둘러 도피하는 것'을 택하고 만다. 꿈이란, 그들에게 불신과 안식을 주는, 그리고 잠시간의 평화('우리 사이의 한 자루의 칼'을 잠시 쉬게 하는)를 보장하는 하나의 통로인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꿈의 문제는, 물론 그것이 현실을 그 바탕에 깔고 있다고 하더라도 꿈이라는 양식을 통해 표출되는 한, 꿈을 통해서 해결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문제가 되는 것, 즉 꿈을 유발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에 대한 해답은 없을 것이다. 다만 추측해본다면 프레돌린의 측면에서 접근해 볼 수 있다. 그는 의사로서,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나름대로 성공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나름의 콤플렉스가 있다. 그중에 몇 가지를 다소 산발적으로 적어보자면,
ⅰ. 그는 길거리에서 그를 치고 가는 '푸른 모자를 쓴' 대학생들에게 대응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을 무력하다고 생각하나 그것을 그 자신에게 숨기기 위해서 끊임없는 자기 변명을 늘어놓는다.
ⅱ. 마리아네의 약혼자인 뢰디거에게 그는 일종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뢰디거는 그보 다 조건이 좋다. 그는 곳 역사학과의 전임이 될 것이다.
ⅲ. 이번에 병원에 새로 부임해오는 휘겔만은 그와는 달리 '학술적으로 제대로 공부한'이 이다. 그는 그 자신이 '과장으로 고려되는 일조차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콤플렉스는 그를 지배하고 자신에 대한 콤플렉스는 타자에 대한 불만과 동시에 타자에 의해 불만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은 재미있다. 그 이유는 공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소설을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허구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어느새 그들 자신의 욕망과 한계, 그리고 가능성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이 예술의 중심장르가 될 수 있었던 이유중의 하나는 '어떤 특정한 신화나 종교의 뒷받침 없이도 일상적, 보편적 기준에 의하여 파악될 수 있다는 확신과 그리고 그 확신을 떠받치고 있는 현실적 기반'에 있다고 한다.(송면, '소설미학', 문학과 지성사,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