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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와 거기 - GQ 에디터 장우철이 하필 그날 마주친 계절과 생각과 이름들
장우철 지음 / 난다 / 2012년 10월
평점 :
GQ라는 잡지가 있다. 아직 나도 잘은 모른다. 하지만 남자들의 잡지라는 것은 안다. 이 책의 저자는 GQ의 에디터이다. 그가 여행을 하면서 끄적거린 내용이다.
마우스 옆에 단단한 돌 하나를 두고 거기에 손을 올리고 쉬면 얼마나 호젓한지, 모르는 사람은 영원히 모를 것이다.
-p89 수석 中에서
무언가 손으로 쥐길 좋아하던 시절이 있었다. 모든지 잡고 만지고 느끼려고 했다. 그 탓인지 지금은 손에 잔주름(?)이 남보다 많다. 한마디로 손바닥에 그어진 잘잘한 선들이 남보다 훨씬 많다. 그런데도 책을 손으로 쥐고 대여점에 가곤 했다. 대여점이라고 하면 만화책을 많이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환타지책이나 김하인님의 절절한 멜로 소설 또한 대여점에서 빌릴 수 있었다. 그렇게 책도 손에 쥐길 좋아했고, 강가나 산에 가면 차가운 돌에 손바닥을 대어보기도 했다. 그 시원한 편안함. 저자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마치 평상에 앉아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쐬는 듯한 느낌을. 그리고 돌에 마음을 두시는 것인지, 어머니가 개울가나 산이나 돌을 주울 수 있는 곳이면 마음에 드는 돌을 골라 하나 둘씩 가져오곤 했는데 지금은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
나의 맛집을 여기에 적어둔다. 정읍 충남집의 쑥국, 공주 진흥각의 짬뽕밥, 대전 소나무집의 오징어 국수, 이태원 봄봄의 블랙 올리브 파스타, 구룡포 철규분식의 찐빵, 제주 포도호텔의 튀김우동, 신이문동 로지스시의 모듬초밥, 화순 양지식당의 돼지고기 두루치기, 왜관 약목식육식당의 갈빗살구이, 안동 물고기 식당의 은어찜, 진주 천황식당의 비빔밥, 제주 남춘식당의 김밥, 포천 미미향의 짜장면·······사시사철 가던 길 멈추고 돌아가고 싶은 집, 그야말로 집이려니 하는 집. 시간이 흐르고 목록은 변할지도 모르나, 그 어쩔 수 없음을 또한 맛있게 반기려 한다.
-p115 나의 맛집 中에서
그는 맛이나 몇 첩 반상인가 따지지 않고 단순한 기준을 정했다. ‘이 집에 또 오고 싶은 가?’ 그야말로 정답이다. 또 오고 싶은 이유는 맛뿐만 아니라 그 집 서비스도 한 몫 할 것이다. 그 외의 것까지 포함한 답변이라서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언젠가 그가 말한 집에 한번 가보고 싶다. 특히, 우동을 좋아하는 나는 제주 포도호텔의 튀김우동이 강하게 당긴다. 그의 목록을 적어보면서 잡지에서 일하는 에디터로서도 많이 여행을 떠났겠지만 감각을 키우기 위해, 사진을 찍기 위해, 그리고 그냥 많이 떠나서 먹어본 음식들이 그의 맛 지도를 만들었구나 싶다. 그리고 이 목록을 적으면서 왜 이리도 키득키득 웃음이 나는지 모르겠다. 그는 이렇게 감각적인 언어로 오감을 자극하는 맛이 있는 것 같다.
농약 대신 천연제재를 쓰시죠. 그건 어떻게 시작하셨어요?
그놈의 농약에 지쳐가지고요. 농약값만 1년 평균 들어간 것이 2천만 원 3천만 원이여, 죽어라 농사지어갖고 수매하면 뭐이 남는 것이 있어야지. 하다보면 맨 마이너스 같아. 아, 이거 아니다. 그러다 진주 쪽에서 농약 대신 천연재료로 제재를 만들어 쓰고 있다는 얘길 들었지요. 농약보다 낫다, 한번 써봐라, 인체에도 해롭지 않고 괜찮다 그러기에 그 뜻을 받고 준대로 갖다 써보고, 결과는 이렇더라 어떻더라 얘기하고 그랬지요.
-p200 구례에 사는 농부 홍순영
농부를 인터뷰한 것이 재미났다. 농부아저씨의 사진을 찍는 데서 뭐 볼 것 있다고. 이런 말까지 공감이 가고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농약을 안 쓰고 농사를 하시는 농부아저씨의 인터뷰이다. 이 잡지 아니면 어디서 이런 인터뷰를 볼 수 있을까 한다.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부분일지도 모른다. 안정된 먹거리 또는 차후에 농사를 짓겠다는 사람들이 봐도 좋을 인터뷰. 그가 인터뷰한 사람들은 권부문, 이상은, 이소라, 빅뱅의 태양 등등이 등장하는데 우리가 알던 그런 틀에 박힌 인터뷰 내용보다 재미나다. 그것은 어쩌면 그냥 그들과 대화를 하고 온 듯한 느낌에서 그럴 지도 모른다. 편하게 이야기 하다보면 가슴속 이야기를 하게 되고 상대방이 나에게 진지한 관심이 있다면 진지하게 대답해주는 게 정석이기도 하다.
에치고유자와 역
국경의 터널을 빠져나오니 설국이었다는 말,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는 말,
밤에 그 말을 보았다.
틀림없는 그 말이 거기 있었다.
본 것만 말해도 돼.
그것 말고는 아무 소용이 없을지도 몰라.
길이 멀다 느낀 나는
돌아가는 기차로 급행을 택했다.
도쿄에 첫눈이 온다는 뉴스를 들었다.
수요일
- p253
담담하게 쓰인 글은 무엇보다도 더 절제된 감성으로 가슴을 파고드는 지도 모른다. 돌아가는 길을 급행을 택한 것은 과연 눈 때문이었을까. 가끔 무엇에 도망치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묻어버리고 싶은 기억에 도망치는 것일까. 너무나 빛났던 기억이라 다시는 그 순간 같은 순간이 못 올거라 생각한 기억일까. 버리고 싶은 물건들인가. 이제는 설레지 않는 나 자신일까.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되는 글을 쓰는 그가 부러워졌다. 담담하게 써내려간 글들이 뭉클하게 다가 올 때마다 잠들지 못하고 헤매였다. 순간순간마다 책속에서 헤매였다. 그러다 잠이 들고 또 잠들기 전에 펼쳤다. 그의 책은 그런 재미가 있었다. 펼치면 펼칠수록 어떤 재미가 나올지 몰랐다.
글로 돈을 벌 수 있는 것부터가 부러운 그가 30대에 쓴 글이라 한다. 30대에 느낀 양상들. 에디터로 바라본 시선들. 그 모든 것이 여기에 담겨 있었다.
깨보니 아침. 창밖의 빗소리가 알림인 날. ‘고맙습니다’ 중얼거리며 화분 다섯 개를 창가에 내놓고, 어제의 편지들에 고무밴드를 튕겨 묶었다. 이 편지를 여기 싱크대 맨 위 선반에 로젠탈 접시 밑에 놓아두었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내가 여기 있다면, 너는 거기 있어야 하니까.
-p354~355 마지막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