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너무 익숙해서 - 느리게 여행하기
서제유 지음 / 미디어윌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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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를 통해 제공 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된 서평입니다. 본 서평은 간서치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멀리 여행을 계획하고는 있지만 현실에 묶여 가지 못하는 것에 안타까움인지 여행서적이 눈이 간다. 어쩌면 지금에 만족하지 못함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겠다. 왠지 훌쩍 떠나면 모든 일상사가 뒤로 가버릴 것 같다. 저자가 남긴 사진과 짤막하기도 하고 길기도 한 글들을 보고 있노라면 여행의 단면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나와 달리 떠나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보다 용기가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녀도 혼자 떠나는 여행이, 낯선 나라로 떠나는 것이, 그곳에 홀로 남아있다는 것이 겁이 난다고 말한다. 그녀도 나처럼 겁이 많은 사람인 것이다. 어쩌면 그녀도 서울 한복판에서도 길을 잃을 수 있는, 버스를 잘 못 타서 엉뚱한 데에 내리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러다 놀래서 다시 길을 돌아갈 수 있지만 낯선 나라에서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피가 쭈뼛 서는 경험일 것이다. 그러다 이곳도 사람이 사는 곳이다.’라는 생각에 안도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문득 여행지에서는 마음에 여유가 있어 이전에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한 일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사랑으로 서로를 채울 수 없어 사랑대신 음식을 꾸역꾸역 먹던 그녀는, 그와 자신이 달랐을 뿐이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그때는 알지 못했던 깨달음. 그리고 밀려오는 그리움, 아쉬움, 그 모든 것을 여행지에 부는 바람에 날려버린다.

 

한편, 여행지에서 유적을 보고 듣고 하지만 결국, 남는 것은 그 밤의 웃음뿐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아무리 멋있는 것을 봐도 함께 간 동행자와 함께 웃는 웃음, 그 즐거움, 행복감. 그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때에 뭘 보고 뭘 먹었는지 보다 그때에 얼마나 즐거웠었는지가 남는다. 그 감정, 사람들. 어쩌면 모든 것은 사람으로 기억되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여행을 따라가다 보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에 기쁘고 또 반가웠다. 여행지에서 떠올릴 수 있는 상념들은 나를 그와 비슷한 상념으로 데려갔다. 하지만 여행의 여유로움은 언제나 기간이 정해졌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그리고 여행을 떠날 때의 그녀의 설레임보다 두려움이 앞서는 그녀를 보면서 여행을 떠난 다는 것은 어쩌면 용기보다는 두려움을 떨쳐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솔직하게 겁이 난다고 말해준 그녀에게 감사를 하고 싶다. 겁이 난다고 그녀가 말해주었기에 나도 시도해볼 용기가 나는 것 같다.

 

사실은 나도 겁이나

낯선 공간, 낯선 사람들 사이에 홀로 서있는 일이

사실은 나도 겁이나. 아닌 척 하는 것뿐이야. (20)

 

먹고 먹어도 끊임없이 배가 고팠다.

 

그때의 난, 그날의 난

나에게 필요했던, 너에게 요구했던,

나의 사랑을 그렇게 채우려 했었다.

 

결코 채워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129)

 

여러 날을 파리에 머물면서

멋진 그림들과 유명한 건축물, 유적지들을 구경하지만

정작 남는 건 공원에 가득했던 꽃향기와 와인 잔을 기울이며 나누었던

그 밤의 웃음들뿐이다. (168)

 

지금도 충분해

꼬마와 헤어지고 그 깊은 우물을 내려가는 내내 이 말을 되뇌었어. 나는 이미 그 아이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손에 쥐고 누리고 있는데 한번이라도 충분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었던가? (187)

 

누구나 산다는 건 조금 힘든 일이잖아.

그리고 어쩌면 좀 서글픈 일이기도 하지.

그 모든 날들 중에

이렇게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는 것,

그 자체가 기적이야. (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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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보지 못한 숲 오늘의 젊은 작가 1
조해진 지음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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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진의 소설 <로기완을 만났다>를 읽고 나는 그녀의 모든 소설이 읽고 싶어졌다. 그래서 만난 그녀의 신작 <아무도 보지 못한 숲>.

 

미수를 처음 봤을 때 윤이 받은 인상은 마네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미수는 빌딩의 귀빈이나 안면이 익은 사무실의 간부들에게 허리를 굽혀 무언의 인사를 할 때를 제외하곤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의자에서 일어나는 일도 드물다.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사실 인사가 아니라 안내였지만 빌딩 안내도가 층마다 마련되어 있고, 로비 한쪽에 각각의 사무실들과 자동으로 연결되는 내선 전화기가 설치되어 있는 이 빌딩에서 빌딩 안내원인 미수를 찾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니, 거의 없었다. 미수와 만나는 동안 윤은 자주 그녀의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넣고 간지럼을 태우곤 했다. 마네킹 같은 그녀도 웃는 법을 아는지 궁금해서였을 것이다. 의외로 미수는 잘 웃었다. 미수가 웃으면 그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31)

 

미수는 빌딩 안내원, 그녀의 연인인 윤은 그 빌딩은 보안직원이었다. 그들은 같은 공간에서 눈이 자꾸만 마주쳤고 그러다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윤은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몇 걸음 움직이면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방에 사는 미수를 점차 멀어지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부터인가 미수의 방에는 물건들이 미수가 알아차릴 수 없이 아주 미세하게 휴지가 바뀌어져 있고 화장솜이 줄어들지 않는다. 누군가가 채워놓고 가는 것이다. 그녀는 이러한 일을 할 사람은 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윤이 아니었다.

 

윤의 옥탑방에서 그 서류들을 발견한 후에야 미수는, 윤이 감정을 표현하는 일뿐 아니라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에 매우 인색한 사람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어쩌면 미수가 알았던 윤이란 그의 옥탑방 크기, 팔을 몇 번 정도 뻗으면 다 젤 수 있는 딱 그만큼의 크기였는지도 모르겠다. 부정할 수 없는 건, 미수 역시 윤에게는 708호 방 크기로 기억될 거라는 사실이었다. 한때는 윤에게만큼은 솔직해지고 싶었다. K시를 떠나온 이후 현수에 대해 말해 준 사람도 윤이 유일했다. (59)

 

윤의 방에서 윤의 과거를 본 미수는 자신과 같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명문대 출신이라 이러한 일을 할 만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자신과의 이질감을 느끼고 자신에게 과거를 숨긴 윤에 대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그들은 소원해졌다. 그 서류는 윤의 지난 영광이자 자존심이었다. 그것에 대해 들킨 순간, 왜 그리도 숨겨왔던 것인가! 싶기도 하지만, 다시 한 번 그 영광을 되찾기 위해서 지난 날 했던 공무원시험에 발을 들이고 싶기도 하다. 아버지의 병과 그들을 부양하는 것이 윤, 그가 아니라면.

 

날마다 거울을 보면서 세수를 하고 이를 닦고 면도를 하지만 소년은 아직 자신의 몸에서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자의 붉은 낙인을 찾지 못했다. 겨드랑이나 발바닥에 얼굴을 묻고 냄새를 맡아 보기도 했으나 포기가 곧 아웃인 세계만을 배회해야 하는 고독한 파이터의 흔적도 감지한 적 없다. 그런데도, 소년은 납득이 되지 않아 괴로웠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군중속에서 소년을 식별했고 이렇듯 무언의 눈빛과 표정으로 소년의 전진을 제지 했다. (81)

 

아무 이름도 갖지 못한, 현실서류에서 죽은 소년은, 붕 뜬 상태였다. 붕 뜬 상태이기에 아무 곳에서도 속하지 못한 그.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사채 빚에 팔려 죽은 사람의 명단에 들어가 그 보상금으로 사채 빚을 갚았다. 그는 검은 옷을 입은 그들과 따라가 함께 살았다. 위조된 여권과 카드를 가지고 카드를 긁을 때마다 자신의 거짓말을 들킬까봐 노심초사하며 살고 있다. 미수와 같은 건물에.

 

미수, 윤과 이름을 갖지 못한 소년의 삶을 보면서 소외된 사람들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삶이 무섭고 버겁고 하루의 삶에 기쁨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것이 너무나 슬펐다. 사람이라고 대접받기 보다는 미수는 인사하는 마네킹이었고 윤은 가스도 들어 있지 않은 한 번도 총을 쏠 것이라는 예상도 없는 보안요원이었고 둘은 언제나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로비에서 어슬렁거려야 했다. 이름 없는 소년은 현실을 잊기 위해 게임으로 도피하곤 했다. 게임속의 세상속에서는 겉모습도 필요 없고 게임 아이템과 그저 레벨만이 필요할 뿐이었다. 점차 삶을 게임처럼 보고 카드를 긁을 때, 게임이 성공할 것인가 아닌가를 생각한다. 그리고 소년은 미수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게 될 수도 있는 시점에서 그는 먼저 게임을 종료하고자 한다. 그것만이 어쩌면 그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모두 아무도 보지 못한 숲을 꿈꾼다. 지금의 현실을 바라보면 악몽 같으니. 잠들고자 한다. 허상이라도 차별도 없고 빚도 없고 우울한 과거도 없는 위장할 필요도 없는,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 생각할 필요도 없이 아무도 없고 미수만이 아는, 그곳에 가고 싶은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환상의 도피처라고도 할 수 있겠다.

 

누구나 어려운 시절과 희망의 빛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주저앉고 싶을 때가 많다. 그러한 이들을 보여주면서 우리에게 과연 희망이라는 것은 없는가. 다른 선택은 없는가. 도피처가 환상만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품게 된다. 하지만 사랑할 누군가가 있다면. 미수에게 윤처럼, 이름 없는 소년에게 미수의 존재처럼 사랑한 이가 있기에 환상을 깨고 진정한 꿈을 꿈꾸게 되지 않을까.

 

간절히 가고 싶은 곳이 있었다. 버그나 몬스터의 배역 따위 없는 곳, 칼이나 날카로운 유리 조각도 없는 곳, 사람이 상하지 않는 곳, 사라지거나 위장되는 자도 없는 곳, 그런 곳, 숲이라면 좋을 듯 했다. 호가 있는 숲, M외에는 그 누구도 가 본 적 없고 아무도 보지 못하는 M만의 숲이라면 남은 인생이 긴 낮잠으로만 소모된다 해도 기꺼이 모든 것을 포기한 채 편한 마음으로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았다.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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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여행을 권함
김한민 지음 / 민음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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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는 동안 즐거웠던 순간을 기억하기에 좋은 것은 찰나의 순간을 찍는 사진, 그 날의 일기와 같은 감상적이고 상세한 글도 좋지만 저자는 그림으로 여행을 기록했다. 어쩌면 다른 사람을, 혹은 풍경을, 같이 간 여행 동행자를 상세하게 기억하기에 더없이 좋은 방법일지도 모른다.

 

한번은 저자는 공항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을 관찰해 그림으로 뒷모습을 표현한다. 공항에 사람들은 자신을 배웅하는 사람을 기다릴 수도 있고, 자신의 비행시간을 기다릴 수도 있고, 어쩌면 떠나온 것에 대한 아쉬움으로 누군가 자신을 불러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 뒷모습을 표현한 그림에서 나는 문득 아버지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일하는 아버지의 뒷모습은 말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말하는 듯 했으니까. 일에 대한 힘겨움, 가장이라는 것의 무게. 그 모든 것이 뒷모습하나로 표현되었다.

 

1998년 가을, 현지 맥도널드에 가서 형과 같이 가장 싼 아이스크림 한 개를 사서 나누어먹은 그림이 동물로 표현 돼 무척이나 귀엽다. 그의 말처럼 여행지에 가면 언어도 통하지 않고 돈도 아껴야 하기에 가장 싼 아이스크림도 나누어먹게 되는 초라함을 겪게 된다.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기에 길 가던 사람에게 길도 물어봐야 하므로 겸손해진다. 겸손해진 마음으로 만나는 여행지의 경이로움. 하나라도 더 보려고 했던 마음이기에 일분일초도 소중하고 초라함을 느꼈지만 돌아보면 추억이 되고 그때처럼 낮아지지 않는 지금의 나를 돌아보게 된다.

 

우리도 나가면 외국인이다. 그러한데 우리도 외국인을 돕기가 쉽지 않은데 외국에 나가 현지인의 도움을 받는다면 어떨까. 밤중에 트리니다드 토바고출신의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길 잃은 저자 일행에게 차를 태워주었다. 밤중이었고, 덩치도 있는 사내인데 어떻게 태워줄 수 있었냐고 그는 물었다. 아주머니는 말씀하셨다. 자신도 젊었을 때 길 잃은 것이 생각났을 뿐이라고. 도움의 손길을 받으면 다른 이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자신도 똑같이 도움을 받았으므로 그 선행을 갚고 싶은 마음이 싹트고 같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심정을 아는 것이다. 저자도 나중에는 똑같은 선행을 베풀리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저자의 여행은 형이나 누나, 혹은 가족전체와 같이 간 여행이라 가족적인 느낌을 많이 받았다. 그가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하지만 글에 있어서도 그림의 깊이만큼의 내공이 느껴졌다. 그리고 불테리어로 표현한 저자를 보고 어릴 적 보았던 불테리어가 출연한 만화 바우와우를 떠올리기도 했다. 동물로 표현한 가족모두가 너무나 귀여웠다. 게다가 여러모로 표정을 포착한 느낌이 동물 사진을 찍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외국에 나가면 저절로 동행자와 의지하게 된다. 그래서 형과 손을 잡은 그림이 어색하지가 않았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한국이 아닌 이상 헤어진다면 연락할 길이 없을 지도 모르는데 서로 떨어져 있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만큼 서로를 의지하게 된다. 그래서 여행은 가끔 가는 것도 사람과 사람사이를 돈독하게 하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 가끔 초심을 잊고 사는데 그는 어린 아이가 그림에 푹 빠져서 불편한 자세로도 그림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고 깊이 감명 받는다. 자신의 지금의 모습과 대조된 모습에 자신이 얼마나 예전에 그림을 좋아했었는가 하는 생각에 빠져든다. 그리고 그 아이의 모습은 초심을 상기시키는 매개체가 된다. 그는 말한다. 그 꼬마에게 빚지고 있다고. 빚진 것을 인정하는 저자처럼 여행은 사람을 낮아져서 겸손하게 하고 자신의 초심을 기억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가끔은 아주 먼 곳이 아니라도 떠날 때가 필요한 것 같다. 그리고 어릴 적 그림일기를 그렸던 때처럼 여행을 그려보는 것도 여행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아주 섬세하게 소중한 추억을 쌓는 작업은 아닐까.

 

 

 

기다림에 열중하다 서서히 지쳐 가는 자의 뒷모습은 언제나 낭만을 자아낸다. 화가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는 말했다. “나에게 있어서 로맨틱하다는 것은, 무언가 진행되고 있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때로는 그 가족들, 연인들이 뜨거운 재회를 할 때, 옆으로 다가가 내가 몰래 그리고 있던 스케치를 건네주고 싶은 마음이 동한다. 보세요. 당신을 기다리던 사람의 뒷모습이랍니다. 상상해봤나요?(47)

 

물론 뭘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면세점 구경을 하든, 사람 구경을 하든, 책을 읽든, 일기를 쓰든 다 좋다. (가장 추천하고 싶은 것은 그냥 멍하게 있기.) 리고 나서도 시간이 남는다? 그때가 바로 그림 그릴 시간이다. (50)

 

1998년 가을, 현지 식당에 들어가는 일조차 도전처럼 느낄 정도로 쭈뼛쭈뼛하던 초보 여행자 시절이었다. 숙소를 마련한 날 시간이 남아도 겨우 하는 일이라곤 근처 맥도널드에 가서 가장 싼 아이스크림을 한 개 가서 여행 동반자 형과 둘이 나눠 먹는 것이었다. 그렇게 잔뜩 쫄아 있긴 했지만, 그때만큼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맞닥뜨리는 모든 것들에 진심으로 경이로워하며 여행의 일 분 일 초를 온전히 느꼈던 때도 없다. (61)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밤중에 낯선 사람을 태워주기로 결심할 수 있었는지 그녀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도 젊었을 때 그렇게 길을 잃은 것이 생각났을 뿐이라고,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113)

 

한소년이 눈에 띄었다. 탁자에 고개를 파묻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궁금했지만 훔쳐보기 힘들 정도로 상체를 바짝 숙이고 열중해 있었다. 옆방 라운지에 있던 엄마가 들어와서 어서 가자고 아이를 불렀지만 아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번엔 아빠가 들어와 재촉했다. 역시 꿈쩍도 안 했다. 나중에 부모가 합세해 그를 호출했지만, 아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속해서 그림만 그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거의 완력으로 몸을 번쩍 들어 안고 가는 그 순간까지 소년은 연필을 놓지 않았다. 혼이 나면서도 게임기나 스마트폰을 안 뺏기려는 아이는 많이 봤지만, 뜯어말려도 안 될 정도로 그림을 그리는 아이라·······. 뒤통수를 맞은 듯 얼떨떨한 기분으로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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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게 - 어느 은둔자의 고백
리즈 무어 지음, 이순영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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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를 통해 제공 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된 서평입니다. 본 서평은 간서치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무게라는 책 제목을 보고 생각했다. 무게라는 단어는 weight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저자는 제목을 Heft라고 지을 만큼 몸무게보다는 인생의 무게, 짐이 되는 것, 고통스럽게 짊어지고 가야 하는 것을 의미하고자 했다고 한다. 나도 이 책을 보자마자 인생의 무게가 먼저 떠올렸다. 저자와 마음이 통했다니 기쁘게 책머리를 읽게 되었다.

 

집 한구석이나 어떤 방에서 과거의 기억이 문득 떠오를 때면 그것이 나를 휩쓸고 지나갈 때까지 꼼짝 않고 서 있다가 결국 또 한바탕 외로움을 느끼죠. 어떤 때는 당신에게 편지를 써요. 어떤 때는 어느 가구 앞에 서서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지 궁금해하기도 하는데, 그러다 보면 여지없이 단절감을 느끼죠. 나는 알지 못하고, 물어볼 사람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 집이 너무도 익숙해서 그런 생각을 자주 하지는 않아요.(18)

 

아서는 2층에 올라가지 못할 정도로 뚱뚱하다. 그가 그렇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유가 너무 많아서 어떤 게 정말 그 이유인지는 모를 만큼. 그의 아버지는 자신과 닮은 뚱뚱해지는 어머니를 못 견뎌 집을 나갔다. 그리고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렸고 어머니와 닮아가는 아서의 모습에서 그와 연락을 끊고 그저 아서에게 일정금액의 돈을 부치고 있다. 아서는 부모님의 흔적이 남은 집을 홀로 지키고 있었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가 그것만으로 살찌었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러한 때에도 그는 강의를 하는 교수였다.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아서일 뿐이다. 밖에 나간 지는 오래되었다. 그래서 그는 한번씩 추억을 떠올리고 그것이 완전히 소멸될 때까지 바라볼 시간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추억은 추억일 뿐이라며 이전보다 더 큰 외로움에 휩싸이는 것이다. 외롭지만 그는 오랫동안 단절되었으므로 사람을 만나는 데에도 자신감이 부족하고 두려움을 안고 있다.

 

 

엄마 컵에 든 게 뭐예요? 이렇게 얘기해볼까 생각한다. 결국 말하지 않지만 언젠가는 해야 한다. 지난 몇 년 동안 우리는 앞에 놓인 것들이 보이지 않는 듯 연기를 해왔다. (93)

 

아서의 제자인 샬린은 그를 영웅처럼 존경했는데 왜냐하면 그녀에게는 공부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샬린은 그림 같은 집과 단란한 가정을 동경했지만 학교를 중간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고 결혼했으나 남편은 그를 떠났다. 그녀는 술에 취해 병들어 가고 있었고 그녀의 집은 그녀처럼 지저분해지고 있었다. 서로의 진실된 모습을 숨기고 아서와 샬린은 예전의 찬란했던 그들의 모습을 기억하며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녀의 아들 켈은 공부는 못하지만 야구의 영재였다. 그런 그에게 어머니는 부자집동네의 학교를 보냈고 그곳에서 야구로써 그는 인기를 얻지만 언제나 자신이 사는 동네가 아닌 부자동네의 학교에서 내면적으로 위축되기도 하고 동경하기도 한다. 그러니 외톨이라고 느낄 수밖에 없다. 책은 켈과 아서의 이야기를 번갈아 보여주면서 점차 그 두 이야기가 한 이야기가 되어가는 모습을 띠고 있다.

 

내가 울까봐 걱정된다. 감정이 북받쳐서 경기장을 물바다로 만들까 봐 걱정된다. 신경의 수도꼭지를 잠가보려하지만 소용이 없다. (188)

 

샬린은 결국, 스스로 죽음을 택하고 켈은 괜찮은 듯 노력하지만 친구를 때리고 도망치고 야구를 한동안 못하기도 한다. 감정의 통제가 전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샬린은 편지에서 아서가 켈의 아버지라고 하며 찾아가보라는 말을 남긴다.

 

한편, 예전 샬린의 모습을 띤, 어린 나이에 임신을 한 욜란다라는 여성이 아서의 집 청소원으로 들어오고 아서의 집은 청소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다가간다. 켈도 비슷한 상처를 가진 린지를 만나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준다.

 

책에서 보게 되는 무게, 가족의 죽음, 가까운 친구의 죽음, 형제의 죽음 그로 인한 부재, 아버지의 외도, 동경하는 삶과는 멀어진 자신의 모습 등 여러 가지의 삶의 무게에 대한 양상을 보여준다. 여기에 있어 사람들은 얼마나 연약한가 다시금 깨닫게 된다.

 

그리고 책은 실제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막상 병원에 입원한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켈처럼 엄마더라도 병원에 갈 자신이 없다. 특히, 환자가 죽음에 가까워 있다면 더더욱. 그런 모습에서 켈의 고통이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켈은 분명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계속해서 그 주위를 멤돌며 도망치는 켈을 보면서 우리도 실제적인 문제에 있어서 도망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저자는 무게도 함께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분명 아서의 집이 깨끗이 치워지고 디너파티를 열 수 있는 것처럼, 켈이 어릴 적 친구 디의 집이라는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은 것처럼 무게도 더 무거워질 수 있지만 더 가벼워질 수 있는 희망적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에게도 아서처럼 집밖을 나갈 수 없는 고난의 시간이 있을 테지만 분명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제시해준다. 덕분에 읽으면서 조금 눈물이 났다. 그리고 정말 아서와 만난 듯한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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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나는 당신이 달다 - 어느 여행자의 기억
변종모 글.사진 / 허밍버드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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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모 작가의 책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음식으로 여행 속에서 사람을 기억하는 것만큼 뚜렷한 것도 없지 않을까. 여행자에게 음식은 기억을 이끌어 내는 하나의 소재와도 같게 느껴졌다.

 

뜻하지 않게 떠난 여행일지도 모른다. 여행은 그렇게 느닷없다. 그러한 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우연 속에서 계산할 수 없는 확률을 가지고 만난 것일까. 그러한 사람들에게 생일 축하파티를 받을 줄은 그도 몰랐을 것이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풍경도 환타지스러운데 같이 생일을 챙겨주는 이들과 이 모든 것이 어우러진다면 얼마나 황홀할까 싶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일은 더 큰 행복으로 다가오는 법이다.

 

지구의 끝, 우수아이아로 가는 길에 만난 후지여관 아주머니. 그녀는 한국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곳에 호수를 보고 남편과 함께 정착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도 모른 곳에서 다시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그와 같은 이가 여관을 맡게 된다면 떠날 수 있을 것 같다는 그녀의 마음은 진심이 아닐까. 알지 못한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지만 그만큼 비슷한 그를 알아본 것 같았다. 비슷한 사람끼리는 흐르는 공기부터가 다르니까. 알아볼 수 있으니까. 그녀가 떠나는 그에게 건네준 커피. 그것은 여행자와의 이별을 향한 그녀의 마음이었다. 작지만 정성이 들어간, 떠날 때에 타이밍을 딱 맞춘 커피. 그것이야말로 타국에서도 간직한 한국의 정은 아닐까.

 

볼리비아의 수크레, 그곳 사진관에 한국 라면이 있는 것을 보고 침을 꿀꺽 삼키고 들어갔는데 직원은 난데없이 기다리라고만 한다. 사장님을 불러야 한다면서. 사장님은 역시 한국인이었다. 수크레에는 한국인 가정이 딱 2집이라서 사장님은 같은 나라 사람만 봐도 좋았던 것이다. 그는 한국인의 정을 수크레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그곳에서 대접받은 감자탕 맛은 어떠했을까.

 

꼭 여행이 아니라도 회사밖에 나가서 낯선 곳에서 만나는 회사사람조차도 반갑다. 낯선 곳에 나가면 아는 사람만 봐도 그 주변 환경이 조금은 다른, 조금은 안도된듯한 느낌에 쌓인다. 그런데 타국에서 만나는 한국인이란 그런 만남이 아니었을까.

 

여행은 아름다운 환경보다도 어쩌면 내면을 들여다볼 시간을 마련해주는 것 같다. 평소처럼 집에 있다면 친구를 만나고 텔레비전을 보고 책도 읽고 하면서 나름 시간을 보낼 방법이 있다. 하지만 여행지에서는 책도 멀리하게 되고 주변 풍경과 곁에 있는 사람에 집중하게 된다. 나의 신변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다보면 나와 만나는 시간을 갖게 된다. 그리고 돌아보게 된다. 사람은 홀로 사는 것이고 또, 원래 외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저자의 책은 이병률시인의 여행 책과도 닮아 있었다. 그와 저자는 여행 책이라기보다는 에세이에 가깝다. 그 점이 더욱더 감정이입을 하게 되는 지도 모른다. 글을 읽고 있으면 외롭다라는 생각이 자주 든다. 그러다 현지인이나 자신과 같이 여행길에 오른 사람과 친구가 되어 서로의 외로움을 덮어주고 있다. 그리고 돌아갈 곳을 찾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어쩌면 새 힘을 얻는지도 모른다. 쉼은 다시 달릴 힘을 주는 것처럼.

 

오후의 태양 사이로 흩날리던 장미꽃 비와 밤의 불꽃놀이, 그리고 무엇보다 낯선 생일 파티. 그 낯선 순간이 나는 이상하지 않아서 이상했다. 여행이란 이렇게 또 낯선 순간과 낯선 장소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내 것으로 경험하는 일, 그것을 감사히 받아들이는 일, 그 속에서 가까워지는 일일 것이다. 어쩌면 내게 익숙하지 않은 모든 것이 여행이다. (210)

 

하마터면 못 건넬 뻔했네요. 여행자들이 떠날 때마다 커피를 타서 넣어줘요. 사람들이 맛있다고들 하니까 그런 줄 알고 작별인사는 늘 이것으로 해요. 그냥 찬물에 커피랑 설탕 듬뿍 넣고 신나게 흔들면 끝인데·······.”(235)

 

가끔, 아주 드물게 한국인 여행자들이 이곳에 온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사진관 앞에 이렇게 라면도 진열하고 한국인의 분위기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을 걸어두기도 하지요. 궁금한 여행자가 사진관에 들르면 직원들에게 꼭 기다리게 하라고 부탁을 해놨죠.”(246)

 

낯선 이에게 그리 따뜻한 마음이 될 수 있다는 것. 나는 세상을 많이 돌아다니면서도 내 것을 나누는 일이 서툴렀고, 그는 움직이지 않고도 세상에 마음을 내는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많은 것을 본다고 마음이 달라지겠는가. 아무것도 보지 않고서도 모든 것을 다 안을 그 마음에 비한다면. 누군가 초대하겠다는 것은 나의 많은 것을 나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따뜻함을 보았다. 얼큰한 국물을 뜨는 순간에도, 반찬들을 당겨 앞으로 밀어주는 손끝에도 나는 황송하고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진심으로 따뜻했으므로.(247)

 

그는 스스로 자신의 체온을 올리는 방법을 알고 있다. 아마도 자신의 체온을 올리는 가장 쉬운 방법은 누군가에게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것이 아닐까. 수크레, 그곳은 분명 천사의 도시다 (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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