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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보지 못한 숲 ㅣ 오늘의 젊은 작가 1
조해진 지음 / 민음사 / 2013년 7월
평점 :
조해진의 소설 <로기완을 만났다>를 읽고 나는 그녀의 모든 소설이 읽고 싶어졌다. 그래서 만난 그녀의 신작 <아무도 보지 못한 숲>.
미수를 처음 봤을 때 윤이 받은 인상은 마네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미수는 빌딩의 귀빈이나 안면이 익은 사무실의 간부들에게 허리를 굽혀 무언의 인사를 할 때를 제외하곤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의자에서 일어나는 일도 드물다.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사실 인사가 아니라 안내였지만 빌딩 안내도가 층마다 마련되어 있고, 로비 한쪽에 각각의 사무실들과 자동으로 연결되는 내선 전화기가 설치되어 있는 이 빌딩에서 빌딩 안내원인 미수를 찾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니, 거의 없었다. 미수와 만나는 동안 윤은 자주 그녀의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넣고 간지럼을 태우곤 했다. 마네킹 같은 그녀도 웃는 법을 아는지 궁금해서였을 것이다. 의외로 미수는 잘 웃었다. 미수가 웃으면 그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31쪽)
미수는 빌딩 안내원, 그녀의 연인인 윤은 그 빌딩은 보안직원이었다. 그들은 같은 공간에서 눈이 자꾸만 마주쳤고 그러다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윤은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몇 걸음 움직이면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방에 사는 미수를 점차 멀어지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부터인가 미수의 방에는 물건들이 미수가 알아차릴 수 없이 아주 미세하게 휴지가 바뀌어져 있고 화장솜이 줄어들지 않는다. 누군가가 채워놓고 가는 것이다. 그녀는 이러한 일을 할 사람은 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윤이 아니었다.
윤의 옥탑방에서 그 서류들을 발견한 후에야 미수는, 윤이 감정을 표현하는 일뿐 아니라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에 매우 인색한 사람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어쩌면 미수가 알았던 윤이란 그의 옥탑방 크기, 팔을 몇 번 정도 뻗으면 다 젤 수 있는 딱 그만큼의 크기였는지도 모르겠다. 부정할 수 없는 건, 미수 역시 윤에게는 708호 방 크기로 기억될 거라는 사실이었다. 한때는 윤에게만큼은 솔직해지고 싶었다. K시를 떠나온 이후 현수에 대해 말해 준 사람도 윤이 유일했다. (59쪽)
윤의 방에서 윤의 과거를 본 미수는 자신과 같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명문대 출신이라 이러한 일을 할 만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자신과의 이질감을 느끼고 자신에게 과거를 숨긴 윤에 대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그들은 소원해졌다. 그 서류는 윤의 지난 영광이자 자존심이었다. 그것에 대해 들킨 순간, 왜 그리도 숨겨왔던 것인가! 싶기도 하지만, 다시 한 번 그 영광을 되찾기 위해서 지난 날 했던 공무원시험에 발을 들이고 싶기도 하다. 아버지의 병과 그들을 부양하는 것이 윤, 그가 아니라면.
날마다 거울을 보면서 세수를 하고 이를 닦고 면도를 하지만 소년은 아직 자신의 몸에서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자의 붉은 낙인을 찾지 못했다. 겨드랑이나 발바닥에 얼굴을 묻고 냄새를 맡아 보기도 했으나 포기가 곧 아웃인 세계만을 배회해야 하는 고독한 파이터의 흔적도 감지한 적 없다. 그런데도, 소년은 납득이 되지 않아 괴로웠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군중속에서 소년을 식별했고 이렇듯 무언의 눈빛과 표정으로 소년의 전진을 제지 했다. (81쪽)
아무 이름도 갖지 못한, 현실서류에서 죽은 소년은, 붕 뜬 상태였다. 붕 뜬 상태이기에 아무 곳에서도 속하지 못한 그.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사채 빚에 팔려 죽은 사람의 명단에 들어가 그 보상금으로 사채 빚을 갚았다. 그는 검은 옷을 입은 그들과 따라가 함께 살았다. 위조된 여권과 카드를 가지고 카드를 긁을 때마다 자신의 거짓말을 들킬까봐 노심초사하며 살고 있다. 미수와 같은 건물에.
미수, 윤과 이름을 갖지 못한 소년의 삶을 보면서 소외된 사람들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삶이 무섭고 버겁고 하루의 삶에 기쁨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것이 너무나 슬펐다. 사람이라고 대접받기 보다는 미수는 인사하는 마네킹이었고 윤은 가스도 들어 있지 않은 한 번도 총을 쏠 것이라는 예상도 없는 보안요원이었고 둘은 언제나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로비에서 어슬렁거려야 했다. 이름 없는 소년은 현실을 잊기 위해 게임으로 도피하곤 했다. 게임속의 세상속에서는 겉모습도 필요 없고 게임 아이템과 그저 레벨만이 필요할 뿐이었다. 점차 삶을 게임처럼 보고 카드를 긁을 때, 게임이 성공할 것인가 아닌가를 생각한다. 그리고 소년은 미수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게 될 수도 있는 시점에서 그는 먼저 게임을 종료하고자 한다. 그것만이 어쩌면 그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모두 아무도 보지 못한 숲을 꿈꾼다. 지금의 현실을 바라보면 악몽 같으니. 잠들고자 한다. 허상이라도 차별도 없고 빚도 없고 우울한 과거도 없는 위장할 필요도 없는,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 생각할 필요도 없이 아무도 없고 미수만이 아는, 그곳에 가고 싶은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환상의 도피처라고도 할 수 있겠다.
누구나 어려운 시절과 희망의 빛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주저앉고 싶을 때가 많다. 그러한 이들을 보여주면서 ‘우리에게 과연 희망이라는 것은 없는가. 다른 선택은 없는가. 도피처가 환상만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품게 된다. 하지만 사랑할 누군가가 있다면. 미수에게 윤처럼, 이름 없는 소년에게 미수의 존재처럼 사랑한 이가 있기에 환상을 깨고 진정한 꿈을 꿈꾸게 되지 않을까.
간절히 가고 싶은 곳이 있었다. 버그나 몬스터의 배역 따위 없는 곳, 칼이나 날카로운 유리 조각도 없는 곳, 사람이 상하지 않는 곳, 사라지거나 위장되는 자도 없는 곳, 그런 곳, 숲이라면 좋을 듯 했다. 호가 있는 숲, M외에는 그 누구도 가 본 적 없고 아무도 보지 못하는 M만의 숲이라면 남은 인생이 긴 낮잠으로만 소모된다 해도 기꺼이 모든 것을 포기한 채 편한 마음으로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았다. (13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