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의 두 여자 - 자유의 길, 구원의 길, 산티아고 가는 길!
권현정.구지현 지음 / 김&정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언젠가 TV다큐멘터리를 통해 난생 처음으로 산티아고의 순례길을 알게 되었다. 일명 카미노 데 산티아고라고 하는 이 길은 오래도록 나를 매료 시켰고, 열병을 일으켰다. TV 속 산티아고 순례길은 느릿 느릿, 흐릿 흐릿, 여리 여리한 느낌과 빛깔을 풍기며, 마치 빛 바랜 한 폭의 파스텔화 처럼, 마냥 아름답고 몽환적이며, 마냥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당시 TV 다큐멘터리는 순례자들이 어떻게 해서 카미노에 오게 되었는지를 묻는 인터뷰를 중심으로, 오로지 순례길 위에서의 모습들만이 중점적으로 다루어졌었다. 반면 순례자들이 30일이 넘는 여행일정 동안, 어떻게 의식주를 해결하는지 등등의 세세한 내용 까지는 구체적으로 다루어 지지 않았다. 그래서 인지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걷기라면 자신 있는 나로서는 산티아고 순례길이 신선노름 처럼 마냥 행복하고 고통 없는 길 처럼 여겨졌었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막연했던 산티아고 순례 여행에 대한 나의 환상이 무참하게 부서졌다.
환상은 깨어 지고, 달콤 쌉사름하고 때로는 쓴 맛 나는 생생한 현실로 새롭게 산티아고가 다가왔다. 하루 10시간 넘게 발에 물집이 잡히도록 걸어야 하고, 걷는 도중 폭우도 만나고, 강렬한 스페인의 태양과도 맞서야 한다. 게다가 순례자 전용 숙박지인 알베르게에서는 고약한 발냄새 부터, 코고는 소리, 커플들이 사랑을 나누는 민망한 소리까지, 참고 견뎌내야 할 것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거기에 언어의 장벽까지 … 특히나 숙박의 문제가 만만치 않아 보였다. 알베르게에 늦게 도착한 날이면, 이미 잠자리가 동이나버려, 성당의 차가운 바닥에서 자거나, 아니면 애써 걸어 온 길을 되돌아 가거나, 계획에 없던 추가의 여정을 뒤 늦게 떠나야 하기도 한다.
 
이 책 속 카미노 데 산티아고는 마치 우리 인생 여정의 작은 축소판 같다. 산티아고의 순례길에서는 모든일이 계획된 대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때로는 생각지 못했던 변수와 어려움도 만나게 되고, 이 것을 용감하게 뛰어넘으면, 뜻하지 않은 축복과 행운과 함께, 영적인 성장을 이루게 되기도 한다. 어려운 순간 때때로 누군가로 부터 크고 작은 도움도 받게 되지만, 그렇다고 누구도 그 길을 대신 걸어 줄 순 없다. 마치 우리가 각자에게 주어진 삶을, 잘하던 잘못하던, 잘났던 못났던,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내야하는 것 처럼, 산티아고 가는 길 역시 그러하다. 
 
천주교 3대 순례지로 로마의 성베드로 무덤(일명 십자가의 길), 예루살렘 종려나무길,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 야고보의 무덤 산티아고(조개껍질이 상징)가 있는데, 나는 이 세 가지 순례길 중 유독 산티아고의 길에 매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은 나의 환상과 동경을 앞서 언급했듯이, 산산이 조각내고, 심지어는 산티아고 여행에 대한 나의 계획 까지도 통째로 뒤흔들어 놓았다. 하지만, 이 책을 만난게 천만 다행이었다. 환상을 깨야, 비로소 제대로 진실된 산티아고를 만날 수 있으리란 마음이 들었다. 가볍게 기분 전환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에는 많은 준비가 필요 없겠지만, 산티아고와 같은 순례길의 긴 여정에는 몸도 마음도 많은 단련이 필요함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산티아고 여행을 준비하는 내게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가령 캡 모자만으로는 뜨거운 스페인의 태양을 완벽하게 막을 수 없고, 생각지도 못하게 귀에 화상을 입을 수 있으므로 챙이 넓은 모자를 준비해야 한다던가, 벼룩 등의 작은 곤충으로 부터도 여행 중에는 건강에 위협을 받을 수 있다던가, 생존을 위한 간단한 스페인어 정도는 익히고 가는 것이 고생을 그나마 줄일 수 있다는 내용 등이 그러하였다. 

여행의 가장 큰 재미 중 하나는 쇼핑이라 생각했던 내게, 책 속 ’두 여자’는 고행의 순례길 속에서도, 사막의 오아시스를 안내하듯, 비록 아주 소소하지만 쇼퍼홀릭의 갈증을 해소시키기에 충분한 쇼핑 팁들도 잊지 않았다. 순례 여행길 이라는 것이 자의든 타의든 버리고, 비우는 것이 기본이 되는 터라, 자칫 쇼퍼홀릭에게는 지루하기 짝는 고행길 일 수 밖에 없지만, 책 속 '두 여자는' 당당하게도 카미노데 산티아고의 순례길에도 소비미학의 서광을 비춰 준다.     

이 책은 특이하게도 두 명의 공동 저자에 의해 쓰여졌는데, 마치 남 얘기 하듯 솔직하고 담백한 문체가 시원 시원한 느낌이다. 시작 부터 톡톡 튀는 미시족과 골드미스의 감성과 재치에 웃음 짓게 되며, 마지막 까지도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순례자들 사이에서 거북이 시스터즈로 통할 만큼 운동엔 젬병인 '두 여자'가 신체적 약세를 극복하고 서로를 격려하며, 완성해낸 산티아고 순례 여행은 잔잔한 감동을 준다. 물론 명색이 순례 여행이기는 하지만, 이 여행을 통해 두 여자가 완전 새롭게 믿음의 자녀로 거듭나지는 못한 듯 하다. 산티아고 여행 이후 도로아미타불 시스터즈라는 새로운 별명을 얻게 된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준과 지니는 카미노데 산티아고를 통해 세상과 인생이라는 여정을 보다 넓게 보고, 보다 멀리 그리고 여유롭게 바라 볼 수 있게 되었다고 믿는다. 

책 속에 실려 있는 산티아고 여행길의 사진들은 온통 파스텔톤이다. 숨막힐 정도로 고요해 보이고, 지나치게 심심하다 싶을 정도로 여백이 많다. 하지만, 지금 그 길들이 소리 없이 나를 부르는 듯, 가슴에 또 다시 산티아고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킨다. 언젠가 내가 그 길에 닿았을 때, 오랫동안 나를 기다렸노라며 그 길이 반가이 나를 맞이해 주겠지? 

내가 먼저 다가서지 않는 한, 나에게 열려 있는 모든 길들은 결코 먼저 내게 다가와 주지 않는다. 내가 결심하고, 용기있게 길을 나서고, 비록 느리더라도 한 걸음, 한 걸음 꾸준히 다가서야만 비로소 그 길에 닿을 수 있고, 이 때 비로소 그 길은 나의 길이 될 수 있다는 진리를 새삼 깨닫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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