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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 시크릿, 그림자 인간 - 세계 1%만이 알고 있는 어둠의 실력자들
손관승 지음 / 해냄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스파이라는 단어는 냉전의 종식과 함께 한동안 기억에서 점점 잊혀져 버린 단어이다. 비록 오늘날에도 여전히 다양한 분야에서 비밀스런 스파이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무수히 존재하고 있겠지만, 요즘 스파이라는 단어가 던져주는 이미지는 예전에 스파이라는 단어가 주었던 전통적이고 왠지 멋스럽고 숭고하기 까지한 이미지가 많이 퇴색해 버린 느낌이다. 요즘 흔하게 등장하는 산업 스파이나 사이버 스파이는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정치적/국가적 대업을 위해 자기 희생적인 삶을 살았던 처연한 스파이의 모습과는 왠지 상당한 수준차가 있어 보인다. 사리사욕을 위한 일이냐, 대의명분을 위한 일이냐 하는 문제가 바로 이와 같은 스파이 간의 수준차를 만드는 중요한 지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이 책은 동독의 해외 정보기관인 HVA(기구상으로는 사회 안전 부=슈타지에 속한 기관으로 동독인들의 일거수 일투족까지 감시하였다고 함)의 수장을 맡은 후 34년 동안 희대의 스파이를 길러내 세계 정보계를 교란 시켰으며, 서독뿐 아니라 서독의 우방국인 미국 영국 등의 정부기관까지 침투하며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를 실각케 한 권터 기욤 사건의 장본인인 마르쿠스 볼프라는 사람의 행적을 박진감 넘치게 추적 하고 있다. 볼프는 유대계 독일인으로 태어나 모스크바에서 성장했다. 그에게는 핏줄을 타고 흐르는 게르만적인 철저함과 함께 유대인의 명석함, 그리고 러시아 인의 인내심까지 최고의 스파이가 되기 위한 우수한 자질들이 천부적으로 부여되어 있는 듯 하다. 작가의 말 처럼 어찌 보면 볼프라는 인물은 이름 처럼 고독한 늑대의 삶, 즉 스파이의 삶을 살기 위해 타고난 인지도 모르겠다.
볼프는 스스로 '신발 보다도 더 자주 국적을 갈아 치웠다'고 말 한다. 이 책 속에는 '얼굴 없는 사나이'라 불리며 그림자 인간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감추며 살아야만 했던 한 남자의 이야기가 매우 박진감 넘치게 펼쳐지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뜻 밖에도 이 책을 지은 사람이 다름아닌 우리나라 MBC 방송국의 보도특집 팀장 손관승님이라는 점이다. 당연히 스파이나 첩보 이야기는 외국인 작가들의 전유물 처럼 여겼던 터라 이 책의 저자 역시 독일인이나 미국인 일 것이라 막연히 짐작했었다.
저자가 한국인이라는 의외성과 반가움 외에도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즐거움은 바로 20여년 동안 기자 생활을 해온 저자 손관승님의 글솜씨이다. 마치 신문 기사의 특종을 미끄러지듯 읽어 내려가는 듯한 속도감과 함께, 한 장 한 장 읽을 수록 흥미를 더해가는 유려한 글솜씨가 전문 작가 못지 않다는 생각이 들게 하였다.
이 책속의 볼프의 삶은 한 편 매우 화려하면서도, 다른 한 편 매우 고독하다. 볼프는 대의를 위해서라면 자기 자신조차 철저하게 잊고 살았다. 특히나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정보기관의 책임자가 되어서 겪어야 하는 비극 중 하나는 당신이 아무리 정직해도 사람들이 당신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이다”라는 말은 단적으로 그의 삶속에 드리워진 비밀을 품은 자의 절대 고독을 보여 준다.
이 책을 통해 만나게 된 ‘그림자 인간’ 볼프의 삶을 통해 나는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스파이의 삶에 대해 마치 한 편의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세세하고 구체적인 그림을 그려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는 어릴적 한 동안 가슴에 품었던 스파이의 삶에 대한 나의 동경이 현실이 되어 있지 않은 점에 매우 감사하게 되었다.
스파이의 삶이란, 어쩌면 저자의 말 처럼 직업적으로는 완벽한 삶을 사는게 가능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불완전하고 시종일관 이중적이며, 자기 모순적인 불안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게 일반적인 모습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시대에 따라 그 본질적인 의미를 변화 시켜온 스파이라는 단어 처럼, 만약에 지금 어딘가에서 정치적 국가적 대의와 명분을 위해 스파이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이 좀 더 자신의 삶을 위해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길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