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박경리 시집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0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박경리가 평생의 스승으로 모시던 어른이 있었다고 한다. 바로 소설가 김동리(1913~95) 선생인데, 신기하게도 박경리가 김동리에게 맨 처음 보여준 원고는 소설이 아니라 시였다고 한다. 1954년 박경리의 습작시를 일독한 김동리는 "상은 좋은데 형체가 갖춰지지 않았다."고 냉정한 평가를 했다고 한다. 상심한 박경리 에게 김동리는 "시 대신 소설"을 써보라고 권했고, 그렇게 하여 쓰여진 소설이 바로 "현대문학"에 발표된 "계산"이라는 박경리의 등단작 이라는 일화가 있다. 끝내 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셨던 것 일까? 아니면 그 만큼 시를 사랑하셨던 걸까? 그래서 마지막 순간까지도 펜을 놓지 않으시고 모든 기운을 사르면서 이 책 속 서른 아홉편의 시를 남기신 걸까?

위와 같은 일화를 미처 모른 채 이 유고 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을 읽게 되었는데, 이 시집을 읽다보면 문득 문득 소설과의 경계가 모호할 정도로 장문인 시들도 눈에 띄어 시로서는 조금 낯선 느낌이 들기도 했다. 가령 <친할머니>와 같은 시가 그러했는데, 솔직히 이런 산문시 와도 같은 장문의 시가 처음엔 익숙치 않았다. 하지만, 어느새 나도 모르게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옛날 이야기를 듣는 듯한 기분이 들면서 박경리 할머니가 시를 통해 들려주시는 이야깃 속으로 스르르 빠져 들었다. 

<소설가 박경리 vs 시인 박경리>

박경리의 대표작 <토지>가 무려 25년이라는 긴 세월을 통해 완성되었 듯, 
"소설가 박경리"는 수십 장, 수백 장의 파지를 내면서 언어를 고르고, 문장을 다듬고 고치면서 작품을 완성시키신 반면, "시인 박경리"는 "물 흐르듯" 막힘 없이 시를 써 내려간 모양이다. 아래 박경리의 딸 김영주 님의 서문에서 처럼, 늘상 소설가로만 익숙한 박경리의 "시인으로서"의 모습이 새롭고 신선하다. 어쩌면 시에 더 재능이 있으셨던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에 시인 박경리를 살아 생전이 아닌 이렇게 뒤 늦게 유고시집으로 만나게 된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특히나 박경리의 시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위의 일화를 통해 알게되고는 더욱 마음이 아팠다.  


"늘 단정하고 엄숙한 모습으로 책상 앞에 앉아서 글 쓰시던 어머니, 어머니는 언제나 변함없이 수십 장, 수백 장의 파지를 내시면서 하나의 작품을 완성시키셨습니다. 그러나 이번 시들은 그다지 고치시지도 않고 물 흐르듯 써 내셨습니다. 언제나 당신에게 가장 엄격하셨으며 또 가장 자유인이기를 소망하셨던 어머니의 모습이 여기 마지막 노래로 남았습니다."  

<4대에 걸친 여인들 ...>

이 유고시집을 읽다보면 무려 4대에 걸친 여인들을 만나 볼 수 있다. 먼저 이 시집을 지은 "소설자이자 시인"인 박경리, 그리고 이 시집을 엮어낸 박경리의 "딸" 김영주 님, 그리고 이 시집을 통해 소개되고 있는 박경리의 "어머니"와 "친/외할머니" 세 분이 바로 이 시집에서 만나게 되는 4대에 걸친 핏줄의 흐름이다. 무려 4대에 걸친 여인들의 삶이 얼기설기 엮여 있는 이 시집은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통한 우리 여인네들의 삶의 변천사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특히 박경리가 그녀의 어머니를 그리는 몇 편의 시들을 읽으면서는 어김없이 가슴이 메어오고 눈물이 흘렸다. 누군가의 손녀로 그리고 딸로 태어난 우리 여인네들은 어른이 되면 어느 순간, 누군가의 어머니가 되고 또 할머니가 된다. 이런 순환의 고리가 이 유고시집 속엔 고스란히 녹아 있다. 특히 "어머니"라는 절재적 존재에 대한 회상과 그리움은 애절하기만 하다. 

<박경리와 마빡이?>

그 밖에도 이 유고 시집 속엔 80년 생을 사신 박경리의 가치관, 인생관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풍요와 탐욕, 그리고 현대 소비 문명 및 핵무기에 대한 박경리의 쓴소리도 들을 수 있다. 또한 대 작가님이시긴 하지만, 한편으로 내겐 팔십이 다 되신 할머니의 친숙한 이미지도 반 이상 차지하고 계신 "박경리 할머니"의 "마빡이"에 대한 생각, 그리고 동시대를 살고 있는 작가 "박범신"에 대한 생각도 뜻 하지 않게 읽을 수 있어 신기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유고시집을 읽는 내내 틈틈히 시집 뒷편에 있는 박경리의 사진들을 들여다 보았다. 보고 또 보았다. 그리고 한참을 들여다 보았다. 불과 올해 5월 까지도 우리와 함께 숨쉬고 살아 계셨던 분이 이젠 아무것도 지니지 않으시고 홀가분하게 다른 세상에 가셨다는게 도무지 실감나지 않아서 이다. "토지"라는 작품이 우리 국민에게 주었던 감동과 환희의 엄청난 크기를 생각해 보면, 과연 박경리가 그녀의 이 유고시집의 제목 처럼 마지막 순간 모든 것을 홀가분하게 훌훌 털어 버리실 수 있으셨을지 궁금해 진다. "토지"라는 대작을 집필하며 보냈던 25년 세월의 노력과 열정도, 그리고 그 밖의 여러 작품들과 그 작품들을 통해 우리 국민들에게 주었던 감동도 ... 모두 이렇게 우리 곁에 고스란히 남기고 가실 수 있을 만큼 홀가분하게 비워진 박경리의 욕심없는 마음이 부럽기만 하다.


<히말라야의 노새-박경리>

히말라야에서
짐 지고 가는 노새를 보고
박범신은 울었다고 했다
어머니!
평생 짐을 지고 고달프게 살았던 어머니
생각이 나서 울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나는 박범신을
다르게 보게 되었다
아아
저게 바로 토종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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