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날의 선택
유호종 지음 / 사피엔스21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삶을 살면서 죽음에 대해 그리고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던 적이 거의 없었던 듯 하다. 죽음도 삶의 일부이고, 어쩌면 또 다른 삶의 시작일 수 있는데, 우리는 죽음과 그 이후의 생에 대해선 거의 생각하지 않고 아무런 준비 없이 살아간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준비 없는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죽음의 과정과 그 이후의 삶에 대해 많은 것들을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도 허무해 질 수 없는 삶의 가치들이란 무엇일지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저자는 죽음이 인간 누구나 겪는 공평한 것이며, 죽음을 항상 의식하고 살아갈 때 현재의 삶과 그 삶을 이루는 것들을 죽음 앞에서도 허무해질 수 없는 중요한 가치를 가진 것으로 느낄 수 있다고 주장 한다.

또한 죽음의 정체성에 대한 이와같은 탐구는 죽음의 문제를 심화시키는 측면도 있지만, 죽음의 정체성을 통해 풀 수 없었거나 더 심화된 문제를 풀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으로 단지 죽음을 인식하는 데서 더 나아가 구체적인 행동이나 실천의 방안으로 아래의 것들을 고려 해 볼 수 있다고 한다.

죽을 때 후회하지 않게 삶을 삶/죽어가는 과정을 좀 더 나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

죽음 이후의 '자기'를 위해 준비/죽음 이후 남겨지는 사람들을 위해 준비

저자는 위의 커다란 네 가지의 실천 방안들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상세히 설명해 나간다.

이 과정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베푸는 부자로 알려진 경주 최 부잣집에서 내려오는 가훈을 통해 보여 준 “구하되 집착하지 않는 삶”의 모습 이었다.

처신은 초연하게/남을 대할 적에는 화기애애하게/일이 없을 때는 물이 맑듯이

일이 있을 때는 과단성 있게/뜻을 얻었어도 담담하게/뜻을 잃었어도 태연하게

인생의 많은 가치들은 죽음 때문에 완전히 공허해 지는 것은 아니지만, 유한한 것이 되는 것은 사실이고, 이 유한성에 대한 인식은 가슴에 진정으로 품을 수 있는 소중한 가치들을 되돌아 볼 수 있게 하는 소중한 깨달음을 주었다.

또한 “사랑은 어떤 사람에게 그가 받아 마땅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베푸는 것”이라는 정의 역시 마음에 와 닿았다. 이 책은 죽음이라는 소재를 통해 삶을 돌아 보고 반추하게 하는 묘한 매력을 지닌다. 또한 죽음의 정체성을 파헤쳐 가는 과정에서 논리적 모순을 최소화 하기 위한 저자의 오랜 고민을 엿볼 수 있어 좋았다.

하지만, 이 책엔 몇 가지 개인적으로 아쉬운 단점들이 있다.

첫 째, 책 중간 중간 Between the lines 라는 제목으로 여러 가지 글들이 실려 있는데, 내용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이야기들도 있어 가끔 ‘쌩뚱맞다’는 느낌이 들었다.

둘 째, 파스칼이 ‘특정 신을 믿는 것이 믿어서 사실이면 아주 좋고 사실이 아니라도 손해 볼 것은 없다’고 한 부분에 대한 저자의 반론 이었다. 물론 특정 종교를 믿는데 따른 저자의 손익계산법은 매우 흥미로웠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도 허무해 질 수 없는 절대불변의 가치들을 논하면서 너무나 실리적이고 이해 타산적 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저자의 예시 처럼 아우구스티누스나 칼 루벵 같은 독실한 종교인들이 죽음에 임박해서 구원을 확신하지 못해 공포에 떨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에 반해 독실하지 못했던 종교인들이 죽음에 임박해서 놀랍게도 구원의 확신을 얻은 경우도 많다. 이는 아우구스티누스나 칼 루벵의 신앙심에 대한 시험의 문제이지, 신앙의 대상이 되는 신적인 존재의 변덕스러움이나 불신감의 문제는 아니다. 물론 유한해 보이는 인간 삶을 영겁의 시간, 영원의 시간으로 확장 시킨다면, 고작 수십년의 악행에 대해 영원한 지옥으로 처벌하는 것은 정의롭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랑의 원리와도 거리가 멀다. 저자의 말 처럼 이와 같은 처사는 좀도둑질에 대해 종신형을 선고하는 것처럼 가혹하고 비도덕적 일 수 있다. 하지만 비도덕적인 인간의 행위에 대해 언제나 도덕적인 대응, 즉 용서와 관용만을 일삼는 다면, 종교는 그 중요한 기능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물론 저자의 주장 처럼 용서와 관용도 중요하지만, 만약 내가 신이라면 나쁜 짓을 하고도 언제나 용서 받을 수 있다는 솔직한 고백은 뒤로 미룰 것 같다. 전면엔 언제나 도덕적인 행위를 염두에 둘 수 있도록 엄한 모습을 내보이며, 맘 속엔 아주 큰 용서와 관용 그리고 사랑을 감추고있을 것 같다.

물론 저자의 말 처럼, 어떤 사람이 특정 종교를 믿는가 믿지 않는가는 그가 어떤 문화 속에서 자라고 생활했는가, 종교적 감수성이 어느 정도인가, 얼마나 쉽게 남의 주장을 받아들이는가 등의 차이에 따라 달라지고, 이런 요소들은 그의 도덕성, 품성, 내면의 깊이, 가치관 등과 비교했을 때 그의 본질을 이루는 것들이라기 보다는 그의 주변을 이루는 것들인 경우가 더 많다. 저자의 멋진 비유 처럼 이것은 어떤 사람을 자주 만나 그의 인간 됨됨이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을 때에도 그에게 직접 묻지 않고는 그의 종교를 알 수 없는 것으로 설명 될 수 있기도 하지만, 실제로 인생의 연륜이 쌓여 가다 보면 그 반대의 경우를 더 많이 경험 하게 된다. 즉, 직접 묻지 않고도 종교를 짐작할 수 있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엔 아주 많다.

종교를 마치 위기 관리(Risk Management)나 손해 보험의 장단점을 평가하듯 손익을 계산한다면, 종교가 주는 위안과 사회 정화 기능 등의 무수한 장점들을 간과하게 될 위험이 크다. 신적인 영역을 인간적인 영역과 동일 선상에서 놓고 논리적으로 풀어 가는 아래의 저자의 시도는 분명 신선하고 재밌었지만, 종교 만큼 죽음에 대해 큰 위안과 평안을 주진 못하였다.

“지금 까지의 논의를 요약해 보겠습니다. 합리적 이성의 관점에서 볼 때 죽음 이후는 전혀 알 수 없는 것이어서 영원한 천국에서 부터 영원한 지옥까지의 모든 가능성을 다 열어 두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보다 영원한 지옥에 빠지지 않도록 대비해야 하는데, 그 대비책으로 흔히 제시되어 왔던 것은 선한 삶을 살아라와 특정 종교를 믿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중 후자의 지침은 지옥에 갈 위험성을 낮추지 못하면서 우리의 자아 존중감에 상처를 줄 뿐이므로 따를 이유가 없습니다. 반면 전자의 지침은 그 자체로 인간이 마땅히 따라야 할 규범이므로 따르되, 덧붙여서 지옥에 대한 대비책으로도 생각하면 됩니다. 삶을 살면서 죽음 이후에도 대비해야 하는 우리로서는 선한 삶을 살라는 이 지침을 따르는 것보다 더 현명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물론 이 지침을 충실히 따라도 영원한 지옥에 떨어질 가능성을 완전히 없앨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어떤 노력을 하든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죽음 이후, 만에 하나라도 영원한 지옥에 떨어질 가능성을 배제 할 수 없다는 사실과, 이 사실을 인식할 때 느끼는 불안은 인간이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인 듯 합니다.

도덕적으로 정당한 것 - 해야할 의무가 있는 것은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해야하고 하지 말야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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