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의 해석 - 프로이트 최후의 2년
마크 에드문슨 지음, 송정은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인간의 상호영향력>
사람은 누구나 세상을 살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크고 작은 영향을 끊임 없이 받으며 삶을 살아가게 된다.
 
내 삶을 내가 주인공인 한 편의 연극 무대로 본다면, 참으로 많은 조연들과 주연급 인물들이 등장했었고 이들은 크고 작은 영향력을 나와 주고 받았다. 이 중 어떤 사람들은 내 삶의 무대 안에서 내게 좋은 영향력을 주며 여전히 나와 같은 무대에 남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내 삶의 무대  밖으로 멀리 사라져 버렸다. 무대를 떠난 사람들 중에는, 여전히 간접적으로 끊임없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등장인물들은 내 기대와는 무관하게 어느 날 불현듯 등장했다 또 어느 날 불현듯 혹은 서서히 사라져 갔다. 이들 중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어떤 등장 인물들은 내 삶의 무대에서 좋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했던 경우도 있었다.
 
만약 프로이트가 자신의 삶을 이처럼 한 편의 연극무대로 놓고 보았을 때 히틀러라는 등장인물은 프로이트에게 어떻게 인식되고 정의된 인물이었을까?  
 
이 책을 통해 나는 과거엔 개별적이고 독립적으로만 따로따로 생각했던 여러 유명 인사들을 동일 무대에 올려 놓고 상호 연관 지어 생각 할 수 있게 되었다. 프로이트와 히틀러, 프란츠 카프카, 무솔리니, 살바도르 달리, 버지니아 울프 부부, 에머슨, 칼라일, 콜리지, 보나파르트 공주 … 등등 동일한 시간 선상에서 공존 했을 여러 유명인사들 간의 서로에 대한 영향력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한 편의 생생한 다큐멘터리>
이 책은 마치 한 편의 영상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프로이트 생애의 마지막 2년의 삶을 집중적으로 생생히 다루고 있다. 그 마지막 2년 동안 유대인인 프로이트의 삶은 히틀러를 빼 놓고는 설명이 불가해 보일 정도로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이 책에 의하면, 오스트리아 태생의 프로이트는 80여 년의 생을 살아가면서 유대인 이라는 자의식 없이 살았던 듯 하다. 하지만 그의 삶의 마지막 최후에 이르러 그는 자신의 유대인 이라는 뿌리를 그 어느 때보다 깊이 절감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게 된다.
 
<프로이트의 삶 vs.. 히틀러의 삶>    
프로이트와 히틀러 .. 이 두 사람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서로 상반된다. 한 사람은 최면술과 꿈의 분석, 자유연상 등의 정신분석학의 선구자로 칭송 받으며, 오늘날 까지도 지성계에 논쟁을 일으키는 훌륭한 사상가로 기억되며, 또 한 사람은 세계 제 2차 대전의 원흉으로, 미쳐 날뛰는 광기를 주체 못하고 세상을 피로 물들인 미치광이로 비난 받는다. 하지만 정말 의아한 점은 정작 당대엔 이 두 사람 모두 대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기반으로 대중과 상호 교류하고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점이다.
 
또한 이 두 사람 모두 개를 사랑했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개에 대한 사랑은 쇼펜하우어처럼 가벼운 염세주의에서 비롯된 것 이었으나, 히틀러의 개에 대한 사랑은 결코 가볍지 않은 염세주의에서 시작 되었다. 히틀러는 메마른 정서를 가지고 있었을 것 이란 나의 상상과 달리, 어린 시절엔 예술가를 꿈꾸었을 정도로 음악과 미술에 사랑이 깊었다고 한다. 어려운 생활속에서도 오페라 관람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을 정도로 오페라에 열광했고, 동물에게 잔인한 행위를 하는 것을 참지 못할 정도로 동물을 사랑했다. 또한 빈민가의 노동자들을 위해 숙소를 만들고 싶어 했을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의 정도 깊었다. 하지만, 어린 히틀러에게 부패한 오스트리아의 현실은 그다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국립미술학교 교수들은 히틀러의 작품을 비웃으며 그의 재능을 폄하했다고 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철저히 버림받고 배척 받았던 감수성 깊은 히틀러는 이로 인해 깊은 복수심을 품게 된 듯 하다.
 
“우리도 그들만큼 중요한 사람들이야. 밤새 눈이 내리는 동안 그렇게 눈을 치우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빈에 중요한 일을 한 거야. 그런데 이 놈의 호텔은 우리한테 따뜻한 커피 한 잔 내놓는 예의 조차 없었어. 나는 그날 밤 결심했어. 언젠가 다시 임페리얼 호텔로 돌아와서 레드 카펫을 밟고 합스부르크 왕가 사람들이 춤을 추던 그곳으로 들어갈 거라고. 언제 어떻게 그렇게 될지는 몰랐지만, 나는 이날을 기다려 왔고 드디어 오늘 밤 여기 있는 거야.”
 
만약 히틀러가 그 재능의 유무와 상관 없이 그 열정과 잠재력의 깊이로 평가 받고 국립미술학교에 입학을 허가 받았었다면, 세계의 역사는 지금과는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세상에는 생각보가 인간에 대해 이해해야 할 것은 많고, 판단해야 할 것은 적다.”
 
이 책의 어느 한 부분에 나왔던 위의 글귀처럼, 우리는 타인에 대해 이해할 의무를 부여 받았지, 섣부르게 판단할 권리는 없는 것은 아닐까?
 
<프로이트를 사랑하고 지켜낸 사람들>   
만약 히틀러도 프로이트처럼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돕고 이해하고자 하는 좋은 친구들그리고 안나와 같이 순종적인 자녀와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었다면, 세계의 역사는 지금과는 다르게 쓰여져 있지 않았을까? 또한 히틀러가 자신의 타고난 재능의 한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콤플렉스를 잘 다스려서, 부족한 재능을 쓸모 있는 것으로 잘 가꾸어 나갔더라면, 지금의 우리에게 좀 더 멋진 모습으로 기억되지 않았을까? 프로이트의 수제자 이며 전파자인 어니스트 존스의 프로이트에게 보내는 아래의 편지는 내게 큰 감동을 주었다. 요즘도 군중들 앞에서 자신을 드높이고 드러내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여기고 살아 가는 정치가들이 많다. 이들은 정치적 재능과 인간적 미덕이 부족함에도, 자신이 부여 잡은 권력을 남용함으로써 이 권력에 머리 조아리고 굽실거리는 사람들의 거짓된 충성에 길들여지고 이러한 과정을 되풀이한다. 이런 정치인들에겐 자신 보다 더 재능 있는 적임자에게 자신의 자리를 기꺼이 내어주는 양보의 미덕을 찾아보기 힘들다. 권력의 포용력보다는 파괴력에 매료된 이와 같은 사람들은 좀 더 자신을 냉철하게 돌아보고, 자신이 가진 재능의 한 것과 주고 받는 지혜가 필요하다. 바로 어니스트 존스 처럼 말이다.
 
“저는 독창성에 대한 콤플렉스가 그다지 강하지 않습니다. 저의 열정은 무엇인가를 발견해내는 것보다 장면 뒤에 존재하고, 앎의 과정에 함께 하는 데 있습니다. 저는 제게 독창성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저의 재능은 다른 사람이 지적한 것을 재빠르게 알아보는 능력이지요. 그리고 그런 재능도 분명히 쓸모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게 세상은 아기를 낳는 여성과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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