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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 욜로욜로 시리즈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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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리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 늘 이런 생각을 든다.
이 작가의 글을 '한국문학'의 범주에 포함하고 싶지 않다.
이토록 '무국적'스러운 글이라니. '박지리'라는 새로운 카테고리가 필요하다.
젊은 한국 작가들의 작품에서 흔히 느껴지는 '독자를 놀라게 할거야', '독특하게 쓸거야' 같은 거추장스러운 작품 밖 작가의 목소리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책을 읽는 동안에는 작가가 쏙 빠진다. 작품의 흡입력에 빠져서 순식간에 글을 읽어 내려가다가 책을 덮을 때가 되어서야 '역시 박지리!'라는 감탄을 할 뿐이다.

 

<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는 "새롭다". '겉멋'없이 깊이있다. 평범한 소재로 입체적이고 새로운 이야기 구조, 결말, 그리고 인물들의 생각과 "감정"을 그려낸다. 그 어떤 한국 작가가, '면접'이 예능 소재가 되고 '취업'이 모두의 관심사가 된 지금 이 시대에, '면접'을 소재로 이러한 이야기를 써낼 수 있을까? 작품에 대한 호불호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새롭다', '박지리스럽다'라는 말에는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고 확신한다.

 

이 소설은 또한 우리를 생각하게 하고, 무엇보다 "느끼게"한다. '100곳 넘는 곳에 자소서를 쓰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라며 정신 차리라고 윽박지르는 취업 필살기 강연이 인기를 끌고, 노래 1곡 들었을 뿐이면서 진심과 절실함을 운운하며 평가하는 걸 '예능'으로 소화하는 이 시대에 작가는 한 인간에 대한 사회의 '거부'에 조명을 비춘다. 일상적으로 자행되는 폭력과 그 반대급부의 기계적인 힐링과 위로가 얼마나 비인간적인지를 보여준다. 고발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담담하게 보여줄 뿐이다. 주인공 M이 느끼는 어이없을 정도의 불안감과 절망적인 수치심을 통해 우리가 '생각'하기에 앞서 '느끼게'한다. 그리고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조명을 끄고 다시 군중 속으로, 사회 속으로 독자를 밀어낸다. 조명이 없으면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만큼 평범하게, 그러나 소름끼치도록 선명하게, 자행되고 있는 폭력이다. 

 

물론 개성이 강한만큼 아쉬운 점도 있다.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도 그러하듯 부연설명이 지나치게 길거나 묘사가 거친 부분이 눈에 띈다. 혹시 작가 눈 앞에서 소설 내용의 영상이 끊임없이 반복 재생되고, 신 같은 존재가 나타나 '장면 하나 하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빠짐없이 글로 써내지 않으면 이 꿈은 계속 될 것이다'는 계시를 내린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다. 정돈되지 않은 날 것의 느낌이 박지리 작품의 매력이기도 하지만, '편집자가 작가와 논의해서 조금 수정하거나 아예 쳐냈어야 하지 않나?' 싶은 부분이 몇 군데 있어 기존 작품에 비해 완결성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작가의 기존 작품인 <양춘단 대학 탐방기>와 <다윈 영의 악의 기원>과 비교할 때, 인물에 감정을 이입하는 것이 다소 어려웠다. 위의 두 작품을 읽었을 때는 화자의 감정에 깊이 빠져든 나머지 후유증으로 힘들 정도였는데, <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는 주인공 M의 생각이나 감정이 다소 극단적인 부분이 있어 완전히 빠져들기 어려웠다. 작가가 의도한 것일수도 있겠지만, 주인공 M의 연기를 바라보는 군중 속 1인이 된 기분이었다.

 

박지리 작가의 글을 처음 읽었을 때 느꼈던 그 전율을 생생히 기억한다. <양춘단 대학 탐방기>의 책장을 덮던 그 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온갖 감정이 내 마음 속에 둥그런 멍울을 만들어내며 스쳐지나갔다. 아, 이런 글이라니, 아, 정말 이렇게 독보적인 작가라니! 지하철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야, 진짜 지리는 작가 발견"이라고 카카오톡 메세지를 보냈었다. 목적지에 도착하고서도 이 기분을 떠내려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 다음 지하철이 도착하고 사람들이 바쁘게 떠밀려나올 때까지, 멍하니 의자에 앉아있었다.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을 보고 "요즘 시대에 무슨 이런 벽돌 같은 책이 있어?" 놀라는 사람들에게는 "다 읽어버릴까봐 겁날 정도로 재미있어"라고 대답했었다. 그건 진심이었다. 그 다음 줄이 궁금하면서도 몇 장 남지 않아 아쉬운 마음에 일부러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다 읽고 나서는 너무 감탄해서 "아!" 정말 말 그대로 탄식을 했다.

 

세 번째로 읽은 <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 역시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기대가 너무 커서 혹시 실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기우였다. 작품을 통해 작가를 판단하는 것은 오만이고 불가능한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이 작품을 통해 보잘 것 없는 인간의 연약한 마음을 바라보는 박지리 작가의 눈빛을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었다. 이 작품이 '독보적인' 박지리의 '독보적인' 이야기인 이유다.

 

* 책 귀퉁이를 여러 번 접었으나 작품의 전체적인 이야기를 알아야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빼고, 작품을 읽기 전에 봐도 무방한 것만 밑줄긋기를 했다.

왜 다 큰 어른들 여럿이 창틀 뒤에 숨어 낄낄대며 새를 구경하는 걸까. 왜 새가 투명한 창에 몸을 부딪힐 때마다 오오, 하고 연민과 환호가 섞인 탄성을 내지르는 걸까. 좁은 베란다에 갇혀서 허둥지둥하는 작은 생물을 구경하는 게 그렇게 재미있나. 방향을 틀기만 하면 뒤쪽 베란다로도 충분히 나갈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작은 머리가 우습나. 새의 전부인 날개가 꼼짝없이 무용지물이 된 모습이. (51쪽)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 최소한 우리 자신은 알아야 하잖아요. 우린 그렇게 작은 존재는 아니니까." (83쪽)

03:12 그런 게 아니었어요, 선생님.
03:13 눈이 떠진다.
03:14 초등학교 때, 학생이 뭔가 모범적인 일을 하면 선생님이 포도송이 그림에 붙일 스티커를 나눠 준 적이 있다. 그 수북한 포도알을 가장 먼저 채우는 사람은 나중에 표창장 같은 걸 받는다고 했다. 교실 뒤편 게시판에 나란히 붙은 각자의 포도송이를 채우려고 어린애들치곤 내심 혈안이 되었던 것 같다.
어느 날, 한 아이의 제안으로 나를 포함한 몇몇이 쉬는 시간에 선생님 책상 주변을 함께 청소했다. 그러다 쉬는 시간이 끝나서 교실로 들어오던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는데-단지 눈이 마주쳤을 뿐이다-선생님은 무릎을 꿇고 걸레질하는 나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스티커를 받으려고 청소하는 척 시늉만 내는 사람에게는 절대 스티커를 줄 수 없단다. 알겠니?"
이곳의 고요함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쓸데없는 일들까지 모두 불러들인다. (1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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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주스 사계절 1318 문고 76
마고 래너건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사계절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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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중이 고르게 분산되도록, 우리는 깔개를 들고 타르 늪으로 내려갔다. (p.1 )

 

타르 늪? 우리? 무슨 소리지 싶은 첫 문장을 무시하고 쭉 읽어 내려간다. '감이 잡히지 않는' 이 느낌이 한 페이지 내내 이어진다. 『블랙주스』는 마고 래니건의 판타지 단편집이다. 책에 수록된 첫 단편<노래하며 누나를 내려보내다>는 독자와 씨름하듯 장소, 인물, 상황 등에 대해 최소한의 정보만을 던져준다. 뭔가 읽긴 읽었는데 뭔지 정리가 되지 않는다. 첫 작품부터 '고비'다. 쭉 참고 읽는다. 중반을 지나면서부터 '아!' 상황과 장소와 인물이 점점 윤곽을 드러낸다. 끝날 때 즈음 되면 정신이 멍-해진다. 이야기를 읽었다기보다는, 화면이 지지직 거리고 사운드는 형편없는 아주 오래된 다큐멘터리 한 편을 본 것 같은 기분이다. 처음엔 낯설게 느껴져 지루했는데, 이제 보니 엄청난 대작을, 그것도 숨겨져있던 명작을 한 편 본 느낌이다.

 

읽은 지 2주 정도 지났지만, 리뷰를 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생경한 세계'를 그려내는 이 낯선 책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한마디로 말해야 한다면, 이 책은 '환상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이다. 그 누구에게 읽혀도, "와우! 이런 소설도 있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책이다. 100% 확신한다.

 

가장 좋았던 <노래하며 누나를 내려보내다> 외에도, <여럿의 집>, <세상 어딘가에 쓸모 있는>을 특히 재미있게 읽었다. <여럿의 집>은 딱히 연관도 없건만 읽는 내내 백석의 '흰 바람 벽이 있어'가 떠올랐던 작품이다. <세상 어딘가에 쓸모 있는>은 읽는 내내 뜨거운 열기를 느꼈던 작품이다. 마고 래니먼 특유의 독특한 묘사력이 매우 돋보였다. '천사'에 대한 가장 냄새나고 뜨겁고 그러나 여전히 경외로운 묘사가 인상깊다.

 

『블랙주스』는 '환상문학'에 대한 매혹적인 답이다. 매우 불친절한, 그러나 결코 읽지 않을 수 없는! 마고 래니건의 소설은 독자를 숨막히게 한다. 책을 덮고 '대체 이 소설은 뭐지?' 싶은 마음에 멍-하니 뒷 표지를 보고 있었는데, 영국 아마존의 한 줄 평가가 내 마음을 그대로 표현해주었다.

 

무한한 자신감이 서린 이야기.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고 어떤 것도 양보하지 않으면서 아름다운 글과 강렬하고 명료한 인물들로 당신을 매혹시킨다. (영국 아마존)

 

 

*이 후기는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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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북 사건의 재구성 사계절 1318 문고 96
정은숙 지음 / 사계절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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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어른이 되기 위해서라도 우리 만나야 하지 않을까?

수능이 끝난 토요일 오후 3시, 기림중학교 은행나무 앞.

 

 

누구에게나 어른이 되기 위해 넘어야 하는 자신만의 과제가 있기 마련이다. 책 <정글북 사건의 재구성>은 이러한 성장의 과정을 그려낸 책이다. 동아리방에 던져진 폭죽 하나로 어이없이 친구를 잃어야 했던 '정글북' 아이들은 모두 그 사건으로 각자의 상처를 가진 채 뿔뿔히 흩어진다.

 

<정글북 사건의 재구성>은 죽은 친구의 아이디를 사용한 정체불명의 '나'가 보낸 메세지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정은숙 작가는 각자의 사정과 이유로 친구의 죽음에 죄책감을 가지며 살아왔던 아이들이 상처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매우 치밀하게 다루고 있다. 작가의 말 그대로 정은숙 작가는 아이들을 '궁지로 몰아붙이면서' 그들의 잘못과 상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괜찮아'를 남발하지 않으며, 쉽게 판단하거나 평가하지 않고 그대로를 보여주는 데 충실한다.

 

사랑받기 위해 기를 쓰며 사는 불안함, 진심으로 친구가 되지 못하고 자신이 상처받지 않을 정도까지만 사람과 관계하는 연약함과 경계심, 겸손으로 가장한 허영심과 오만,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에 더욱 강한 척 하는 알량한 마음, 친구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자신의 잘못이 밝혀질까봐 두려워하는 본능 등...

 

정은숙 작가는 커피, 코코아 잔, 꼬마전구와 오너먼트, 빨갛고 탐스럽지만 썪은 부분을 가진 사과 등 일상적 소재와 아이들의 감정을 절묘하게 엮어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들의 생각이나 행동에 대해 평가하지 않는다. 판단은 독자의 몫이며, 이를 방치할 것인지 극복할건지를 정하는 것 역시 아이들에게 맡겨있다.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추리' 형식으로 되어 있어 읽는 내내 매우 흥미진진했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사실 어른인 우리도 모두 갖고 있는 각자의 사정, 각자의 '추한 모습'들이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누구에게나 한 발짝 나아가기 위한 인생의 과제가 있다. 어렸을 땐 그럭저럭 평탄하게 사는 사람들을 보며, '저 사람들은 고민이 없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다시 돌이켜보니, 누구나 고민의 시간을 품고 태어나는 것 같다. 고민없이 승승장구로 달려온 사람에게도 어느 순간엔 '고민'이 배달된다. 그건 마치 '청구서'처럼 모두에게 공평하게 들이닥치는 것 같다. 어제 고민하지 않았다면 오늘 고민의 청구서가 날아온다. 시간 차만 있을 뿐, 모두가 치열하게 고민하고, 괴롭지만 견뎌내어 끝내 직면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그 계단을 넘어야 삶이다. <정글북 사건의 재구성>의 아이들은 처음에 그 계단 앞에서 모두 도망쳤다. 아이들은 혼란스러웠고, 결국 서로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회피했다. 그러나 해결되지 않은 채 지나쳐버린 그 사건은 모두의 마음에 스위치로 남았다. OFF된 것처럼 보이지만,순간 순간 자신도 모르게 폭발하여 온 몸을 휘감는 상처의 스위치.

 

어른이 되기 위해, 아이들은 만나야 했다.

 

*밑줄 그은 부분*

 

같은 방을 썼던 한 아이의 손목에서 실금처럼 잔뜩 그어진 상처들을 봤지만 도엽은 모른 척 시선을 피했다. 그건 자해의 흔적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끊으려 했던 아이. 그 구구절절한 이야기가 뭐건 아이는 스스로 산골짝 학교로 찾아들어 왔고 건강하게 잘 살고 있었다. 산들학교 아이들에겐 하루 하루의 '지금'이 과거보다 훨씬 중요했다. (125-126)

 

마음대로 하고 싶겠지만, 마음의 상태를 모르는 사람은 마음대로 하기도 쉽지 않아. 그렇지? (250)

 

*각 등장인물을 잘 보여주는 부분*

 

도엽: 혹시나 밉상으로 보일까 봐 마음이 한쪽으로 기울어도 누구 편도 들지 않았으며 아무 생각 없는 아이처럼 굴었다. 그게 맞는 방법인지 생각할 겨를조차 없이 도엽은 기를 쓰고 살았다. (151)

 

연수: 감당 못 할 일이 우리 앞에서 벌어지고 있으며, 그건 누구의 책임도 아니라는 걸 그제야 알았다.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아이러니하지만 지금이라도 열심히 살아야겠단 마음도 생겼다. (157)

 

율미: 진짜 청춘을 누릴 용기가 내겐 있을까? (230)

 

소정: 도엽을 용서하는 것도, 불편한 분위기에 눈치 보는 아이들을 배려하는 것도 자신이어야 했다. 제삼자인 율미 몫이 아니라 그건 소정의 몫이었다. 왜냐하면 소정은 둘을 가진 아이니까. 그런데 하나 가진 율미가 그 역할을 빼앗아 버렸고, 겸손과 배려가 자신의 자랑이라고 여겼던 소정은 할 일이 없었다. (89)

 

기준: (내가) 어느 관계에서도 깊이 빠지지 않고 발만 살짝 담그며 관찰한다는 걸 알고 계셨을까? (53)

 

지유: 어, 엄마가 울고 있네, 지유는 어렸지만 엄마를 안아 주려고 뒤에서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런데 전화기에 대고 한참을 울던 엄마의 말이 귓속으로 쏙 들어왔다. "그러게 말이야. 나도 병신 아들을 낳을 줄 몰랐어." 지유는 발소리를 죽이고 안방을 나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인중을 꿰맸지만 나는 병신이구나! (244)

 

*이 후기는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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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 팩 소녀 제니 2 사계절 1318 문고 74
캐롤라인 B.쿠니 지음, 고수미 옮김 / 사계절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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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보다 재미있는 2편은 처음이다.
우유 팩 소녀 제니 1권이 인물을 소개하고 갈등을 만드는 내용이었다면,
2권은 그 갈등을 다양한 인물들이 각각 어떻게 받아들이며 살아가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제이니가 사실은 유괴된 제니라는 사실을 몰랐던 존슨부부,
네 살 제니가 사라진 날부터 두려움에 지배 당한 채 살아온 스프링 부부,
스프링 가족의 일원이 되면 존슨 부부를 잃게 될거라 생각하는 제이니,
동생을 찾아서 기쁘고 설레는 동시에 강한 분노를 느끼는 스티븐과 조디 등등
그 누구도 어떻게 하는 게 옳은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다양한 인물의 서로 다른 감정과 행동이 매우 흥미로웠다.


제니의 실종으로 12년이 넘도록 고통받아온 스프링 가족.
그들은 혹여 제니가 돌아올까봐 좁은 집을 떠나지도 못했다.
저녁 식사 때마다 항상 제니를 위해 기도를 올렸다. 
아무리 행복하게 웃고 떠들어도, 마음 한 구석에 펴지지 않는 구김이 있었다.
캐롤라인 B. 쿠니는 이러한 스프링 가족의 마음을 일상에서 아주 정확하고 섬세하게 그려냈다.


제니는 수면 아래에서 가족의 모든 것을 조종했다. 

이따금 스티븐은 어머니가 설거지를 하려고 식기세척기 쪽으로 가다가 가만히 멈춰 서는 모습을 보았다. 어머니는 눈을 거슴츠레하게 뜨고 뒤뜰로 난 작은 창문으로 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스티븐은 "무슨 생각하세요?"하고 물었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제니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어머니는 제니가 춥지는 않을지, 겁에 질려 있거나 다치지는 않았을지 걱정하고 있었다. 

"비가 오나 안 오나 궁금해서."

어머니는 고개를 돌려 스티븐에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떨리는 미소, 뭔가를 숨기는 미소.
스티븐은 어머니의 말에 맞장구치며 대답했다.
"그 정도로 구름이 낀 것 같진 않아요."


이따금 스티븐은 상처를 드러내기도 했다.
"제니는 죽었어요. 그러니까 이제 걔는 잘 있는 거예요. 춥지도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고 아파하지도 않아요."
나이를 더 먹고, 어머니보다 키가 더 커진 뒤에는 팔을 둘러 어머니를 말없이 껴안았다. 어머니의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P. 47)


그 동안 스프링 부부는 얼마나 많이 부질없는 죄책을 했을까.
왜 하필 그 날 그 쇼핑센터에 갔을까? 다른 쇼핑 센터를 갔다면 아무 일 없지 않았을까. 왜 그 아이를 더 잘 돌보지 않았을까? 아니아니, 왜 하필 그 날 쇼핑을 하겠다고 생각한걸까?

 

그러나 제니는 자신이 유괴된 지도 모르고, 가족의 걱정과 달리 유복한 집안에서 사랑 받으며 자라왔다. 우리는 너를 걱정하느라 십여 년을 고통 받아 왔는데! 분명 제니의 잘못은 아닌데도, 책을 읽는 내내나는  제니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제니는 마치 스프링 가족이 자신을 유괴했다는 듯이 스프링 가족을 평가하고, 원망하고, 상처주었다.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었다. 아침 식사마저 달랐다. 스프링 가족은 오렌지 주스가 아니라 사과 주스를 먹었다. 누구나 오렌지 주스로 하루를 시작해야 하는 거 아닌가. (...) 이 집엔 빵조차 없었다! 아무도 샌드위치를 먹지 않았다. 어떻게 샌드위치 없이 살 수가 있지?
제이니는 지금까지 혼자만 쓰는 화장실이 있었다.
화장실을 다른 여섯 사람과 같이 써야 한다니 믿을 수 없었다! 
(P. 55-56)

 

머리로는 어린 제니의 혼란을 이해해야지, 하면서도 솔직히 나는 계속 제니가 미웠다. 만약 스프링 가족이 더 부자였다면, 그렇다면 좋아했을지도 몰라. 부자인 때로, 더 편하고 교양 있던 때로 돌아가고 싶은 거 아니야. 이런 고약한 생각도 들었다. 나는 특히 제니의 언니 조디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시간이라고!"
조디가 분노하며 말했다. 겨우 붙잡고 있던 분노가 터져 나왔다.
"우리는 제니를 그리워하며 십이 년을 보냈어! 그런데 이제는 제니가 가족으로 잘 정착하도록 도우면서 또다시 십이 년을 보내야 하는 거니?"

(P. 76)


스프링 가족은 분명 존슨 부부와 매우 다르다. 제니는 이런 부분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스프링 가족의 입장에서 본다면? 내 부모는 존슨 부부라며 엄마 아빠 호칭도 부르지 않는데다,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울고, 시험지에 '제니'가 아닌 '제이니'라는 이름을 쓰는 제니. 딸이자 동생이지만 너무나도 낯선 제니를 도대체 어떻게 대해야 맞나. 내가 만약 조디라면 어땠을까. 어렸을 때부터, 실종된 제니 때문에 '과잉보호' 받으며 살아야했다. 사랑하는 나의 부모가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옆에서 무기력하게 지켜보아야 했다. 동생을 찾았다는 소식에 누구보다 좋아하며 방을 치우고 준비했다. 그런데 그 동생은 부모에게 엄마 아빠라는 말을 하지도 않고, 심술난 표정으로 우리 가족을 무시한다. 내가 조디라면, 나는 그 무엇보다 우리의 엄마 아빠를 평생 괴롭히는 이 동생이 죽도록 미울 것 같다. 네 살때는 유괴되어 버려서 그렇게 엄마 아빠를 괴롭히더니 이제는 이렇게 나타나서 또 한번 엄마 아빠를 괴롭힌단 말야? 책을 읽는 내내 정말 씩씩거릴 정도로 화가 났다.


"넌 우리 가족에게 고통과 상처만 주고 있어! 네가 네 살 때부터."
조디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네가 무척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난 늘 여동생이 있으면 했단 말이야. 그리고 우린 이름도 비슷하잖아. 조디와 제니."
조디가 눈물을 닦고 다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파자마 파티를 하는 것처럼 옷도 갈아 입고, 같이 웃고, 같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넌 어둠 속에 나무토막처럼 누워 있거나 책을 읽는 게 다야. 나한테 이야기하는 걸 견딜 수 없어 하니까. 숙제에 이름도 다르게 쓰고 항상 그 사람들한테 전화를 걸지."
조디 말이 맞았고, 제이니도 그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인정할 수 없었다.
"그 사람들이 아니야! 내 부모님이라고!"
제이니가 사납게 말했다.
스티븐이 둘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조디가 다시 소리 질렀다.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건 엄마의 정육점 칼로 찌르는 거나 마찬가지야, 제니! 넌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잖아. 네가 미워! 넌 못됐어, 제멋대로에......"
조디가 마지막 말을 얼버무렸다.
스프링 부부가 퇴근해서 집 안에 막 들어온 것이다. 두 분은 무척이나 실망한 표정이었다. 
(P. 120-121)


캐롤라인 B.쿠니는 정말 대단한 작가이다. 이렇게 등장인물에 감정이입하게 만들다니! 이 부분에서 나는 "작가는 감정 뿐만 아니라 감각을 이입해야 한다"던 김연수의 말이 생각났다. 캐롤라인 B. 쿠니는 감각적 표현을 통해 나를 조디로 만들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정말 울고 싶어졌다!


​그 누구도 답을 알 수 없는 상황, 그 상황 속 다양한 인물과 갈등은 언제나 좋은 소설을 만든다.
인생이 그렇듯 이 책도 답을 내려주지는 않는다. 그래도 책을 읽는 동안 정말 진지하게 이 이야기가 나의 것인 듯 받아들이고 계속 고민할 수 있었다. 
나라면 어땠을까? 그래, 제니에게도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닐까? 이 상황에서 존슨 부부는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니,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옳은거지?

1권에서도 감탄한 바 있는 신선한 소재가 2권에서 비로소 빛을 발하는 느낌이다. 
혹여나 1권이 그냥 그랬더라도, 절대 2권을 빼먹지 마시기를.
이 책은 핵심적인 메시지는 바로 2권에 있으니까!

 

*이 후기는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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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 팩 소녀 제니 1 사계절 1318 문고 73
캐롤라인 B.쿠니 지음, 고수미 옮김 / 사계절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자신이 유괴된 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이 책을 소개하는 글에서 이 문장을 보고 정말 깜짝 놀랐다.

단 하나의 문장에서 벌써 많은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었다.

왜 유괴되었을까? 어떻게 아이는 자신이 유괴된 줄도 모르고 살아갈 수 있었을까?

그럼 지금의 부모는 누구일까? 진짜 부모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진짜 부모에게 돌아갈 수 있을까? 파노라마처럼 여러 상상이 펼쳐졌다. 책을 읽기 전부터 많은 상상을 하게 하는, 매우 흥미로운 설정이었다.

 

캐롤라인 B. 쿠니는 책 머리에 이 기발한 소재를 어떻게 찾게 되었는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공항에 붙여진 '미아 찾기' 포스터에서 십오 년 전 실종된 아이의 사진을 보게 된 그녀는 '세 살 때 사진을 보고 십오 년 뒤의 모습을 알아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하며 안타까워한다. 그러다 "뭔가가 뇌리를 탁 쳤"다.

 

실종된 아이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은 있다는 겁니다. 바로 실종된 아이 자신 말입니다.

 

작가는 작가다. 남들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포스터들을 보고 이런 생각을 했다니.

*

 

번역 때문인지, 아니면 이 책의 콘셉이 그런 건지 전체적으로 책은 외화나 미드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미국 특유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소설이랄까. 이 부분은 호불호가 갈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술술 읽히면서도 표현이 매우 정교해서, 읽는 내내 '진짜 10대'를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주인공이 나이만 10대지, 전혀 청소년같지 않은 경우의 소설도 꽤 많은데 이 소설은 읽으면서 '작가가 정말 십대를 잘 알고 있고 제대로 표현하고 있구나' 감탄했다.

 

소재 이야기를 또 해야겠다. 역시 훌륭한 소재라는 생각을 책을 읽는 내내 지울 수 없다. 소재 덕분에 정답을 내릴 수 없는 복잡한 갈등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졌고, 등장인물들 각각 '자기만의 사정'을 갖게 되다보니 읽으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입장을 찾아야했다. 혼란스러워하는 제이니가 이해 가기도 했다가, 리브의 말대로 답답하기도 했다가, 스프링 부부가 걱정이 되고 제이니한테 화가 나기도 했다. 갈등 속에 여러 인물의 다양한 감정과 생각을 담아낸 점이 매우 좋았다. 다양한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볼 수 있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스포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 어떻게 제이니가 유괴된 것이고 그 사실을 모른 채 부모에게 사랑받으며 살아왔는지에 대한 내용이 너무 뜬금없다는 것이다. 마치 추리 소설을 읽다가, 그다지 언급되지 않았고 용의자로 오르지도 않았던 사람이 범인이었소! 하는 느낌이랄까. 맥이 탁 풀린다. 갈등의 뿌리는 전혀 건들지 못한 느낌이랄까. 다소 황당했다. 그 내용을 전달하는 방식도 아쉬움이 남는다. 소파에 앉아 줄거리 읽듯이 일방적으로 한 인물이 '이렇고 저러해서'라고 말한다니.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읽는 느낌이었다. 좀 더 극적으로 풀어갔으면 좋았을 것이다.

 

캐롤라인 B. 쿠니와 '밀당'을 하는 느낌이다. 자신이 유괴된 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이라는 한 문장으로 내가 책을 읽게 하더니, 1편의 마지막도 2편을 읽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었다.

 

 

제이니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 딸이에요. 저예요, 제니." (p. 259)

 

*이 후기는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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