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리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 늘 이런 생각을 든다.
이 작가의 글을 '한국문학'의 범주에 포함하고 싶지 않다.
이토록 '무국적'스러운 글이라니. '박지리'라는 새로운 카테고리가 필요하다.
젊은 한국 작가들의 작품에서 흔히 느껴지는 '독자를 놀라게 할거야', '독특하게 쓸거야' 같은 거추장스러운 작품 밖 작가의 목소리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책을 읽는 동안에는 작가가 쏙 빠진다. 작품의 흡입력에 빠져서 순식간에 글을 읽어 내려가다가 책을 덮을 때가 되어서야 '역시 박지리!'라는 감탄을 할 뿐이다.
<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는 "새롭다". '겉멋'없이 깊이있다. 평범한 소재로 입체적이고 새로운 이야기 구조, 결말, 그리고 인물들의 생각과 "감정"을 그려낸다. 그 어떤 한국 작가가, '면접'이 예능 소재가 되고 '취업'이 모두의 관심사가 된 지금 이 시대에, '면접'을 소재로 이러한 이야기를 써낼 수 있을까? 작품에 대한 호불호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새롭다', '박지리스럽다'라는 말에는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고 확신한다.
이 소설은 또한 우리를 생각하게 하고, 무엇보다 "느끼게"한다. '100곳 넘는 곳에 자소서를 쓰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라며 정신 차리라고 윽박지르는 취업 필살기 강연이 인기를 끌고, 노래 1곡 들었을 뿐이면서 진심과 절실함을 운운하며 평가하는 걸 '예능'으로 소화하는 이 시대에 작가는 한 인간에 대한 사회의 '거부'에 조명을 비춘다. 일상적으로 자행되는 폭력과 그 반대급부의 기계적인 힐링과 위로가 얼마나 비인간적인지를 보여준다. 고발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담담하게 보여줄 뿐이다. 주인공 M이 느끼는 어이없을 정도의 불안감과 절망적인 수치심을 통해 우리가 '생각'하기에 앞서 '느끼게'한다. 그리고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조명을 끄고 다시 군중 속으로, 사회 속으로 독자를 밀어낸다. 조명이 없으면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만큼 평범하게, 그러나 소름끼치도록 선명하게, 자행되고 있는 폭력이다.
물론 개성이 강한만큼 아쉬운 점도 있다.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도 그러하듯 부연설명이 지나치게 길거나 묘사가 거친 부분이 눈에 띈다. 혹시 작가 눈 앞에서 소설 내용의 영상이 끊임없이 반복 재생되고, 신 같은 존재가 나타나 '장면 하나 하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빠짐없이 글로 써내지 않으면 이 꿈은 계속 될 것이다'는 계시를 내린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다. 정돈되지 않은 날 것의 느낌이 박지리 작품의 매력이기도 하지만, '편집자가 작가와 논의해서 조금 수정하거나 아예 쳐냈어야 하지 않나?' 싶은 부분이 몇 군데 있어 기존 작품에 비해 완결성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작가의 기존 작품인 <양춘단 대학 탐방기>와 <다윈 영의 악의 기원>과 비교할 때, 인물에 감정을 이입하는 것이 다소 어려웠다. 위의 두 작품을 읽었을 때는 화자의 감정에 깊이 빠져든 나머지 후유증으로 힘들 정도였는데, <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는 주인공 M의 생각이나 감정이 다소 극단적인 부분이 있어 완전히 빠져들기 어려웠다. 작가가 의도한 것일수도 있겠지만, 주인공 M의 연기를 바라보는 군중 속 1인이 된 기분이었다.
박지리 작가의 글을 처음 읽었을 때 느꼈던 그 전율을 생생히 기억한다. <양춘단 대학 탐방기>의 책장을 덮던 그 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온갖 감정이 내 마음 속에 둥그런 멍울을 만들어내며 스쳐지나갔다. 아, 이런 글이라니, 아, 정말 이렇게 독보적인 작가라니! 지하철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야, 진짜 지리는 작가 발견"이라고 카카오톡 메세지를 보냈었다. 목적지에 도착하고서도 이 기분을 떠내려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 다음 지하철이 도착하고 사람들이 바쁘게 떠밀려나올 때까지, 멍하니 의자에 앉아있었다.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을 보고 "요즘 시대에 무슨 이런 벽돌 같은 책이 있어?" 놀라는 사람들에게는 "다 읽어버릴까봐 겁날 정도로 재미있어"라고 대답했었다. 그건 진심이었다. 그 다음 줄이 궁금하면서도 몇 장 남지 않아 아쉬운 마음에 일부러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다 읽고 나서는 너무 감탄해서 "아!" 정말 말 그대로 탄식을 했다.
세 번째로 읽은 <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 역시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기대가 너무 커서 혹시 실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기우였다. 작품을 통해 작가를 판단하는 것은 오만이고 불가능한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이 작품을 통해 보잘 것 없는 인간의 연약한 마음을 바라보는 박지리 작가의 눈빛을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었다. 이 작품이 '독보적인' 박지리의 '독보적인' 이야기인 이유다.
* 책 귀퉁이를 여러 번 접었으나 작품의 전체적인 이야기를 알아야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빼고, 작품을 읽기 전에 봐도 무방한 것만 밑줄긋기를 했다.
왜 다 큰 어른들 여럿이 창틀 뒤에 숨어 낄낄대며 새를 구경하는 걸까. 왜 새가 투명한 창에 몸을 부딪힐 때마다 오오, 하고 연민과 환호가 섞인 탄성을 내지르는 걸까. 좁은 베란다에 갇혀서 허둥지둥하는 작은 생물을 구경하는 게 그렇게 재미있나. 방향을 틀기만 하면 뒤쪽 베란다로도 충분히 나갈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작은 머리가 우습나. 새의 전부인 날개가 꼼짝없이 무용지물이 된 모습이. (51쪽)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 최소한 우리 자신은 알아야 하잖아요. 우린 그렇게 작은 존재는 아니니까." (83쪽)
03:12 그런 게 아니었어요, 선생님. 03:13 눈이 떠진다. 03:14 초등학교 때, 학생이 뭔가 모범적인 일을 하면 선생님이 포도송이 그림에 붙일 스티커를 나눠 준 적이 있다. 그 수북한 포도알을 가장 먼저 채우는 사람은 나중에 표창장 같은 걸 받는다고 했다. 교실 뒤편 게시판에 나란히 붙은 각자의 포도송이를 채우려고 어린애들치곤 내심 혈안이 되었던 것 같다. 어느 날, 한 아이의 제안으로 나를 포함한 몇몇이 쉬는 시간에 선생님 책상 주변을 함께 청소했다. 그러다 쉬는 시간이 끝나서 교실로 들어오던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는데-단지 눈이 마주쳤을 뿐이다-선생님은 무릎을 꿇고 걸레질하는 나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스티커를 받으려고 청소하는 척 시늉만 내는 사람에게는 절대 스티커를 줄 수 없단다. 알겠니?" 이곳의 고요함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쓸데없는 일들까지 모두 불러들인다. (1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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