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고 사소한 것들의 자리 - 그곳에 살아 있는 감각과 기억에 대하여
아키코 부시 지음, 박지영 옮김 / 멜라이트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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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의 소비는 놀라울 만큼 가볍고 빠르다. 멀쩡한 가구가 폐기물 스티커를 단 채 길가에 놓이고, 한때 필수품이었던 전자기기들은 유행이 지나자마자 무더기로 버려진다. 물건은 점점 더 쉽게 대체되고, 우리는 그만큼 더 쉽게 싫증을 느낀다.

그러나 이처럼 빠르게 소모되는 세계 속에서도 시간의 흔적을 품은 채 조용히 남아 있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그런 것들에 마음이 끌린다. 오래된 물건들은 단지 낡아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과 켜켜이 쌓인 기억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생명처럼 공간에 머물며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아키코 부시의 『낡고 사소한 것들의 자리』는 바로 그 형용하기 어려운, 하지만 사라지지 않은 채 마음에 머물러 있던 감정들을 꼭 맞는 단어와 문장으로 붙잡아주는 책이다. 그의 글은 사물과 기억, 삶과 예술 사이를 섬세하게 가로지르며 우리가 무심코 지나쳐온 것들에 새로운 깊이를 부여한다. 그것은 단순한 향수나 감상에 머무르지 않고, 사물과 인간의 관계를 다시 사유하게 만드는 힘까지 지닌다.

창문에 붙어 색이 바랜 스티커,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벽난로, 금이 간 부엌 타일, 오래된 압력밥솥 같은 사물들은 그의 시선을 통과하는 순간 단순히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 소중한 이야기를 품은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결국 이 책이 남기는 것은 사물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아니라, 사물을 바라보는 태도 그 자체인 것 같다.

이 책은 짧은 에피소드들의 모음이지만, 각각의 글은 매우 깊은 울림을 남긴다. 아마도 빠르게 변하고 사라지는 세계 속에서, 우리는 어쩌면 오래도록 곁에 두고 싶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책을 읽다보면 버려진 물건, 오래된 흔적, 사소하게 여겨졌던 것들은 어느 순간 아직 읽히지 않은 이야기로 남아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무심히 지나쳐온 세계가 사실은 훨씬 더 많은 시간과 감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낡고 사소한 것들의 자리』는 버려지는 것들에 대한 애도가 아니라, 남겨진 것들에 바치는 조용한 찬사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시간의 흔적을 지우지 않고 받아들이는 태도이며, 삶을 조금 더 느리고 깊게 바라보는 방식에 대한 제안이기도 하다.

이 책을 덮고 나면 사물은 더 이상 단순한 물건으로 보이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러온 시간과 기억이 함께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그제야 비로소 ‘낡음’이라는 말의 진짜 의미를 이해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낡고사소한것들의자리 #아키코부시 #에세이추천 #멜라이트 #서평단



📚 출판사로부터 선물 받은 도서를 정성껏 읽은 후, 자유롭게 작성한 저의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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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매의 책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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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매의 책』은 서로에게 깊이 빠져든 한 남녀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플로랑과 노라, 두 사람은 곧 결혼하고 딸 트리스탄을 낳는다. 그러나 식을 줄 모르는 사랑 속에서 아이는 축복이라기보다, 둘만의 세계를 방해하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그렇게 부모의 무관심 속에서 방치된 트리스탄 앞에 동생 레티시아가 태어나면서, 이 독특한 가족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이 소설은 아멜리 노통브 특유의 기발함과 속도감 덕분에 쉽게 읽힌다. 하지만 정서적 결핍이나 설명하기 어려운 소외를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단순한 재미를 넘어 깊은 공감과 슬픔을 함께 느끼게 된다. 노통브의 작품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그런 책이었다.

사회는 오랫동안 ‘정상적인 가족’의 형태를 이상처럼 제시해 왔다. 그러나 그 틀은 때로 가족 내부의 결핍과 침묵을 가려버린다. 겉보기에는 아무 문제 없어 보이는 가정 안에서도, 아이는 충분히 외롭고 위축될 수 있다. 이 작품이 아멜리 노통브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라 하더라도 나의 과거와 겹쳐지는 부분이 매우 많아, 읽는 내내 자주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되었다. 분명히 큰 사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설명하기 어려운 공기와 분위기 속에서 내가 어떤 감각을 느끼며 자랐는지, 그때의 나를 돌이켜 보았다.

직접적인 폭력이 없더라도, 비언어적인 태도와 분위기는 아이에게 분명히 전달된다. 나는 어른들의 미묘한 망설임과 거리감, 때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냉소를 보며 자랐고,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체념하는 법을 배웠다. 원하는 것을 쉽게 말하지 않게 되었고, 감정과 욕망을 드러내기보다 숨기는 쪽을 선택하게 되었다. 트리스탄이 느꼈듯 그게 가장 안전하고도 사랑을 받는 방법이었으니까. 그렇게 몸에 밴 방식은 시간이 지나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자매의 책』을 읽으며, 내가 ‘별일 아니었다’고 넘겨왔던 순간들이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어쩌면 성인이 된다는 것은 과거를 완전히 지워내는 일이 아니라, 내 안에 남아 있는 오래된 감각과 목소리들을 하나씩 알아차리고 구분해내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때때로 그 시절의 방식대로 반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매의 책』은 내게 단순한 가족 소설이 아니었다. 이 작품은 내가 외면해왔던 감정들을 다시 꺼내 보게 만들었고, ‘정상’이라는 이름 아래 묻어두었던 경험을 직면하게 했다. 그리고 스스로 되묻는다. 나는 지금 누구의 기준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트리스탄이 어머니의 편지를 태우며 과거로부터 한 걸음 벗어났듯, 나 역시 더 이상 붙들고 있을 필요 없는 감정과 방식들을 내려놓고 싶어졌다.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그것에 휘둘리지 않는 삶을 바라게 되었다. 누군가의 기준에 맞추기보다 나 자신의 감정에 조금 더 솔직해지려는 마음으로. 그런 작은 변화의 가능성을 떠올리게 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도 쉽게 곁을 떠나지 않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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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리시 페이션트 을유세계문학전집 149
마이클 온다치 지음, 김영주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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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잉글리시 페이션트』를 오래전 영화로 먼저 만났다. 이미 영상으로 완성된 장면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영화를 먼저 보고 원작을 읽는 일은 때때로 실망을 감수해야 하는 경험이 된다. 그래서 이 책을 펼칠 때도 조심스러운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오히려 영화가 담아내지 못한 깊이와 감각이 페이지마다 살아 있어, 스크린에 미처 담기지 못한 섬세한 묘사들이 나의 상상력을 무한한 지평으로 확장시켰다. 페이지를 넘기는 동안 폐허가 된 수도원의 적막이 귓가에 내려앉고, 북아프리카 사막의 뜨거운 모래바람이 피부를 스쳤다. 영화에서는 다 전해지지 못했던 감각들이 문장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이토록 생생한 감각을 깨워낸 것은 전적으로 저자의 탁월한 필력 덕분이다. 번역된 문장임에도 우아하고 섬세한 결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고요하게 흐르는 문체는 비극적인 시대상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며, 이야기 속에 침잠된 슬픔을 더욱 투명하게 정제해 낸다.

이야기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향해 가던 이탈리아의 한 폐허가 된 빌라를 배경으로 한다. 그곳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화상 환자와 그를 돌보는 간호사 해나, 도둑 출신의 정보원 카라바조, 그리고 지뢰 제거병 킵이 모여든다. 각기 다른 상처를 짊어진 이들은 전쟁의 포화가 잦아든 그 고립된 공간에서 각자의 과거를 조심스럽게 꺼내 놓는다. 환자의 흐릿한 회상을 통해 북아프리카 사막을 가로지르는 치명적인 사랑과 배신이 펼쳐지고, 현재의 빌라에서는 해나와 킵의 애정이 싹튼다. 이들의 관계는 단순한 교감을 넘어, 전쟁이라는 거대 서사에 짓밟힌 개인들이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 안식처가 된다.

작가는 인물들의 유대를 단순한 감정의 교류로 한정 짓지 않는다. 해나에게 있어 전신 화상을 입은 환자를 돌보는 행위는 전장에서 아버지를 지키지 못했다는 부채감을 씻어내는 속죄의 의례와도 같았다. 카라바조에게 해나는 죽은 친구의 딸이자 반드시 지켜내야 할 삶의 이정표이며, 그가 쫓던 스파이일지도 모르는 환자는 진실과 의심 사이에서 그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게 만드는 존재다. 인물들은 사랑의 파괴적인 에너지와 전쟁의 참혹함 사이에서 각자의 영혼을 잃거나 혹은 찾아가며 실존의 문턱을 넘어선다.

이 시적인 서사의 중심에는 사막에서 길을 잃었던 알마시의 회상이 자리한다. 평생 지도를 그리며 국경의 허망함을 보아온 탐험가였지만, 그는 사랑하는 연인만큼은 결코 지도에 가둘 수 없음을 깨닫는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상대라는 낯선 세계에 온 생애를 던지는 모험이다. 상대의 삶을 하나하나 살피며 깊이 알아가는 과정이다. 서로의 다름이라는 험난한 강을 헤엄쳐 건너, 상대의 존재 자체에 닿으려 했던 그 처절한 노력. 소설은 그것이야말로 사랑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풍경임을 역설한다.ㅈ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기억과 사랑, 상실과 죄책감이 각각의 영토로 흩어지다가 마지막 페이지에서 하나의 거대한 지도로 완성되는 시간의 흐름을 보여준다. 그래서 줄거리를 따라가는 데 약간의 집중력이 필요하지만, 그 매혹적인 시간 여행 끝에는 국가와 지도가 정의하지 못하는 인간 내면의 지도를 그려낸 마이클 온다치의 필력에 흠뻑 빠져들게 된다.

나 역시 400여 페이지에 달하는 결코 적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일주일 내내 온종일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할 만큼 압도적인 몰입감을 경험했다. 완독 후에도 가시지 않는 아쉬움과 미련 때문에 결국 다시 첫 페이지로 돌아가 그 문장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탐독을 마친 뒤 찾아본 작가 마이클 온다체가 시인으로 먼저 등단했다는 사실을 알고 무릎을 탁 쳤다. 그래서 그의 책 전체가 이토록 감각적이고, 이미지와 리듬의 밀도가 아름답게 살아 있었구나 싶었다. 문장 하나하나가 단순한 서사가 아니라 오래 남는 시처럼 마음속에 스며들었다. 킵이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해나의 모습을 가슴에 품듯, 이 소설이 남긴 문장의 여운은 나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지도로 남을 것이다.

#을유문화사 #을유세계문학전집 #을유문화사_서평단 #잉글리시페이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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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오늘도 피어난다
오평선 지음 / 자음과모음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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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한 번이지만,
행복은 수없이 피어납니다."

내 책상 한구석에는 오평선 작가님의 전작 『꽃길이 따로 있나, 내 삶이 꽃인 것을』에서 발견한 이 문장이 여전히 붙어 있다. 지난 몇 년, 안 좋은 일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연달아 일어났을 때 나를 지탱해 준 것은 바로 이 글귀였다. 불행의 파도 속에서도 내 주변에 숨겨진 작은 행복을 찾으려 애쓰게 해준 고마운 문장이기도 하다.

그래서 『행복은 오늘도 피어난다』를 손에 들고, 나는 마치 오랜 친구에게서 온 다정한 안부 편지를 받은 마음으로 이 책을 펼쳤다. 이번 신작을 읽으며 흩어져 있던 내 마음의 조각들이 다시 한번 따뜻하게 모이는 것을 느꼈다. 이 책은 거창한 성공을 말하지 않지만, 대신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공기처럼 너무 당연해서 잊고 살았던 일상의 소중함을 조용히 일깨워 준다.

오평선 작가님은 26년의 직장 생활을 마치고 인생 2막을 시작하며, 이제는 세상의 속도가 아닌 '자신만의 시계'에 맞춰 살고 있다고 말한다. 날카로운 전문가의 시선과 손주를 보며 웃는 할아버지의 푸근함이 담긴 그의 글은, 마치 내 마음을 다 읽고 있는 것처럼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들을 건네주었다. 책장 곳곳에 담긴 명화와 명언들도 글과 어우러져 읽는 내내 마음이 참 편안해졌다.

가장 공감이 갔던 건 '걱정'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미리 끌어와 마음속에서 수없이 되새기며 살아간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렇게 붙잡고 있었던 걱정들 중 많은 것들은 결국 일어나지 않았고, 실제로 닥친 문제들은 걱정의 시간보다 '해결의 시간'이 더 중요했다. 저자가 말하듯 해결될 일이라면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가 없고, 해결되지 않을 일이라면 걱정만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다. 결국 걱정은 미래를 바꾸기보다 오늘의 마음을 먼저 지치게 만든다. 인생이라는 먼 풍경에서 보면 지금의 고민은 아주 작은 점 하나일 뿐이다.

결국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내 안에서 조용히 피어나는 작은 들꽃에 가까운 것 같다. 이른 아침 조용한 길을 천천히 산책하는 시간, 따뜻한 커피 한잔과 바삭하게 구운 토스트를 앞에 두고 잠시 마음이 느긋해지는 순간, 편안한 소파에 깊숙이 기대앉아 좋아하는 책에 빠져 있다 보면 어느새 창밖으로 해가 저물어가는 풍경들. 어쩌면 행복은 그렇게 거창하지 않은 하루의 틈 사이에 조용히 숨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실패해도 괜찮고 남들보다 조금 느려도 괜찮다. 하얀 도화지에 나만의 색깔로 수채화를 그려가듯, 우리 모두는 각자의 명화를 만들어가는 예술가들이니까.

이 책을 덮으며 '인생은 단 한 번뿐이지만, 그 안에서 행복은 수없이 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린다. 우리가 지나온 시간 속에도,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내일 속에도 작은 행복의 씨앗은 늘 조용히 자라고 있을 것이다. 오늘이라는 하루를 조금 더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그 순간이 바로 또 하나의 꽃이 피어나는 순간일지 모른다. 그렇게 나는, 다시 내 마음의 정원에 피어나는 작은 행복들을 천천히 바라보며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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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나아가는 힘 - 더 단단하고 더 능숙해지는 사람은 무엇이 다른가
박소연 지음 / 더퀘스트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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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지식과 기술의 유효기간이 짧은 시대에는 누구나 한 번쯤 이런 고민을 한다. “이 길, 계속 가도 괜찮은 걸까?” 어제까지 유효했던 전문성이 금세 쓸모없어지는 걸 보면, 지금 내가 쌓고 있는 것들이 과연 의미가 있는지 흔들리기 쉽다. 특히 개인적인 이유로 2년의 공백을 겪었던 나에게 이 질문은 단순한 고민이 아니라 꽤 오래 지속된 불안이었다. 동료들은 연구 실적을 쌓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나만 멈춰 서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그런데 이 책은 그 불안의 끝에서 예상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건넨다. 결국 중요한 건 재능이 아니라 ‘지속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뛰어난 감각이나 타고난 능력이 성공을 만든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남들이 포기하고 떠난 자리에서도 묵묵히 남아 있던 사람들이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이야기다. 처음에는 한 줄도 버겁던 사람이 시간이 지나면서 큰 성과를 이루는 이유도 결국 꾸준함에 있다. 그 과정은 화려하지 않지만, 시간이 쌓이면서 만들어내는 힘은 생각보다 훨씬 크다.

이 책을 읽으며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경험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우리는 종종 공백기나 평범한 이력을 부족한 시간으로 여기지만, 경험의 가치는 단순한 속도가 아니라 어떤 맥락에 놓여 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조직 안에서는 당연했던 일이 다른 환경에서는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강점이 되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나의 공백 역시 단순한 멈춤이 아니라, 나만의 시선을 만들어가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이 책이 말하는 건 거창한 성공 공식이 아니라, 아주 단순한 태도일지도 모른다. 멈추지 않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의심하기보다, 조금씩 쌓여가는 시간을 믿어보는 것. 나 역시 아직 확신 속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예전처럼 ‘멈춰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스스로를 가두지는 않으려 한다. 속도가 느려도 괜찮고, 때로는 돌아가는 길이어도 괜찮다. 중요한 건 다시 걸음을 이어가는 일이라는 걸 이 책을 통해 다시 확인했기 때문이다.

혹시 지금 자신의 속도가 불안하게 느껴지는 사람, 잠시 멈춰 있었다는 이유로 뒤처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한 번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아주 대단한 해답을 주기보다는, 지금의 자리에서 다시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작은 용기를 건네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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