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이다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9
장강명 지음 / 현대문학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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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은 순간에 변한다. 평범한 순간에.

장강명 소설 『서성이다』를 읽고, 조앤 디디온의 『상실』속 이 두 문장이 떠올랐다. 조금 전까지 아무렇지 않게 이어지던 하루가 한순간에 낯선 세계가 되어버리는 일.

『서성이다』는 아내의 갑작스러운 발병으로 일상이 무너진 남자, 안시찬의 사흘을 따라가는 소설이다. 우스운 일이 생기면 목젖이 보이도록 입을 크게 벌리고 웃던 아내는 평균 생존 기간이 12~14개월에 불과하다는, 가장 악성도가 높은 교모세포종 진단을 받는다. 고작 사흘이라는 시간이지만 그에게는 병원과 집, 현실과 두려움 사이를 오가는 길고 막막한 시간이다.

처음에는 이 책을 그저 소설로 읽었다. 장강명 작가의 글을 챙겨 읽기는 하지만 그의 SNS까지 찾아보지는 않았기에, 아내의 실제 투병 사실을 알지 못했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작가의 말을 읽는 순간 한동안 책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소설이라는 허구의 틀 안에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밀어 넣고, 다시 그것을 안시찬이라는 인물의 이야기로 빚어냈다는 사실이 뒤늦게 다가왔다. 내가 읽는 내내 느꼈던 무기력함, 실제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쉽게 짐작하기 어려운 공포와 불안이 작가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소설을 읽으며 느꼈던 공감은 단순히 인물의 감정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한 사람이 감당했던 시간을 마주하는 경험으로 바뀌었다.

이 이야기가 단지 안시찬의 사흘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3년 전 나의 모습 그대로를 옮겨 적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세 번 새벽 수영을 할 정도로 건강만큼은 자신 있던 어머니가 봄 기운 가득한 4월에 객혈을 하며 응급실로 향했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암 진단을 받는다. 그때의 나는 안시찬처럼 현재에도 미래에도 발을 들이지 못한 채 과거를 서성거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잔기침이 오래가는 것을 그저 감기라고 넘긴 시간 때문일까. 건강검진만 믿으며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던 마음 때문일까. 가족력이 없으니 암은 우리를 비켜갈 거라고 생각했던 오만함 때문일까.'

돌이켜보면 우리는 언제나 뒤늦게 질문을 던진다. 그때 조금만 달랐더라면, 조금만 빨리 알았더라면. 하지만 이미 지나간 시간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결국 남겨진 사람은 답을 찾기보다, 답을 알 수 없는 순간을 견디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사람들을 진정으로 묶어주는 것은 고통이다.”

장강명 작가가 책에 남긴 문장이다. 고통은 사람을 한없이 외롭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 고통을 나누는 순간, 우리는 서로의 시간을 이해하고 연결된다. 서로의 아픔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지라도, 누군가의 곁에 머물러 함께 서성이는 것.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위로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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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은 들짐승처럼 살기로 했다 - 불안과 비교에 휘둘리지 않는 삶의 태도
한그루(뉴욕털게) 지음 / 더퀘스트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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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가 성공을 향해 달리고 특별한 인생을 꿈꾸는 시대에 잠깐 멈춰보라고, 특별하지 않은 보통의 인생도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깨달은 들짐승처럼 살기로 했다』의 저자 한그루는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고, 조금 여유를 가지고 느슨해져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그저 마음을 조금 편하게 해주는 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책장을 넘길수록 생각이 달라졌다. 이 책은 무턱대고 괜찮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왜 그렇게 애쓰며 살아왔는지,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에 매달리고 있는지를 집요하게 들여다보게 한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 위로를 받으면서도 몇 번이나 멈춰 서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괜찮다는 말이 이렇게까지 나를 불편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편안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 조금 의외였다.

특히 ‘보통의 혐오’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내가 평범함을 얼마나 쉽게 ‘부족함’으로 받아들이며 살아왔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남들만큼, 남들처럼”이라는 기준은 생각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었다. 좋은 학교, 좋은 직장, 더 많은 돈, 더 나은 모습. 끊임없이 더 나아져야 한다는 기준 속에서는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조차 실패처럼 느껴지기 쉽다. 하지만 특별하지 않아도 자기 몫의 삶을 책임지며 살아가는 사람의 하루가 어찌 하찮을 수 있을까. 보통의 삶을 무조건 찬양하자는 것이 아니라, 특별하지 않은 존재도 그 자체로 존중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그동안 나를 무겁게 짓누르던 무언가를 조금 걷어내는 듯했다.

‘최적이라는 환상’에 관한 이야기는 더 아프게 다가왔다. 나는 선택의 순간마다 무엇이 더 나은 길인지, 어떤 선택이 가장 좋은 결과를 가져올지를 오래 고민해왔다. 그런데 A를 선택할지 B를 선택할지 그렇게까지 고민하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어느 쪽도 압도적으로 옳은 답이 아니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고, 선택하기 전에는 무엇이 최선인지 판단할 수도 없다. 그런데도 나는 알 수 없는 정답을 찾아 헤매느라 정작 내가 선택한 길을 살아가는 데 써야 할 에너지를 너무 많이 소모했다. 최선의 선택을 찾는 것보다, 이미 선택한 길을 어떤 태도로 살아갈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는 말 앞에서 한동안 생각이 많아졌다. 돌고 돌아 제자리인 것 같았던 이유가 어쩌면 완벽한 답을 찾으려 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이야기가 유난히 설득력 있게 다가왔던 것은, 저자 역시 그 길을 직접 헤매어본 사람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소위 먹물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책상 앞에서 삶을 분석해 내린 글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마음에 담아 두지는 못했을 것이다. 성공과 성취를 향해 달리던 사람이 오히려 그 욕망 때문에 멈춰버린 시간을 지나, 그 안에서 자신의 생각을 오래 들여다보고 건져 올린 소중한 이야기들이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구나. 당신도 그랬구나. 그런데 그 시간을 지나고 나니 이런 길도 보이는구나.” 그런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다.

결국 이 책은 ‘문제가 사라지는 법’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었다. 오히려 문제가 삶의 일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도 어떻게 괜찮게 살아갈 수 있을지에 관한 책이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되고, 특별하지 않아도 되고, 언제나 최선의 선택을 할 필요도 없다. 지금 내 앞에 놓인 삶을 나의 선택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것. 책을 덮으며 그 단순한 사실을 너무 어렵게 살아온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되었다. 이제는 조금 덜 애쓰고, 조금 덜 비교하며, 내 삶의 무게를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짊어져 보려 한다.


#깨달은들짐승처럼살기로했다 #뉴욕털게 #더퀘스트 #책리뷰 #책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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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거짓말 - 기원석 산문
기원석 지음 / 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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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을 끝내 포기하지 않는 마음,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거짓말』을 읽고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거짓말』의 저자 기원석은 시인으로 등단한 직후, 화려한 문단 대신 가장 어둡고 폐쇄적인 공간인 교도소를 택한다. 그곳에서 교도관이자 교정상담사로 일하며 죄와 벌, 그리고 인간의 본질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아름다운 언어를 길어 올리던 시인이 왜 삶의 고통과 분노가 켜켜이 쌓인 곳으로 스스로를 던졌을까. 다소 어울리지 않는 이력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어쩌면 세상이 외면하고 싶어 하는 가장 낮은 곳에서 인간이라는 존재의 깊은 서사를 탐구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교도소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그는 수형자들과 마주 앉아 심리상담을 진행한다. 대부분 법원의 명령에 따라 상담을 받아야 하는 이들은 상담 자체를 거부하거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내담자들을 보며 저자는 법적 처벌과 격리만이 최선이라는 생각에 기울기도 했다. 나 역시 이런 상담이 정말 필요한 걸까, 변화할 마음도 없는 사람에게 시간과 정성을 쏟는 일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하지만 저자는 실망과 희망 사이를 묵묵히 오가며 변화는 거창한 참회나 극적인 사건이 아니라, 상담실 문턱을 수없이 두드린 끝에 찾아오는 아주 작은 움직임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평생 자신의 죄를 외면하던 이가 비로소 자신의 삶을 똑바로 바라보기 시작할 때, 저자는 인간이 다른 방향으로 걸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수형자들의 마음에 자리한 절망을 확인하면서도, 타인이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가 한 사람을 어떻게 움직이는지 목격한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은 어쩌면 너무 편리한 결론일지도 모른다. 변하지 않는다고 믿어버리면 더 지켜볼 필요도, 기다릴 필요도, 이해하려 애쓸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저자가 제목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런 편리한 냉소와 체념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변화를 믿는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용서하고 무조건적인 관용을 베풀라는 뜻이 아니다. 인간은 호의와 긍정만으로 나아지는 존재가 아니며, 동시에 차가운 격리와 처벌만으로 달라질 수 있는 존재도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는 그들의 삶이 아직 끝난 것은 아니며, 다른 길로 들어설 가능성 또한 남아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아야 한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거짓말』은 타인의 변화에 관한 기록인 동시에, 미완성인 채로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향한 응원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쉽게 판단하고 이미 정해진 사람이라 치부했던 나의 시선 속에는 변화할 수 있는 인간의 가능성을 지우려는 오만이 섞여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언제든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비록 아주 느리고 작은 변화라고 하더라도, 누군가 곁에서 지켜봐 주는 시간 속에서 변화는 시작된다.

냉소로 사람을 가두기보다는 끝까지 이해의 끈을 놓지 않는 것. 그렇게 아주 작은 길 하나를 남겨두는 것만으로도, 삶은 다시 쓰일 수 있는 법이다.


#사람은변하지않는다는거짓말 #기원석 #달출판사 #도서추천 #책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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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해 쓸 권리 - 아티스트 웨이 글쓰기 철학
줄리아 캐머런 지음, 박성혜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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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글쓰기의 바이블,『나를 위해 쓸 권리』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쓰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 또한 위대한 작가의 책을 읽으면서 나도 저렇게 근사한 단어와 멋진 표현으로 문장을 써내려가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하지만 내가 쓴 한심한 글에 여러 번 좌절하다 보니, 결국 나는 ‘읽기’에 만족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러다 줄리아 캐머런의 『아티스트 웨이』를 만나고 모닝 페이지를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읽는 사람’에서 ‘쓰는 사람’이 되었다. 잘 쓰려고 애쓰기보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그저 편안하게 적기 시작하면서 글쓰기는 오롯이 나의 즐거움을 위한 행위가 되었다. 그때부터 쓰는 일이 조금 덜 어렵게 느껴졌고, 나도 무엇인가를 쓸 수 있다는 작은 자신감도 생겼다.

그렇게 고마운 저자의 신작이라니 기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아티스트 웨이』가 글쓰기의 무기력에 빠진 사람을 다시 책상 앞으로 데려오는 처방전이라면, 『나를 위해 쓸 권리』는 그 자리에서 계속 써나갈 수 있도록 힘을 보태주는 영양제 같은 책이다. 쓰기 시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계속 쓰고 싶어 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 것 역시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종이와 연필부터 꺼내고 싶어진다.

🔖글 쓰는 시간을 확보하는 비결은 이미 주어진 삶 속에서 시간을 내는 것이다. 우리 삶은 우리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영역이다. 진짜 작가의 삶은 따로 있다는 생각을 버려라.

돌이켜보면 나 역시 평일에는 바쁘니까 주말에 써야지, 주말에는 할 일이 많으니 시간이 생기면 써야지 하며 늘 적당한 때를 기다렸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계속 쓰지 못하고 있다는 찝찝함이 남아 있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그동안 내가 기다려온 것은 시간이 아니라 나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핑계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글쓰기를 사랑한다면 조건이 갖춰지기를 기다리기보다, 지금 내게 주어진 삶 속에서 작은 틈이라도 만들어 써야 하는 것이다.

🔖"줄리아, 좋은 글쓰기의 비결은 메모를 잘하는 습관이야. 난 메모를 아주 잘해."

그리고 그 작은 틈은 메모일 수도 있다. 나는 그동안 메모를 아주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장을 볼 때 필요한 것을 적거나 꼭 기억해야 할 일을 적어두는 정도였다. 대신 매일 일기를 쓰고 있으니 충분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하루를 마무리하며 기억을 되짚는 것만으로는 놓치는 순간이 너무 많다. 그날의 파란 하늘과 멋진 노을, 시원한 매미소리처럼 별것 아닌 것 같았던 장면을 그때그때 메모하며 붙잡아 두었다면 내 글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오늘 글을 썼나요?"
"네."
"그럼 오늘 당신은 작가입니다."

『나를 위해 쓸 권리』가 특히 좋았던 이유는 글쓰기를 특별한 사람에게 주어진 능력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데 있다. 쓰고 싶다면 누구나 쓸 수 있고, 쓰기 시작했다면 이미 작가라는 것. 작가가 되기 위해 완벽한 글을 써야 하는 것이 아니라, 쓰는 행위 자체가 우리에게 그 자격을 부여한다. 그래서 이제는 나를 작가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다. 물론 유효기간을 오늘 뿐이지만, 매일매일 작가로 살아있기 위해 나는 꾸준히 연필을 움직일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나는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무언가를 더 갖춰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정작 이미 가지고 있던 ‘쓸 권리’를 충분히 누리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줄리아 캐머런의『나를 위해 쓸 권리』는 잊고 있던 그 권리를 내게 다시 돌려준 책이다. 이제는 잘 쓰려고 망설이기보다 일단 쓰려고 한다. 지금! 당장!

그리고 오늘 글을 썼다면, 오늘의 나는 작가이다.


 #나를위해쓸권리 #줄리아캐머런 #아티스트웨이 #모닝페이지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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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렬한 허기 - 암과 요리의 계절
캐런 바빈 지음, 이주혜 옮김 / 녹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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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12월, 어머니가 항암 치료를 시작한 지 3주째고, 나는 여전히 육식하는 사람을 위해 요리하는 채식주의자로 사는 게 어떤 의미인지 배우는 중이다.'

책 속 문장이지만 놀랍게도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 역시 20년 가까이 채식주의자로 살아왔고, 암 진단을 받은 어머니를 위해 매일 고기를 손질하고 국을 끓이며 식탁을 차린다. 한때 살아 숨 쉬던 존재를 식재료로 마주하는 일은 지금도 내게는 쉽지 않다. 하지만 누군가를 살리고 싶은 마음은 오래 지켜온 신념마저 기꺼이 넘어서게 만든다. 채식주의자인 내가 육식을 요리하며 느꼈던 딜레마와, 독한 항암약을 이겨내기 위해 어떻게든 단백질과 지방을 충분히 드시게 하려고 골몰했던 시간들이 저자의 기록과 너무도 닮아 있어 책장을 넘길 때마다 여러 번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 책은 암에 관한 이야기만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음식에 담긴 가족의 역사와 어린 시절의 기억, 함께 식탁을 둘러앉았던 시간, 부엌을 채우던 온기를 차곡차곡 꺼내 놓는다. 요리는 단순히 배를 채우는 행위가 아니라 마음을 돌보고 기억을 이어가는 방식이었다. 삶과 죽음이라는 거대한 주제조차도 저자의 문장 안에서는 파르메산 치즈 국물처럼 뭉근하게 끓어오른다. 뜨겁게 몰아치지도, 억지로 감동을 만들어내지도 않지만 천천히 스며들어 마음 한편을 따뜻하게 데워 준다.

무엇보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은 희망이나 절망을 강요하지 않는 태도였다. 기적을 약속하지도 슬픔을 덮어버리려 하지 않고, 대신 오늘도 국을 끓이고 재료를 다듬고 함께 밥을 먹는 평범한 하루로 삶을 바라보며 이어가게 만든다. 결국 음식은 헌신이었고, 요리는 사랑이었다. 비록 내게는 저자처럼 이름을 붙일 만한 멋진 르쿠르제 냄비는 없지만 ^^,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불 앞에 서는 마음만큼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의 어머니는 수술 후 보조항암을 마치며 한 계절을 마무리하지만, 나의 어머니는 기약 없는 암과의 싸움을 이어가야 한다. 하지만 음식이 줄 수 있는 위로와, 요리하는 행위 자체가 삶을 버티게 하는 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내가 앞으로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지 조금은 정리가 되었다. 먼 미래를 생각하기 어려운 날에도 오늘의 한 끼를 준비하고, 평범한 하루를 살아내는 일은 여전히 가능하다. 결국 삶은 이렇게 손에 잡히는 하루하루를 소중히 살아내는 데 있는 것 같다.

모든 이야기에는 끝이 있다. 채식주의자인 내가 육식 요리를 하는 이 모순된 일상도 언젠가는 끝날 것이다. 그 끝이 어떤 모습일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예정된 이별의 슬픔을 마음 한편에 품고 있으면서도, 오늘 먹을 한 끼를 정성껏 준비하는 일이야말로 죽음에 가장 조용하고도 단단하게 맞서는 방식이라는 것을 캐런 바빈의 『맹렬한 허기』는 알려주었다.

오늘도 나는 부엌으로 향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허기를 채워주는 일, 그것은 어쩌면 삶을 끝까지 사랑하는 가장 평범하고도 용기 있는 방법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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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렬한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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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과요리의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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