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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 우리의 민주주의가 한계에 도달한 이유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5월
평점 :
이 책은 아르헨티나, 태국, 프랑스 등 다양한 사례를 통해 위기에 처하기도 하고 때로는 이를 넘어 작동하는 민주주의의 역동성을 포착한다. 작년 12월부터 시작된 계엄령과 서부지법 폭동 등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아진 지금 한국사회에 시의적절한 내용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와 ‘충직한 민주주의자’에 대한 비교 서술은 진보·보수를 떠나 한국 정당의 강성 지지층과 팬덤 정치, 계파 갈등을 떠올리게 한다. 2차 세계대전 이전 프랑스, 스페인, 스웨덴 등의 역사에서 오늘날 대한민국을 연상시키는 것은, 시공간적 거리가 가깝지 않음에도 민주주의 운영이 가진 보편성을 보여준다.
몇 가지 의문이 드는 지점들도 있다. 저자들은 정치적 소수가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배경으로 다수의 힘을 제한하는 규칙들(반다수결주의)을 제시한다. 선거인단을 통한 간접적인 방식의 대통령 선출, 강력한 상원의 힘과 거부권, 대법원 판사들의 실질적인 종신제 등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에는 공감한다. 그러나 그것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고 그 외에 다른 것들은 없는가? 6월 3일 대선을 앞두고 한국 정치권 일각에서 주장하는 ‘개헌’ 논의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1987년 정치적 민주화 이후 그럭저럭 돌아가던 헌법이 근래 갑자기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제도적 한계로 볼 것인지 사람들의 문제로 볼 것인지는 논쟁이 필요한 부분이다.
나아가 트럼프와 그 지지층은 ‘극단적 소수’인가? 저자들이 저술할 당시의 낙관적인 전망을 뒤엎고 트럼프는 20년 만에 전국 총투표수에서도 앞서며 재집권했다. 미국 헌법이라는 제도적 한계뿐만 아니라 미국 민주당의 실책 등이 없었다면 이러한 결과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트럼프의 공화당은 상원과 하원에서도 다수당을 차지했다. 만약 이 시점에 필리버스터와 같은 반다수결주의 제도가 없었다면 트럼프의 독주는 더욱 막기 어렵지 않을까. 참고로 한국에서 필리버스터는 2012년 ‘국회선진화법’과 함께 재도입되어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2022년 검수완박(검찰청법·형사소송법 개정안) 반대 등에 사용된 바 있다.
내가 생각하는 ‘소수’란 양당을 제외한 소수다. 미국 정치와 한국 정치는 다양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거대 양당’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미국에서 한때 민주적 사회주의를 주장하며 돌풍을 일으켰던 버니 샌더스는 민주당 대선 후보 경쟁에 참여해야 했다. 한국은 1950년대 중반 ‘평화통일론’을 내세우던 조봉암이 진보당 사건으로 사형에 처해진 후 보수 양당제라는 큰 틀을 유지하고 있다. 중요할 때마다 3당 합당 같은 정치적 사건이 일어나거나 비례 위성정당을 만들어 양당제를 강화시킨다.
요컨대 진정한 정치적 소수는 양당의 울타리 밖에 있는 정치세력이다. 반다수결주의 제도들은 이들의 목소리를 위해서라도, 거대 집권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로 기능하도록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