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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박태원 지음, 이상 그림 / 소전서가 / 2023년 10월
평점 :
일찍 들어오라는 어머니의 말을 들으며 아들은 집을 나선다. 그는 전차를 타고 사람들을 마주치며 다방에 가고 친구를 만나고 공상에 빠지기도 했다가 집으로 돌아간다. 전차를 지하철이나 버스로, 다방을 카페로 바꾸면 2025년 현재의 모습과 크게 다를 게 없다. 지금으로부터 90여 년 전인 1934년 신문에 연재한 소설임을 생각하면 놀랍다.
소설에서 구보 씨는 걷고 또 걷는다. 처음에는 계속 걷는 행위 때문에 그의 이름이 구보인 줄 알았다. 구보驅步는 달리어 감 또는 그런 걸음걸이를 뜻한다. 그의 이름은 구보驅步가 아니라 구보仇甫다. 구仇는 원수, 적, 짝의 의미고 보甫는 크다, 많다는 뜻이다. 둘을 합하면 적이 많다? 구보가 그런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동음이의어 구보를 이용한 언어유희일까? 모르겠다.
구보의 이름 뜻을 알 수 없는 것처럼 이 소설에는 여백과 공백이 많다. 가령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에까지 가서 공부하고 돌아온 지식인 구보 씨가 고정적인 자리는 구하지 않고 책이나 읽고 글이나 쓰며 걸어 다니는 이유가 뭘까. 일제강점기라는 시대 상황을 생각해 보면 독립운동에라도 참여한 걸까. 궁금증을 가지고 책을 끝까지 읽어보았지만 관련한 내용은 찾을 수 없었다. 끝에 가서야 친구와 헤어진 그를 순사가 모멸감을 가지고 훑어보았다는 언급만 있을 뿐이다. 이 순사는 어디서 나온 인물일까, 혹시 그를 감시하고 있던 사람은 아닐까.
어떤 노트에 이르면 소설은 더욱 환상적인 느낌을 준다. 종로경찰서 앞을 지나 하얗고 납작한 조그만 다료(찻집)에서 구보는 벗을 기다린다. 주인 없는 찻집에서 벗을 기다리던 구보의 마음은 갑자기 동경의 가을로 향한다. 그곳에서 구보는 윤리학이라는 석 자와 임姙자가 든 성명이 기입된 노트를 발견한다. 구보가 그 노트의 내용을 읽어보는 동안 다료의 주인이 돌아온다. 이렇게 구보의 의식은 과거의 동경과 현재의 조선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구보가 전차에서 만난 여성도 수수께끼의 인물이다. 구보는 그 여성을 보고 놀라 시선이 마주칠까 겁내며 그녀를 의식한다. 집에 돌아가 어머니에게 ‘그 색시’를 만났다고 하면 어머니가 반색할 것이라는 서술로 추측건대 결혼 상대로 만남을 가졌던 사람인 듯하다. 그녀에게 아는 척을 해야 하나 고민하던 그는 실제로 만난 이후에 꿈에서 그녀를 만난 적은 없다며 진정으로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녀가 전차에서 먼저 내리자 따라서 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다가도 망설이다가 아차, 하고 뉘우치고 만다. 우리는 구보에 대해서도, 구보가 만난 여성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알 수 없다.
구보가 여성의 나이와 외모에 신경 쓰는 그저 그런 남자인 것은 확실하다. 구보는 벗의 누이에게 짝사랑을 느끼면서도 그녀가 자기보다 세 살이나 많다는 것을 의식한다. 그러면서 그 여인을 아내로 삼을 수 없었던 것은 결코 불행이 아니었다며 그러한 여인은 자신에게 행복이 무엇임을 알 기회를 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일종의 정신승리를 한다. 구보는 확실히 어여뻤다고 한 여성에 대해서도 그녀가 오래전부터 남자에게 몸을 허락하여 온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에 이르자, 여자는 결코 현명하지 못하고 생각해 보면 어딘지 모르게 저속한 맛이 있다고 비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