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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작된 시간
사쿠 다쓰키 지음, 이수미 옮김 / 몽실북스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온갖 부정하고 잔혹한 방법으로 큰 부를 이룬 와타나베 쓰네조의 외동딸인 여중생 미카가 유괴된다. 유괴범은 소녀의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1억엔을 요구하고, 그녀를 통해 이 돈을 전달받으려 하나 경찰의 판단 하에 돈은 전달되지 못하고 결국 미카는 살해된 채 발견된다. 1억 엔을
주고 딸을 되찾으려 했던 쓰네조는 경찰에 격분을 하게 되고, 평소 그에게 부정한 후원을 받던 경찰 수뇌부는 그의 분노와 복수를 모면하고자 미카가
몸값을 전달받는 것에 실패하기 전에 이미 죽임을 당했음을 입증하려 한다. 그를 위해 소녀의 사망 추정 시간이 조작되고, 조직을 위해 이 조작은
묵인된 채 넘어간다.
한편 최초로 죽은 미카를 발견하고 도망쳤던 고바야시 쇼지는, 직업도 없이 무위도식하며 사소한 범죄를 저지르던 청년. 그녀가 죽은 줄
모르고 그녀의 가방에서 돈을 훔쳤던 그는, 미카 유괴 및 살인의 혐의로 체포되고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불법 취조를 받게 된다. 그가 미카를 죽인
진범임을 믿는 경찰에 의해 조서는 조작되고 꾸며져 검찰에 기소까지 되고, 그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는 수임료와 자신의 명성에만 관심을 기울인 채
불성실한 변호로 일관한다. 이러한 일련의 부조리하고 부당한 수사와 변호로 진실은 묻히고 어느새 쇼지는 잔인한 살인범이라는 누명을 쓴 채 사형을
선고받게 된다.
이후 재심을 통해 양심적이고 성실한 변호사 가와이가 이 사건을 맡게 되면서 당시의 사건 기록 등에서 보여지는 의문점들이 드러나고, 그만이
쇼고의 무고함을 믿으며 동분서주 그의 무죄를 입증하고자 애쓰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러나 견고하고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오만한 사법부와
검경에 의해, 명백해 보이는 사건의 진실들이 가려지고 무시되는 전개는, 현실의 우리에게 일어났던 약촌오거리 살인사건, 영화 재심 등을 떠올리게
하고, 이 작품이 소설의 허구가 아닌 현실의 무게를 갖고 다가오게 한다.
이 소설에서 진범이 누구인지는 별로 중요치 않다. 어느 정도의 암시로 드러나있기도 하지만, 문제는 범죄 자체보다는, 불합리한 사법 체계의
민낯을 드러내고 현실의 작태를 고발하는 데 있어 보인다. 무고한 한 사람이 다수를 위해(?) 억울하게 희생을 당하게 되는 과정이 무서울치만큼
현실적으로 그려진 데는, 작가가 현직 변호사라는 점도 일조한 듯 하다. (왜 이렇게 레오나르도 다빈치들이 많은 건지...) 작품도 일반
소설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법조계 문서 같아 보일 정도고, 마치 한 편의 사건 법적 기록을 읽은 듯한 느낌이다. 추리적 기법이나 트릭 등이
배제되고, 그렇다고 존 그리샴 류의 법정 소설과도 다른, 한 편의 오늘날 사법부 현실을 해부하는 리포트를 읽은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