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발한 발상, 하늘을 움직이다 요시키 형사 시리즈
시마다 소지 지음, 한희선 엮음 / 시공사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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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하지만 이제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이 사건은 뭔가 하늘의 의지가 움직인 것 같습니다.
32년 전의 그날 밤 하늘이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그것으로 된 게 아닐까요.”

 

<기발한 발상, 하늘을 움직이다> 中, 시마다 소지 作

 

 

 

 고백하자면, 전 일본 미스터리에 한 가지 편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흔히 사회파/신본격으로 나누어지는 일본의 미스터리 유파는 서로의 성향이 뚜렷해 그 선을 넘는 작가는 거의 없고, 각각의 유파는 모두 훌륭한 작품을 집필하는 유수의 작가들을 보유하고 있지만 가히 이 둘 모두를 아우르는 작가는 없으리라고요. 사회파 미스터리는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데 집중해 트릭이나 알리바이 등을 다루는 미스터리 본연의 매력은 다소 떨어지고, 신본격 미스터리는 반대로 트릭에만 치중해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무리가 있는 설정을 남발하는 소설이 많은 것이 아닌가 하는 다소 냉소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을 만난 후 전 제가 너무나도 오만했음을 인정해야만 했습니다. 이 소설만큼은 사회파 미스터리로도, 신본격 미스터리로도 전혀 빠질 것이 없는 작품이었기 때문이죠. 사회적 문제에 대한 고발 의식을 훌륭한 미스터리 안에 담아낸 작품, 시마다 소지의 기발한 발상, 하늘을 움직이다입니다.


 됴코의 한 상점가, 부랑자 노인이 소비세 12엔을 더 내라는 여주인을 칼로 찔러 죽이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다들 정신나간 부랑자가 저지른 우발적 범행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살인 사건을 맡게 된 형사 요시키 다케시는 왠지 사건에 대한 의혹을 거둘 수가 없습니다. 요시키는 이내 노인이 영아 유괴 및 살인으로 오랜 기간 수감되었던 나메카와 이쿠오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노인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아 그것은 누명이며 노인은 사람을 죽일 사람이 아니라고 말해요. 한편 요시키는 노인이 복역 기간 중 썼다는 소설을 입수하고, 그저 환상 소설처럼 보였던 이 네 가지의 단편 소설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 밝혀지며 사건은 알 수 없는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먼저 이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사회파 미스터리로도, 신본격 미스터리로도 전혀 빠지는 것이 없다는 점입니다. 저는 시마다 소지의 전작을 몇 차례 읽어봤음에도 시마다 소지가 원래 사회파 미스터리 작가였나, 하고 다시 찾아봤을 정도였어요. 그 정도로 원래 신본격 미스터리를 쓰는 작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묵직한 사회적 문제를 추리소설 속에 녹여내는 기술이 뛰어납니다.


 게다가 특히 이 소설은 한국 독자들에겐 의미가 남다릅니다. 일본의 사회파 미스터리는 한국 독자로서는 쉽게 공감하기 힘든 문제를 다루는 경우가 종종 있기 마련인데요, 이 소설은 일본 내의 사회적 문제가 아닌 일본과 한국 사이의 뿌리깊은 역사적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마 일본 소설이 한일 양국간의 역사적 문제를 다룬다고 하면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실 분이 계실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시마다 소지는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는 강제 징용이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깊은 이해를 보이며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들이 저지른 만행에 대한 참회와 속죄를 소설 속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여태영과 여태민으로 대표되는 당시의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인해 겪어야만 했던 상상할 수 없는 고행에 대하여 등장인물 요시키의 입을 빌어 사죄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지요. 역사의 피해자로서 한국인이 느끼는 회한을 이해하고 그것에 대해 사죄하려는 작가의 태도에 일견 감동을 받을 정도입니다. 소설이 발표되던 1989년 당시 한일 양국의 교류가 드물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대단한 일이지요. 그래서 어쩌면 이 소설은 일본 본토의 독자들보다 한국 독자들에게 더욱 큰 의미를 가지는 소설이 아닐까 해요.


 또한 이 소설이 미스터리로서도 전혀 빠지는 것이 없다는 점은 미스터리 마니아로서도 매우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점성술 살인사건 등에서 이미 전무후무한 트릭을 만들어낸 시마다 소지는 본격 미스터리 작가로서의 재능이 매우 출중한 작가입니다. 시마다 소지의 작품이니만큼 물론 읽기 전에도 어마어마한 트릭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실제로 읽으며 노인이 쓴 단편소설이 모종의 살인 사건과 관계되었다는 것이 밝혀지는 중반부까지도 트릭에 대해선 거의 짐작도 할 수 없었을 정도입니다. 특히 극중극의 형식으로 묘사된, 수십년 전 사건 당일 밤의 미스터리한 사건들은 도대체 어떤 식으로 연속성을 갖추는 것인지 도저히 알 수 없었어요. 기묘한 차림으로 살해당한 피에로, 선로에 투신해 사망한 신원 불명의 사체, 살아난 목없는 시체와 열차의 기이한 폭발까지….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이 사건들이 일련의 얼개를 갖추고 사건 속에서 짜맞춰질 때 작가의 치밀한 안배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습니다.


 시마다 소지의 작품 중에서, 다른 어떤 작품보다 이 작품이 한국에 가장 먼저 소개되었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합니다. 한국의 미스터리 독자로서 절대 놓칠 수 없는 작품이지요. 만일 이 소설을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사회파 미스터리로서도, 신본격 미스터리로서도 최정점에 서 있는 작품 중 하나를 놓치신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꼭 읽어보시길.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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