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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 ㅣ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2년 3월
평점 :
“무엇이 백이고 무엇이 흑인지는, 실은 아주 애매한 거야.”
<흑백 : 미시마야 변조괴담 1> 中, 미야베 미유키 作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중에 무엇을 가장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세요? 모방범, 화차, 이유 등 많은 소설들의 이름이 쏟아져 나올 것으로 생각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질문에 그녀의 데뷔작이 실린 우리 이웃의 범죄를 가장 먼저 꼽곤 하는데요, 제가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에서 받는 느낌을 가장 잘 표현한 작품들이 실려있는 단편집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미스터리를 쓰건 인간에 대한 따뜻한 관심이 묻어나온다고 해야 할까요, 미야베 미유키는 근본적으로 인간에 대해 다정한 시선을 유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왔었거든요.
그래서 이번 북스피어의 신간 출간 소식을 들었을 때 전 의아한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미야베 미유키가 괴담을? 미야베 미유키 스스로 라이프 워크(필생의 사업)라고 일컬었다는 이 괴담 시리즈가 어떤 식으로 미야베 미유키의 색깔을 담아낼지 잘 상상이 가지 않았거든요. 일반적으로 일본의 괴담이라고 하면 백귀야행이라거나 혹은 최근 유행하는 도시괴담 따위를 생각하기 마련이니까요. 게다가 에도물이라니, 기존에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물을 한번도 읽은 적이 없던 저로선 더욱 신기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 다정합니다. 미야베 미유키스럽습니다. 무엇보다 에도물을 한번도 읽은 적 없던 분도, 미야베 미유키를 처음 접해본 분도 모두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최고의 작품’, 흑백 : 미시마야 변조괴담 1 입니다.
주머니 가게 미시마야의 주인 이헤에와 안주인 오타미는 조카인 오치카를 맡아 데리고 있습니다. 일말의 사정으로 고향에서 에도로 보내진 오치카는 성실하게 일하며 일을 배우는 착실한 처녀지만, 무슨 일인지 얼굴에 때때로 우울한 그늘이 비추는 것은 숨길 수 없는 듯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 내외가 급한 일로 자리를 비운 사이 주인의 손님인 도키치가 바둑을 두기 위해 ‘흑백의 방’에 방문하고, 이헤에를 대신하여 손님을 맞았던 오치카는 예상치 못하게 손님으로부터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각각의 이야기는 괴담으로서의 요소를 충분히 갖추고 있을뿐더러 이야기마다 나름의 시사점을 갖고 있습니다. ‘만주사화’에서는 서로 진정으로 아끼는 사람들이 왜 서로를 상처주고 서로에게 상처받는가에 대하여 생각할 여지를 던져주며, 또한 오치카 자신의 이야기인 사련에서는 인간 사이의 관계와 상처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 본연의 음습한 속성에 대해서 다루고 있어요. 누군가를 돕는다고 생각하면서 마음 속 깊은 속에서는 동정받는 사람을 자신보다 하등한 존재라고 생각하며 그 행위 자체에 대해 우월감과 쾌감을 느끼는 인간의 속성을 말입니다. 결국 끔찍한 비극을 불러온 이 위선적인 감정에 대해 회한의 속죄를 하는 오치카의 모습을 보며 독자들은 자신도 그런 적이 있지 않은가, 자신의 모습을 뒤돌아보게 되지요.
물론 이 소설의 진정한 가치는 각각의 이야기가 담고 있는 테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치카가 손님들을 맞이하며 이야기를 듣고, 또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며 독자들은 이내 이 이야기들이 사실은 괴담이 아닌 ‘치유’에 관한 이야기임을 깨닫습니다. 흑백의 방을 찾은 사람들은 이 작은 아가씨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마음 속 깊은 곳의 상처를 치유하기도 하고, 반대로 이야기를 들으며 오치카가 차마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자신의 상처를 점차 치유받기도 합니다. 소설은 이헤에가 말하듯이 사람들 사이의 이야기는 흑과 백으로 딱 나뉘는 것이 아니라 그 틈새기의 색깔도 있고, 또한 흑과 백도 보는 방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지요. 어떤 것이 흑과 백인지는 아주 애매하고, 누구도 그것을 딱 잘라 판단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그간의 미야베 미유키 소설들이 뚜렷하게 선과 악을 구분하는 편이 아니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흑백에 대해서 논하는 이헤에의 말은 어쩌면 그간 미야베 미유키의 성향에 대한 작가 본인의 변명같기도 하고, 혹은 그것을 납득하지 못했던 독자들에 대한 설득인 것 같기도 합니다만 확실한 것은 이 모든 이야기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참으로 ‘미야베 미유키스럽게’ 다정하고 따뜻하다는 겁니다.
이런 관점은 특히 마지막 장에서 잘 나타납니다. 오타카에 의해 저택으로 초대된 오치카가 저택의 주인어른마저도 그 심연 속에서 구해낼 때, 비어있는 궤짝 속에서 ‘비어있기 때문에’ 사람들을 불러들였던 그 존재를 이해하고 저택 밖으로 이끌어냈을 때 말이지요. 오타카도, 마쓰타로도 불러들여 벗어나지 못하게 붙들고 있는 이 저택을 꺼리고 두려워했다면 오치카 역시 결국 그 저택 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영영 그 속에 매여있었을 겁니다.
미야베 미유키는 에도 시대는 인간의 목숨을 쉽게 뺏을 수 있는 시대였던만큼 인간의 정이 중요했고, 그런 시대에 대한 동경 때문에 에도 시대물을 계속 쓰고 싶다고 말합니다. 괴담이라는 소재를 이용해 이와 같은 이야기를 써 낸 것을 보고, 과연 미야베 미유키의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답니다. 이 소설 꼭 읽어보시길 바래요. 역시 미야베 미유키라는 감탄과 함께 감히 미야베 미유키 최고의 작품이라는 말을 하시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