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조을해 지음 / 북인더갭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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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삶이 시작되는 곳에서는 언제나 물음이 터져 나온다.

어딘가에 대고 피 터져라 묻지 않을 수 없는 기막힌 삶의 한때를 사람들은 불행이라 부른다. (pg 181)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항상 여름에는 소설을 읽고는 했다.

소설보다는 비소설을 더 선호하는 개인 취향 상 문학 작품을 자주 접하지는 않지만,

날이 더워지면 아무래도 머리 아픈 비소설류 보다는 훅 빠져드는 소설이 땡기게 마련인가보다.

그러면서도 입맛이 이쪽이라 그런지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을 지닌 소설류를 특히 좋아한다.

'1984'나 '멋진 신세계' 같은 작품들도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두 여름에 읽었던 기억이 난다.


책 소개를 읽고선 전체주의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디스토피아가 떠올라 읽게 되었다.

다 읽은 느낌을 한 마디로 말하면 '딱 내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소설을 리뷰하는 것은 스토리에 대한 의도치 않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조심하는 편인데,

이 책은 그런 걱정을 조금 덜 해도 되었다.

스토리라인 자체는 매우 심플하기 때문이다.

(아래부터 나오는 푸른 글씨는 모두 원문에서 발췌한 것임을 밝힌다.)

 



소설의 주인공은 '마기'라는 젊은 남성이다.

속국 출신인 어머니가 쓴 글을 소수 언어로 번역하여 출판하려다 힐로 끌려온 인물로 묘사된다.

이 문장 하나로도 이 책의 배경이 되는 공간에는 출판과 언론의 자유가 없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소설은 마기가 '힐'이라는 곳에서 체류하는(혹은 갇혀있는) 며칠간의 기록을 담고 있다.




다 읽고서 느낀 것이지만, 책의 표지가 책 내용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홍색 건물에 입구가 뚫려있고 안은 온통 검은색이다.

하늘은 파랗지만 건물에 가려 거의 보이지 않고, 건물은 분홍색이지만 '기분 좋은' 분홍색은 아니다.

문을 통해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도 안 들지만 그렇다고 밖에 있기도 싫은 그런 공간.  


이 책의 무대이자 마기가 갇혀 있는 '힐'은 딱 이런 곳이다.

겉보기에는 부족함없이 잘 갖추어진 리조트 같은 시설을 자랑하는 곳이지만,

실상은 '제국'으로 표현된 전체주의적 국가의 사상 교육을 실시하는 '수용소' 역할을 한다.


음식과 의복, 건강을 위한 약, 쾌적한 방, 틈만 나면 불편한 곳은 없는지 물어보고 도와주는 직원들까지,

힐에는 모든 것이 갖춰져 있다.

이 곳에 온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은 딱 한 가지이다.

'자신의 생각을 제국 스타일로 고쳐먹는 것.'

​마기는 자신의 신념과 가족의 안녕을 위해 제국에 저항하려하지만, 제국은 강하고 개인은 무력하다.  


몸에는 어떤 폭력의 자국도 없었고 욕지거리도 한번 듣지 않았지만 가방 속에는 모든 게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모욕과 무기력의 무게로 가방이 채워지면 밤은 이미 깊은 후였다. (pg 135) 



힐에는 '간사'라는 직책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제국의 생각을 힐의 거주자(수감자)들에게 주입하는 역할을 한다.

간사와 마기의 대화 중 이 책의 내용을 관통하는 대사가 등장한다.


"마기 씨야말로...마기 씨는 왜 남들과 다른 거죠?" -중략-

"사람들은 다 달라요. 간사님과 에보스 씨만 봐도, 두 분도 달라요. 같아야 인정받는 이 체제가 위험한 겁니다." (pg 99)


인간 뿐 아니라 모든 유기체는 같은 종이라 할지라도 서로 다르다.

그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전체주의적 국가 속에서

개인의 저항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저항하는 개인은 어떤 심정일 수 있는지를 이 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



얼핏 '1984'나 '멋진 신세계' 같은 작품들과 비슷해 보일지 모른다.

전체주의 국가라는 디스토피아적 배경 때문일테지만, '힐'은 '힐'만의 독특함이 있다.


앞의 두 작품이 전체주의 국가를 유지하게 하는 다양한 장치들에 대한 묘사에 충실한 면이 있다면,

이 작품은 그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심리 상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따라서 '제국'의 시스템이 어떻게 완벽한 전체주의 국가를 형성하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묘사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그 속에서 이동의 자유라는 인간의 기본적 자유가 박탈된 채 가축처럼 사육되며

사상 개조를 강요 당하는 인간의 고뇌와 무기력함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개인적으로는 '1984'나 '멋진 신세계' 보다는 일본만화인 '20세기 소년'에 등장하는 '친구랜드' 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책이 작가의 첫 장편이라는 점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개인적으로는 흥미롭게 읽은 소설이다.

다만 서술에 있어서 다소 읽는이에게 친절하지 않은 부분이 있어 맥락을 잠시 놓치거나

등장인물들의 배경 설명이 다소 부족하여 행동의 개연성이 충분치 않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가진 세계관의 매력이 감소되는 것은 아니다.

'힐'이라는 공간 자체가 독창적이면서도 끔찍하게 잘 묘사되어 있고 마기라는 인물의 심경 변화도 상당히 매력적이다. 

(유지태 같은 배우를 주연으로 캐스팅해서 영화화 되어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가철이라 장기간 여행을 가거나 교통체증으로 차 안에 갇혀 있을 때 재미도 있으면서 생각할 거리도 던져주는 책을 찾고 싶다면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나 역시 강원도의 한 리조트에서 이 책을 읽었는데, 저녁에 맥주 한 모금 하면서 '제국'이 현재 국가들의 모습과 얼마나 닮아 있으며,

그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음을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사족이지만, 우연히 책을 접하게 된 일개 독자일 뿐인 나에게 저자가 직접 싸인한 책을 보내주어 기쁜 마음으로 읽었다.

앞으로도 어떤 작품을 보여줄지 개인적으로도 상당히 기대되는 작가를 한 명 알게 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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