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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 종교개혁사 - 종교개혁의 정점, 웨스트민스터 총회 편
황희상 지음 / 흑곰북스 / 2016년 10월
평점 :
고등학교 시절, 필자의 학교엔 수재같은 수학선생님이 계셨다. 소문에 의하면 학창시절
한번도 1등을 놓치지 않고 당당히 S대학교 수학과를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신 교사였다. 이과였던 필자에겐 수학이 중요했다.
하지만 필자는 그분의 수업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선생님은 언제나 자신의 수준(?)에서 가르치고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들-내가 대표적이다-을 순수한 눈망울로 보며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 쉬운 걸 왜 모르니?"
그
때가 미분을 처음 배울 때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 안타깝다. 필자
자신이? 아니다. 그 선생님이 안타깝다. 무엇인가를 가르치기로 되어 있는 자가 가르치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이번에
읽은 <특강 종교개혁사>(이하 '특종이')는 위와 같은 경험을 한 필자에게 그 때를 회상하게 해주었다. 그 시절 그 선생님이 학생을 위해 수업을 했다면 어땠을까 하고. 특종이는
그랬다. 특종이는 나를 위한 책이고, 독자를 위한 책이며, 교회를 위한 책이다.
루터의
저작은 독일문학을 빛나게 했으며 칼빈의 저작들 또한 프랑스산문 분야에서 빛을 발했다. 그렇다. 종교개혁의 대표적인 두 인물은 그 귀한 기독교의 유산을 잘 정리한 아름다운 자신들의 모국어를 통해 쉽게 전달할
줄 알았으며 그렇게 했다.
필자가
처음 신학에 관심을 갖고 '평신도'(이런 단어 쓰면 본서의
저자에게 혼난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쓰겠다.)로서 이런저런
책을 뒤적거리기 시작한 그 때, 필자는 필자가 정말 한글을 못하는 줄 알았다. 같은 문장을 몇 번을 읽어도 주어와 술어가 맞지 않는 경험을 종종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아, 신학이라는
건...어려운 거구나' 싶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일단 내용은
차치하고 한글 문장 자체가 이상했다. 번역서가 소위 ‘번역체’로 쓰인 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번역서가 아닌데 번역체로 쓰인
건 이해하기 어렵다. 특종이는 그렇지 않다. 일단 특종이의
문장은 짧다(물론 말은 짧지 않다). 당연히 한글답다. 그래서 쑥쑥 들어온다. 어려운 단어도 많지 않다. 간혹 나오게 되면 어김없이 설명이 있다. 얼마 전에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이 본서를 읽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럼 증명은 끝난
거다. “특종이는 짧은 한글 문장으로 쉽게 쓰였음.”
특종이가
다루는 주제는 ‘역사’이다.
본 글을 읽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마는 혹시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학창시절 역사를 어떻게 공부했는지, 역사에 대한 인상이 어떤 지 살짝 떠올려보라. 필자는 역사가(수학에 이어..역사도…) 재미없었다. 외울 것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역사가 재미있어서 보고 또 보고
계속 봐서 외워진 게 아니라 처음부터 외우기 시작해서 재미없었다.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데 도대체 왜
알아야 하는지 모르고, 그렇게 필자는 학창시절을 보냈다.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다음과 같은 문구는 누구나 알 것이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다.” 하지만 역사가 정말 대화인지 느끼며 공부했던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싶다. 특종이는
이 부분에서 대화를 건넨다. 지금 내가 서있는 신앙의 자리가 어디인지,
이 자리가 어떤 사람들에 의해 어떻게 생겨났는지 역사 속에서 다룬다. 그리고 현재를 돌아보며
미래를 바라보게 한다. 이게 대화이다. 이게 역사 공부의
참 의미이다. 신기한 건 년도나 인물의 이름을 외워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대충 외워진다는 것. 세번 읽으면 아예 외워질 거 같다(‘라 로셀’이라니…필자가 여기가 어디인지 관심이나 있었던가! 근데 라 로셀이 친근하다.).
세상엔 엄밀하며
고도의 학문성을 요구하는 소수의 책들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책들은 소수를 위한 책이다. 다수의 사람들을 위한, 수많은 성도들에게 1차적인 책은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특종이는 엄밀하지도
않고 학문적이지도 않다는 말이 절대! 아니다. 특종이를 잠시라도
보라. 그 속에 담긴 방대한 자료. 그런 자료를 맛나는 요리로, 때론 가보고 싶은 길로 만들어내는 저자의 능력은 참으로 탐난다(직업적
욕심이다. 어쩔 수 없다. 갖고 싶…다…). 이게 필요하다. 수많은
자료와 이미 편만한 어려운 단어들은 누구나 수집할 수 있고 누구나 소개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수집하고 나열하며 소개하느냐가 관건이다. 솔직히 책을 보면 저자가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한 소위 ‘어려운
단어’나 ‘어려운 내용’들이
보이는 듯하다. 그만큼 독자와 교회를 위해 잘 다듬은 책이라는 말이다.
다른 서평들이
본서의 내용을 다뤘겠거니 싶어서 필자는 그 내용을 전달하는 저자의 도구에 집중했다. 기독교는 진리를
가지고 있다. 즉 전달할 내용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말이다(국정
교과서 만드는데 그렇게 많은 돈을 쏟아부었다는데… 내용이 정해져 있다니 얼마나 행복한 소식인가!). 그래서 참 안전하다. 하지만 안전함에 눌러앉아버린다면 더욱 위험하다. 역설적이지만 그렇다. 고립된 안전함. 우린 다음 세대를 위해 이 진리를 잘 전달할 수 있는 도구들을 개발해야 한다.
고민해야 한다. 그래야 다음 세대도, 교회도
안전함 가운데 머물 수 있지 않은가. 특종이와 같이 진리를 ‘전달’하는데 탁월한 책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정말 간절하다. 그래서 본서를 읽기 바라는 마음도 간절하다. 이제 본 글을 읽는
당신은 결제할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