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플의 종말 - ‘커플’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시대에 대한 통찰
마르셀라 이아쿱 지음, 이정은 옮김 / 책세상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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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결혼한 내 사촌동생 커플은 연애를 시작한지 12년만에 주례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사랑의 결실을 맺었다. 다음 달에 결혼할 친구 커플도 이미 10여년의 시간을 함께 보내며 서로의 곁을 지켜왔다. 결혼식 폐백을 마치고 인사를 하러온 사촌 동생 커플에게-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12년 동안 잘 만나왔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은데 굳이 지금 제도의 힘을 빌리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청첩장을 주고자 자리를 만든 친구 커플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두 커플의 대답은 놀랍도록 유사했는데, 하나는 부모님의 간절한 소원을 이루어드리기 위함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의 질문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것이었다. 왜 결혼을 하지 않는지, 다른 뜻이 있는지, 혹시 헤어진건 아닌지, 사람들은 의심했고 그들은 커플이지만 불완전했다. ‘커플로서의 공식적인 인정, 부모에게든 주변인들에게든 그들은 인정이 필요했다. 10년이 넘는 시간에도 사회는 그들을 믿지 못했고, 제도를 통해서만 비로소 그들의 사랑을 인정해주었다. 그들의 사랑을 완성한 것은 결국 제도였다.


<커플의 종말>은 우리의 사랑을 인정해주고 보호해주는 그 제도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며, 해체의 시도이다. 저자는 법이 우리의 관계에 개입하면서 파괴적인 고독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법에 종속된 관계가 지속되는 한 파괴는 계속될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한 저자의 필사의 노력은 참신하고 전위적인 해석으로 번뜩이기도 하지만, 비약적인 주장과 생소한 개념으로 혼란을 주기도 한다. 아래는 몇 개의 키워드를 통해보는 공감과 혼란의 기록들이다.

 

-나쁜 섹스: 가장 혼란을 주었던 개념. 정략 결혼시대의 나쁜 섹스의 의미는 비교적 명확하다. 좋은 섹스, 즉 결혼 관계 안에서의 자녀 출산을 위한 섹스를 제외한 모든 행위이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 사법적 개입이 좋은 섹스의 위상을 축소시키면서 그리고 성 해방이 자유로운 섹스의 권리를 보장하면서, 나쁜 섹스는 더 이상 나쁘지 않은 보편의 섹스로 변해간다. 그리고 이 나쁜 섹스의 지배가 결국 결혼제도를 파괴한다


이 지점에서 저자의 논지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는데, 나쁜 섹스가 결혼 제도와 좋은 섹스를 파괴하여 나아갔다는 분석이 마치 좋은 섹스가 존재하던 과거의 커플모델을 지향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의 성 박애주의를 비롯한 저자의 궁극적인 주장들을 고려해서 해석하면 나쁜 섹스는 나쁘다는 가치 판단이 작용하는 용어라기 보다는 일처일부제라는 법적 커플제도가 권한을 주고 스스로 무너뜨리는 현대의 섹스 시스템을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어머니 주체: 저자의 분석 중에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여성 남성 임금 격차의 원인을 어머니-자녀 관계가 강렬하게 발현되는 과정으로 바라본다는 점이었다. 친자 관계 원칙과 낙태와 관련된 법의 개입은 어머니와 자녀의 생물학적 관계를 공고히했다. 자녀가 혼인 관계가 아닌 여성의 생물학적 실체에 의해 결정되면서 자녀는 오롯이 어머니의 책임이 된다. 자연스럽게 아버지 자녀 관계는 약화되며 자녀에 대한 본질적 애정이 아닌 사회적 위상으로서의 아버지 역할을 추구하게 된다.


근대의 법제도가 법적 주체로서 어머니를 만들어 냈고 그에 따라 여성의 역할이 가정에 한정되면서 직업 세계에서의 격차가 발생했다는 분석이다. 여성들이 이 격차를 만들어내는 어머니주체에 갇혀있기 때문에 그들이 노력으로 일구어낸 남녀평등의 이상이 변질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어머니 주체를 만들어내는 제도, 커플제도의 변혁 없이는 남녀 평등의 이상 역시 요원하다는 주장으로 귀결된다.

 

-성적 사회민주주의: 저자의 핵심 주장을 담음 개념, 다양한 문제들을 발생시키며 성적으로 구속하고 고독으로 몰아넣는 제도적 커플 관계를 종언하고 성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는 박애주의적 사회 시스템을 의미한다. 저자는 성적 빈곤자들을 구제하고 보편적 성 권리가 구현되는 이상적인 사회를 꿈꾼다. 커플제도에 대한 신랄한 비판들에 이어 불현듯 커져 버린 이상적 세계관의 등장이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사랑의 궁정과 천상 커플이라는 초현실적 아이디어를 차치하고서라도 생각해볼만한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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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적 페다고지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 - 비판적 교수학의 가능서의 언어에 대한 비판적 분석 한국교육연구네트워크 번역 총서 3
조시화 지음, 심성보 옮김 / 살림터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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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적 교수학 비판 :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사회변화를 꿈꾸는 좌파적 혁명 시도-국가권력의 쟁취로 시작되는-는 실패했다. 비판적 교수학은 그 실패를 극복하고 사회변화의 새로운 형식을 찾으려 했지만 또 다시 한계에 부딪혔다-적어도 저자는 그렇게 바라본다. [비판적 페다고지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는 이러한 과정에 대한 분석이자 비판적 교수학이 당면한 문제들을 환기시키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흐릿해진 비판적 교수학의 목적성, 사회의 변화를 주장하며 개인의 변화에 안주하는 낙관주의에 대해 경각심을 일깨우자는 것이다.

저자는 비판적 교수학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배경이 되는 사회적 이론적 흐름을 검토한 후 그렇게 해서 형성된 주류 비판적 교수학의 지배적인 접근을 4개의 대안적 프로젝트 영역으로 구분한다. ‘경험’, ‘다자성과 포함/포용’, ‘반위계적 민주주의’, ‘개인적 자각’, 이상의 영역들은 비판적 교수학의 현재를 아우르며 진보적 교육의 틀에서도 보편적 가치로 받아들여진다. 저자의 비판은 응당 그래야 할 것처럼 보이는 4개의 영역에 대한 논쟁으로 시작되며 이를 바탕으로 구체화된 비판적 교수학을 다시금 비판한다. 비판을 통한 이해이자 이해에 대한 비판이다.

그렇다면 독자 역시 저자의 비판을 비판하는 과정을 통해 그 함의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저자의 분석과 주장에 상당 부분 동의하면서도 문제제기를 하고자하는 시도는 다분히 비판성을 고양하기 위함이다.

의문 1. 개인의 자각화 프로젝트의 한계?

개인의 자각화는 사회의 변화를 담보하지 않는다. 근거는 우선 슬로터다이크의 냉소주의-자각된 허위의식-에서 찾을 수 있다. 비판적 교수학은 개인의 자각을 사회변화의 기본 전제로 받아들이지만, 개인의 자각이 사회 변화로 직결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은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순응하고 적응할 수 있다. 계몽이 아닌 냉소적 접근이다. 그렇다면 비판적 교수학은 개인의 자각이 아닌 자각 너머의 다른 곳-실천, 연대, 집단 행동, 변혁-에 초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현 시대의 맥락을 고려한 의식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 일차적이고 현실적인 문제 해결의 과정일 수 있다. 하지만 저자는 개인의 자각화가 사회 변화에 있어 한계를 가진다는 분석을 개인주의와 연결한다. 서구 개인주의는 비판적 교수학을 개인 정체성 찾기의 과정에 머무르게 하며 개인의 자각은 그것이 이루어진다 하더라고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내기 어렵다는 분석이다. 비판적 교수학의 미시적 접근이 벽에 부딪혔음을 단정하는 것이다. 이 분석은 설득력 있는 논리를 지녔지만 말 그대로 단정적이다. 단정은 더 이상의 가능성을 고려할 수 없게 한다(236p). 비판적 교수학에서 개인에 초점을 둔 미시적 접근은 비판적 교수학의 발전을 막아서는 벽이며 부셔야할 대상일까?

의문2. 대안은 결국 비판이론으로의 회귀인가?

저자가 그에 대해 제시하는 대안은 개인 지향적으로 흘러가는 것을 멈추고 구조 변화적 접근으로 선회해야 한다는 것(146p). 그런데 이것은 새로운 대안이기 보다는 추상적인 거대 담론으로의 회귀로 보이기도 한다. Top down 방식을 통한 사회변화의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 등장한 비판적 교수학을 다시 이전으로 상태도 돌리는 시도일 수 있는 것이다. 개인화 지향으로 인해 추상화 되는 비판적 교수학의 문제를 냉철하고 날카롭게 지적하였지만 ,그 대안마저 추상적이라면 가능성의 언어를 비판의 언어로 되돌리는 수순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의문3. 교육의 정치화는 저자가 추구하는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저자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현재의 비판적 교수학을 비판하며 교육이 강렬하게 정치적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판적 교수학이 추구하는 바를 위한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접근이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현재 교육의 변화를 이끌어내는데 있어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을까? 교육이 정치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공고한 주류 교육 이데올로기가 존재하는 현실에서 단순히 정치적이기를 촉구하는 것은 가능한 것인가? 일견 뚜렷한 목적성을 가진 정치적이라는 슬로건이 현실의 벽을 고려할 때 다시금 흐릿해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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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스 비벤디 -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 유동하는 근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한상석 옮김 / 후마니타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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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를 보았다. pc방 살인 사건의 범인 김성수의 인터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말을 내뱉었다.

 

그때는 화가 나고 억울한 상태여서, 나도 죽고 피해자도 죽여야 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테이블을 치워달라고 했을 뿐인데 피해자인 알바생이 나를 무시했고, 자신의 아버지는 경찰이며 자기를 죽이지 못하면 너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다....치워달라고 했을 뿐인데, 억울했고, 과거의 일이 생각나면서 평생 이렇게 살아야하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같이 죽이고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김성수는 마스크를 쓰지도 고개를 숙이지도 않고 자신의 입장을 카메라 앞에 전했다. 댓글창에는 그의 표정과 말투를 분석하는 글들이 올라왔고, 그가 느꼈다는 그 억울함에 일말의 동정심을 갖게 된 소수와 가당치않은 거짓 변명에 분노하는 다수가 존재했다. 무엇이 진실이건, 우리가 어느 편에 서있던 간에 대중은 그 모습을 적나라하게 지켜보았고, 거기에서 파생된 공포와 불안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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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서의 현대적 공포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들은 불안하다. 과거에 그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아니 여전하다는 점에서 문제의식을 가져야하는지도 모른다- 지금의 사회에는 새로운 공포의 촉매들이 도처에서 끊임없이 나타난다. 그 공포의 양상은 한국사회에 한정하여도 상당히 다양하다. 지금의 우리는 매일의 미세먼지를 체크하며, 제주도에 입국하려고 하는 난민들을 경계한다. 김성수와 같은 사회부적응자가 주변에 있지 않은지 의심해야 하며, 술을 마시다가도 가치관의 차이가 있는 옆 테이블의 불특정 일행과 시비가 붙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또한 시비가 붙더라도 스마트폰 카메라에 찍히지 않도록, 찍히더라도 그것이 유튜브에 올라오지 않도록 유의해야한다. 개인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 적어도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실증적인 증거들이 끊임없이 눈앞에 보여지고 있다. 결국 개인의 신체적 안전에 대한 공포는 개인을 위축되게 만든다. 불안한 우리는 불안정한 요소들과의 접촉을 차단하고 안전한 공간으로 들어서길 바란다.

공포의 새로운 층위가 생기는 것은 이 지점이다. 경계가 만들어진다는 것, 안전한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 안전할 것 같은 학력 수준의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구분, 안전에 필요한 자산을 가진 계층과 불안한 계층이 각자의 의식 속에서 나뉘어진다. 하지만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개인들은 스스로가 그 경계 안에 존재할 것이라는-자신이 만든 경계라 할지라도- 보장을 받기는 어렵다. 심지어 모든 것이 공개되는 네트워크의 사회이기에 우리는 서로의 경계를 재단한다. 개인들은 경계를 만들고 서로의 경계를 염탐하며 그 경계 밖으로 떠밀리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스스로 사로잡힌다. 불안으로 강화된 경계는 이제 스스로를 조이는 옥쇄가 된다. 개인 안전에 대한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생성되는 물리적, 정신적 경계가 그 안의 개인들을 더욱 심층적인 공포 속으로 밀어 넣게 되는 것이다. 도태되지 않아야 하며 패배해서는 안 된다는, 더 나은 삶이 아니라 지금의 자리에서 밀려나지 말아야 한다는 공포다. 이러한 공포에 대한 해결책은 결국 내가 아니라 타인을 경계 밖으로 밀어내는 것 뿐이다. 끊임없는 타자화, 분노의 표출은 이렇게 생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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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사건을 통해 표출되었던 공포는, 결국 김성수법의 발의로 이어졌다. 심신미약자에 대한 감형의무 폐지. 당연한 결과이다. 김성수란 존재는 공포이며 접촉을 차단하고 경계를 지어야할 부류이다. 대중은 그들을 제도적으로도 심정적으로도 타자화 한다. 완전한 격리의 가능성이 줄어들어선 안되며 또한 나와 그런 부류가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로 부터도 벗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대중은 김성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김성수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더한 경계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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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컬의 미래 - 헬레나와의 대화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지음, 최요한 옮김 / 남해의봄날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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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컬의 미래>

끊임 없는 성장을 요구하는 세계화의 물결을 멈추고 로컬에서 시작하자. 로컬의 미래에 담겨진 주장은 명료하기 그지없다. 오래된 미래로부터 고수해온 이 전통적 주장을 저자 헬레나 노르베지 호지 여사는 일순간도 굽힐 생각이 없어 보인다.

오래된 미래의 현재

헬레나가 동경했던 오래된 미래, 라다크는 인도 북부 히말라야 산맥에 자리한 지역으로 주도는 레(Leh) 이며 해발 3000에서 5000미터 사이에 마을들이 산재해있다. 헬레나가 머물렀던 70년대 라다크는 공동체의 삶이 존재하던 곳이었다. 헬레나는 라다크에서 십수년의 시간을 보내며 이 오래된 전통을 가진 공동체가 우리의 미래가 될 수 있으리라 믿었고, 그 오래된 미래가 문명과 조우하며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릴까 우려했다. 라다크는 지금도 겨울에는 전기가 끊겨 발전기에 의지해야하며 그곳으로 가는 도로가 열리는 시기도 6월에서 10월 연중 4달 뿐이다. 메트로시티에 살고 있는 이들의 시선에서는 여전히 오지라고 평할 수 밖에 없는 곳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 시선이 아닌 20년 전 혹은 10여년 전 그곳에 머물렀던 사람의 시선으로 바라본 현재의 레(Leh)는 오래된 미래라기에는 너무도 새로운 현재이며 계속해서 변화하는 미래다. 잘 다듬어진 도로, 3,4층 정도는 쉽게 올려진 건물들, 수많은 영어 간판의 상점들과 식당들이 즐비해진 그곳은 일상에서 맛볼 수 없는 오지의 느낌을 갖고 싶은 여행자들에게 적당한 편의를 제공하며 자신들의 자산인 자연환경을 열심히 판매한다. ‘오래된 미래를 통해 발견했던 마을 공동체의 가능성은 헬레나가 우려했던 대로 문명의 접촉과 함께 관광산업의 메카로 탈바꿈하였다. 헬레나의 에콜로지 센터는 드문드문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 티벳문자로 쓰여진 오래된 미래를 판매하며 조용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헬레나의 예측이 맞았던 것일 수도 있고, 그의 노력이 실패한 것일 수도 있겠다.

신화 vs 신화

한 다큐멘터리에서는 최근 라다크 지역의 시골소년과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화면 속에서는 인도 북부 라다크에서도 어느 산골 마을, 눈과 얼음으로 뒤덥힌 길을 몇몇의 소년 소녀들과 그들의 아버지들 혹은 아버지들이 함께 걷고 있었다-라다크는 1월 평균기온이 10도씨, 최저 50도를 육박하는 추위를 기록하는 지역이다-. 제대로 된 신발도 없이 아이들을 업고 얼음강물을 뚫어가며 몇날 며칠을 걷는 이유는 아이들을 큰 도시()의 학교에 보내기 위함이다. 잘 배워서 더 나은 삶을 살도록 해주기 위해서이다. 오지의 작은 마을에서 벗어나 큰 도시의 학교에서 세계를 배우는 것이 그들에게는 새로운 기회이자 유일한 희망처럼 느껴졌다.

라다크의 산골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세계화는 우리 모두가 동등한 기회를 통해 더 나은 삶을 누릴 가능성을 획득하는 기회로 여겨졌다. 하지만 헬레나는 이를 거짓된 신화로 일축한다-오래된 미래로 여겼던 라다크 사람들마저 그 신화에 빠져있지만-. 세계화의 본질은 경제 세계화이며 그것으로 인해 발생하는 가능성은 사람들이 아닌 기업을 향해 있다는 분석이다. 세계화의 신화는 음흉한 본질을 숨기고 가면을 통해 현혹하는 거짓 신화이다.

그 거짓 신화에 맞서 헬레나가 제안하는 대안은 로컬화, 전체가 아닌 작은 활동의 확산이다. 지역단위 경제를 통한 저항이며, 그 지역화를 위한 전방위적 지원이 우리에게 새로운 미래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헬레나는 그 믿음의 전파 수단으로 지역화의 성공 모델들을 끊임없이 보여주고 증명하는 길을 택했다(92p). ‘로컬의 미래는 각국의 로컬푸드 운동, 로컬 미디어, 지역 금융의 사례들까지, 헬레나가 전파하는 로컬의 가능성은 세계 각지에 자라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한 곳, 우리의 미래가 되리라 생각했던 라다크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로컬화의 아이러니는 여기에 있다. 헬레나가 가능성을 발견했고 오랜시간 머물며 지역화를 유지하고 정착시키기 위해 가장 노력했던 그 지역이 지금 세계화의 물결에서 격변하는 지역이 되고 있다는 것. 세계화가 거짓을 감추는 신화라면, 로컬화는 실제로 일어날 수 없는 신화가 아닌가라는 불가피한 의구심이 드는 것은 현재의 라다크 오래된 미래에서 기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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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왜 불안한가 - 하드 코어 로맨스와 에로티시즘의 사회학
에바 일루즈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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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왜 불안한가: 하드코어 로맨스와 에로티즘의 사회학-에바 일루즈>

 

-베스트셀러의 사회학

다수의 대중문화 분석 텍스트들은 특정 매체의 성공이 사회상 혹은 현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집단심리의 반영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시작한다. 예컨대 극한직업의 예상치 못한 흥행이 무겁고 진지한 분위기에 지친 한국 사람들의 욕구를 건드렸다던가 하는 분석들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분석에 필요 이상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공감하기 어려웠다-특히나 별다른 생각 없이 오늘의 시간 때우기로 감상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 영화와 같은 매체에서는-. 다만 마케팅적 요소, 마케팅 이외의 외부 작용, 불규칙적인 입소문 등 다양하고 불측적이며,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흐릿하게 드러나는 흥행 요인들 속에서 무언가 의미를 발견하고자 하는 인문학적인 시도 역시 그것의 정합성을 떠나 필요한, 혹은 할 수 밖에 없는 작업이라는 것에는 동의했다. 대중문화 분석이라는 학문적 영역 안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 시대의 반영일까? 실은 그저 흥행이라는 결과의 시대의 분위기를 연결한 결과론적 해석인 것은 아닌가?

<사랑은 왜 불안한가> 1장의 베스트 셀러 분석과정에 대한 설명은 이렇듯 약간은 회의적인 입장에 있는 나와 같은 이들에게 생각의 전환을 유도하는 안내서가 되어준다. 다시 말해 에바 일루즈의 설명이 나에게 매체를 통한 사회 분석(혹은 사회를 반영한 매체분석)의 과정이 비단 결과론적인 해석만은 아님을 납득하게 해주었다는 의미이다. 영화와 음악보다도 더 개인 내적인 감상의 과정을 겪는 책이라는 장르에서 더욱 그렇다.

책의 내용을 다시 언급할 필요 없이 1장의 분석과정은 정밀하다. 한권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어가는 국면을 각각의 시장원리로(27p) 분석하고 그 틀에 따라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에 작용한 사회 요인을 밝힌다. ‘남성과 여성의 성관계를 특징짓는 문제들을 드러냈고, 사도마조히즘을 그 해결책으로서 제시했다. 결국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고전적 주제와 이야기 구조를 현대의 사회 모순에 접목하여 세련되게 표현한 성생활 자기계발서로서 성공했다는 분석이다. 이와 같은 엄밀한 분석의 토대에서 이제 에바 일루즈는 그렇다면 그 성공이 보여주는 우리 시대, 그 중에서도 남녀 관계에 투영된 사회적 욕구가 무엇인지를 밝힌다.

-승리게이트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서구권의 반향이 국내에까지 크게 전파되지는 않았다. 모 신문기사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아직 BDSM이라는 가학적 소재가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웠을 것이라 하는데 정확한 분석인지는 모르겠다. 오히려 다른 자극적인 것들이 많아서 트와일라잇 동인지 느낌의 상업소설에 까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분석이 더 적합할 수도 있다. 최근 한국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과 그것에 대한 다양한 관심의 표출 지향을 살펴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실제로 에바 일루즈의 분석틀은 베스트셀러를 한국의 가십으로 바꿨을 때 어느 정도 통용이 되는 듯 하니까 말이다. 승리 게이트는 사소한(?) 신체적 다툼에서 시작되어, 경찰 유착, 불법 마약 유통, 탈루와 거물급 인사(총경 혹은 그 너머)와의 유착 관계까지 퍼져나가다, 이제는 연예인들의 문란한 성생활과 몰카라는 지점에 멈춰 서 있다. 이 사안이 그 어떤 정치적 문제들보다 섹스스캔들로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은 대중들의 전폭적인 관심 덕분으로 보인다. 남성들은 겉으론 그들을 비난하는 태도를 취하면서도 자신들의 성적 상상을 충족시킨다. 정준영이 누구와 얼마나 잤는가의 문제와 그에 대한 열광은 소비문화로서의 섹스, 인정 수단으로서의 섹스가 남성의 가치를 드러내는 기준임을 암시한다. 그레이의 BDSM에 대한 열망이 물뽕과 연예인의 섹스라는 소재로 치환 됐을 뿐이다. 단순히 한 연예인의 문란한 성생활이었다면 아마도 남성들의 욕구를 자극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자율적 주체-남성들의 판타지이던 연예인들-라고 생각하던 이들이 정복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 주는 쾌감이 남성들로 하여금 그 가쉽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에바 일루즈의 분석대로 자유와 소비문화 속에서 해방된 섹스가 특히나 지배적이었던 남성들에게 더욱 더 인정 투쟁을 이끄는 하나의 도구로 자리 잡았음을 현재 한국 남성들의 관심 지형을 따라가면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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