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의 풍경들 - 고종석의 우리말 강좌
고종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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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저서 <국어의 풍경들>은 한국어의 역사, 어휘, 문법, 그리고 언어와 사회의 관계를 언어학적 지식과 인문학적 성찰을 바탕으로 서술한 책이다. 


한국어의 기원과 역사 측면에서 저자는 한국어가 알타이어족에 속한다는 전통적 통설을 경계하며, 언어학적 관점에서 한국어의 계통과 삼국시대(고구려어, 백제어, 신라어) 언어의 흔적을 추적한다. 


또한 한국어의 어휘와 문장의 풍경을 저자 특유의 감상으로 풀어가는데, '한옥집', '역전 앞'과 같은 동의첩어에 대해 무조건적인 오류로 지적하기보다, 우리말의 독특한 표현법과 언어적 생명력을 읽어내야 한다는 견해를 보인다. 


나아가 남북한의 이념 차이가 언어에 미친 영향, 표준어 정책의 이데올로기적 측면, 그리고 외래어와 순화어 사이의 갈등을 사회언어학적 시각에서도 언급한다. 


전반적으로 딱딱하고 건조할 수 있는 언어학적 지식을 '풍경'이라는 은유를 통해 부드럽고 미학적인 문장으로 풀어내고 있다.


저자는 특히 맞춤법이나 표준어 규정에 얽매여 언어의 자연스러운 변화를 억압하는 태도를 비판하며, 언어의 본질적인 소통 기능과 생명력을 강조하는 탈규범적이고 탈권위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단순한 국어학적 사실 나열에 그치지 않고, 언어 이면에 숨겨진 역사, 사회, 정치적 맥락을 함께 비평하여 글의 재미와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이 책 <국어의 풍경들>은 한국어를 맹목적인 애정의 대상이 아닌, 성찰과 비판의 대상으로 올려놓았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하겠다


저자는 우리말을 가두어 두려는 순혈주의적 태도를 허물고, 다른 언어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는 '열린 한국어'의 미래를 제안한다.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면서도 언어에 깃든 사회적 편견을 돌아보게 만드는 한국어 비평의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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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관중의 <삼국지>를 읽지 않은 사람과는 대화를 하지 말고, 세 번 이상 읽은 사람과는 상종하지 말라!" 는 유명한 말이 있다. 

그에 빗대어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 20권을 모두 읽은 사람과는 상종하지 말라."는 세간의 말도 있다. 

박경리의 <토지>만큼 그 알맹이에 비하여 과대평가된 책도 드물 것이다. 
어느 "독후감 소매상" 같은 정치인 작가의 추천으로 이 책의 허명(虛名)이 더 높아진 탓도 있지만, 이 책은 문학적 작품성 면에서나, 구성의 완결성 면에서나 비판점이 많은 책이다. 

판본을 거듭하며 변형된 줄거리도 그렇고, 3대에 걸친 시공간적 확장으로 서사의 초점이 무너질대로 무너져 일반 독자가 완독하기에 너무 장황하고 문체도 산만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비평이다. 
(당신 같으면 어느 부잣집의 흥망성쇠 스토리를 수 개월을 바쳐가며 읽어낼 자신이 있는가?) 

<토지> 20권을 통독하는 독자가 있다면 다음 두 부류 중 하나일 것이다. 
무지한 문학 지망생이거나, 오만한 지적 허영가이거나. 

둘 중 어느 쪽이든 상종할 인물은 못 된다. 

(PS: 대부분의 고등학교 수학 문제집의 앞 몇 장만 까맣게 손때가 묻는 것처럼, 박경리의 <토지>도 1권 판매량이 전체 판매량의 99%라고 한다. 차라리 하이라이트 요약본 줄거리만 일별하는 게 실질적으로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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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를 위한 주식투자 - 광수네 복덕방, 모두의 투자 이야기
이광수 지음 / 21세기북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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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의 <진보를 위한 주식투자>는 시장 경제의 자율성과 합리적 투자라는 본질의 차원에서 비추어볼 때, 상당히 '이단적'인 책이다. 주식 투자라는 인간의 자연적 욕망과 합리성에 기반한 경제 행위를 목적론적인 연대행위의 수단으로 재구성하는 데서 오는 논리적 오류와 억지스러움이 결과적으로 이 책의 문제점과 한계로 연결된다. 


이 책이 범하고 있는 오류란 대체로 다음과 같다. 


1. 투자와 정치적 목적론의 부자유스런 결합 (정치화의 오류)

투자의 본질은 '수익 극대화'와 '리스크 관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진보'나 '사회 정의' 같은 정치적 가치를 덧씌우는 것이 위험한 발상으로 우선 대두된다. 자본시장은 효율적인 자원 배분을 목적으로 하는데, 이를 특정 진영의 세력 확장이나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려 한다는 점이 이미 지나친 선동적 서술인 것이다.


2. 기업 경영에 대한 과도한 간섭

'주주 행동주의'를 진보적 가치와 연결해 강조하는 점을 두고, 기업의 경영 판단에 정치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기업의 자율적 경영 효율성을 저해하는 요소이다. 특히 지배구조 개선이라는 명목하에 기업을 압박하는 행위가 자유시장 경제의 원리보다는 대중의 감정적 호응을 얻기 위한 '포퓰리즘적 접근'으로 비춰진다.


3. 시장 논리가 아닌 '선과 악'의 프레임

주식 시장의 등락을 단순한 수급과 경제 지표의 결과가 아닌, 특정 기득권의 농단이나 불합리한 구조 탓으로 돌리는 논리가 다분히 작위적이고 선동적이라 할 것이다. "우리(개미/진보)가 뭉쳐서 시장을 바꿔야 한다"는 식의 서사는 투자자들에게 냉철한 분석 대신 감정적인 적대감을 심어주는 면이 있다. 동학개미니 서학개미니 하는 말처럼 이젠 개인 투자자들도 주식 시장의 수급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는 시대임을 저자는 간과하고 있다. 


4. 개인 투자자의 위험 방치

정치적 목적을 위해 개인 투자자들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할 경우, 시장 상황이 급변할 때 그 피해는 고스란히 개인이 떠안게 된다. 이는 현행법상 '정치적 영향력을 얻기 위해 개인의 자산을 담보로 도박을 거는 행위'로 판정될 수도 있는데, 이는 타인의 투자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끄는 새로운 방식의 '주식 리딩방'에 해당하는 투자 유도 행위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비판은 경제적 의사결정에 이념이 개입되는 순간 시장의 왜곡이 발생하며, 이는 결국 투자 생태계 전체의 비효율과 경쟁력 저하는 물론, 예기치 않은 선량한 개인투자자들의 손실을 초래한다는 우려에 기반하고 있다. 


문재인 정권 시절, 정치적 목적으로 조성되었던 소위 '장하성 펀드'가 시장에 어떠한 왜곡과 오류를 범했는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주식 리딩방의 바람잡이 주인은 믿고 따른 개인투자자들의 손실에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다는 점도 독자들은 명심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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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로부터의 우주
로렌스 크라우스 지음, 박병철 옮김 / 승산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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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론자의 영원한 물음, '우주가 어떻게 무로부터 탄생할 수 있었는가' 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적절한 조건이 갖춰지면 무는 유로 변환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무(無)라는 것은 태생적으로 불안정하다. 그러므로 ‘우주는 왜 텅 비어 있지 않고 무언가가 존재하게 되었는가?’라는 오래된 질문의 답은 다음과 같다. ‘무는 그 자체로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프랭크 윌첵 


양자 중력은 무(시공간조차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무)에서 창조된 우주를 허용할 뿐만 아니라, 그런 우주를 필연적으로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결국 無에서 생성된 양자요동(quantum fluctuation) 덕분이다. 


1970년대에 과학자들은 초고온, 초고밀도의 빅뱅에서 물질과 반물질의 양이 같을 수도 있으며, 우주 초기에 물질이 반물질보다 아주 조금만 많아도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양자적 과정에 의해 지금과 같은 우주가 만들어질 수 있음을 깨달았다. … 우주 초기에 반물질이 물질과 결합하여 모두 자라진 후에도 물질의 초과분이 아주 조금 남아서(이들은 함께 사라질 반물질을 찾지 못했다) 지금 우리의 눈에 보이는 별과 은하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미래의 우주는 또다시 무(無)로 되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멀고 먼 미래에 양성자와 중성자가 붕괴되어 사라지면 물질도 사라지고, 우주에는 가장 단순한 구조에 가장 단순한 대칭만 남을 것이다. 


결국 과학도 또 다른 형태의 믿음이 아닐까? 하는 질문에 저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과학이 위대한 이유는 그 믿음이 언제든지 깨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이 다른 답을 제시한다면,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믿음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 


무로부터의 입자가 유(有)가 되는 건 상상 이상의 방식일 수도 있다. 

그러나 더욱 근원에 깔려있는 우주라는 존재는 "의식"과 공존하는 우주다.

‘벽에도 귀가 있다’는 소박한 믿음도 있지만, 물에도 감정이 있다는 실험결과(육각수)를 보면 사물과 의식의 공감대가 있음을 느끼게 된다.

바위에도 의식이 있다는 켄윌버의 말을 믿을 수 있다면 생물체가 탄생하기 이전 소립자 무기물과 양자진동 에너지만 난무하고 있던 초기 우주에서도 의식은 온 사방에 깔려있었을 것이다. 


결국 무와 유는 상호 수렴하면서 진동하는 대칭 연기 관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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