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 난 세계의 신과 내일 비가 올 확률
경민선 지음 / 안온북스 / 202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처음 이 책을 알게 되었을 때 가장 눈에 들어왔던 건 ‘도박’이라는 소재였다.

쓰레기 매립지가 있는 정평읍. 이곳은 쓰레기 매립지를 받아들이는 대신 카지노를 얻게 된 곳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른들의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살아가는 세 친구, 리아·상돈·다은이 있다.

주인공 리아는 쓰레기 더미에서 우연히 마이닝 머신을 발견한다. 이 기계는 주변의 데이터를 수집해 도박에서 이길 확률을 알려준다.

그런데 이 확률이 조금 이상하다.

단순히 주사위를 던졌을 때 1이 나올 확률이 몇 퍼센트라는 식이 아니라, 습도나 시간처럼 사소한 환경의 변화와 주사위의 결과 사이에서 일정한 규칙을 찾아낸다.



이 설정이 꽤 흥미로웠다.

만약 내가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확률을 알고 있다면, 그걸 이용해서 돈을 버는 것은 정당한 일일까?

한편으로는 카지노에서 상대방의 패를 훔쳐보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부정행위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리아가 카지노의 규칙을 조작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세계에 존재하고 있던 법칙을 먼저 발견했을 뿐이라고 볼 수도 있다.

더구나 리아가 살아가는 세계 자체가 결코 공평하지 않다.

보호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쓰레기 매립지에서 살아가고, 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기본적인 생활조차 보장받기 어려운 곳.

그런 세계에서 리아가 자신이 발견한 규칙을 이용해 살아남는 것을 단순히 옳고 그름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이 소설에서 도박은 단순히 돈을 따고 잃는 게임이 아니라, 불공평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떤 규칙을 이용할 것인가라는 질문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의외로 계속 신경 쓰였던 인물이 있다.

바로 카지노의 주인 정소열이다.

정소열은 자신이 만든 카지노가 리아 때문에 무너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리아의 모습을 보며 신의 존재를 확인하려 한다.

처음에는 이게 굉장히 이상하게 느껴졌다.

자신의 카지노가 없어질 수도 있는데 왜 저렇게까지 리아에게 집착할까?

그런데 정소열이 신을 믿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보니 조금 다르게 보였다.

정소열은 신을 믿지 못해서 근거를 찾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믿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믿음이 옳다는 근거를 찾고 싶은 사람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정소열이 믿는 ‘신’을 조금 더 넓은 의미의 ‘신념’으로 해석해보기도 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믿고 살아가는 것이 정말 옳은지 확인하고 싶을 때가 있다.

내가 선택한 길이 맞는지, 지금까지의 삶이 틀리지 않았는지, 내가 믿어온 가치가 정말 의미 있는 것인지.

정소열이 리아에게서 찾으려 했던 것도 단순히 신의 존재를 증명할 증거가 아니라, 어쩌면 자신이 지금까지 믿어온 삶을 계속 믿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였던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정소열과 리아가 묘하게 닮아 보인다.

정소열은 신을 믿지만 그 믿음의 근거를 찾고, 리아는 마이닝 머신이 보여주는 확률을 믿지만 그 확률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결국 두 사람 모두 알 수 없는 세계에서 무언가를 믿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제목에 등장하는 ‘신’과 ‘확률’도 생각보다 멀리 떨어져 있는 개념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알 수 없는 일을 마주했을 때 그것을 운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확률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때로는 신의 뜻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은 정말 객관적인 진실일까?

아니면 내가 살아온 삶과 경험에 따라 같은 현상을 다르게 해석하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은 리아의 마지막 선택까지 이어진다.

소설은 마지막 순간에 리아가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 무엇을 믿고 있었는지를 명확하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책을 덮고 나서 오히려 그 부분을 계속 생각하게 됐다.

리아는 정말 결과를 알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알 수 없었지만 믿었던 걸까.

그리고 만약 후자라면, 결국 리아 역시 정소열과 마찬가지로 확인할 수 없는 무언가를 믿고 선택한 것은 아닐까.


처음에는 ‘도박으로 돈을 버는 아이’라는 설정이 재미있어서 읽기 시작했지만, 다 읽고 나니 이 책에서 가장 오래 남은 것은 도박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난과 사회적 보호의 부재, 신앙과 신념, 운명과 확률, 그리고 인간은 무엇을 믿으며 살아가는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특히 좋았던 것은 작가가 모든 답을 알려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이닝 머신은 정말 무엇이었는지, 확률과 운명의 경계는 어디인지, 신은 존재하는지.

그리고 그 답을 생각하는 과정에서 결국 질문이 책 속 인물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온다.

나는 무엇을 믿으며 살아가고 있을까?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정말 옳다는 근거를 나는 가지고 있을까.

혹은 확실한 근거가 없더라도, 결국 무언가를 믿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도박이라는 독특한 소재에서 시작해 생각보다 훨씬 넓은 질문을 던졌던 소설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