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비 나린다
김단비 지음 / 달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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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로맨스보다는 스릴러나 무거운 고전 쪽을 즐겨 읽던 나에게 <여우비 나린다>는 조금 낯선 결의 책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첫 페이지부터 그 낯섦이 오히려 기분 좋은 설렘으로 바뀌었다. 눈발이 소리까지 삼켜버린 듯 새하얗던 도입부의 풍경 묘사를 읽으면서, 마치 나도 그 겨울 산자락 어딘가에 함께 서 있는 듯한 몰입감을 느꼈다. 화려한 사건보다 인물의 정서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문장들이라, 읽는 내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으면서도 동시에 잔잔하게 두근거렸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의붓남매라는 설정이 주는 애틋함이었다. 핏줄로 엮이지 않았지만 서로의 결핍을 가장 먼저 알아봐 주고, 가장 가까운 곳에서 묵묵히 지켜주는 두 사람의 관계가 흔히 생각하는 사극 로맨스의 절절함과는 조금 다른 결로 다가왔다. 뜨거운 애정이라기보다는, 오랜 시간 서로에게 천천히 스며든 존재감 같은 느낌이랄까. 오라버니가 "여우야" 하고 부르는 그 짧은 한마디에도 약간의 오글거림(?)과 애틋한 느낌이 있어서, 나도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몽글몽글해졌다.




읽으면서 또 하나 다가온 지점은, 무당이라는 신분을 대하는 이중적인 태도였다. 평소에는 천한 팔반사천이라 손가락질하며 거리를 두면서도, 정작 집안에 우환이 생기거나 답이 보이지 않는 일이 닥치면 은밀히 사람을 보내 부탁하는 모습. 이조판서 댁이든 좌랑 나리 댁이든,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여우를 찾아와 매달리는 장면들을 보며 참 인간이라는 게 이렇게나 모순적이구나 싶었다. 필요할 때만 손을 내밀고, 아쉬운 게 없어지면 다시 없는 사람 취급하는 그 태도가 낯설지 않아서 더 씁쓸했달까. 그런 시선 속에서도 담담히 제 할 일을 해내는 여우의 모습이 있어서, 이 인물이 더 짠하고 단단하게 느껴졌다.



조선이라는 시대적 배경, 무가(巫家)라는 낯선 소재를 다루면서도 전혀 이질감 없이 술술 읽혔다는 점도 좋았다. 오히려 신비로운 분위기 덕분에 책장을 덮을 때까지 긴장감과 애틋함이 동시에 유지되었다. 오랜만에 조선시대 로맨스 소설을 읽으며, 화려한 사건이 아니라도 인물들의 감정선만으로 충분히 마음을 붙잡을 수 있다는 걸 새삼 느낀 시간이었다. 신분 사회가 존재하는 시대에서의 로맨스 소설이라 그런지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 책이었다. 로맨스를 즐겨 읽지 않는 사람이라도, 이 감성만큼은 한 번쯤 젖어봐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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