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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urblue > 크리스토프 바타이유 인터뷰

새로운 문학이 시작되고 있다. 영상문화에 떠밀려, 아주 작은 골방으로 들어온 문학. 그러나 그 문학은 초라해 보인다기보다는 겸손해 보인다. 그 겸손은, 세계사적 전통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파악한 자가, 즉각적인 세계의 참조 사항이, 즉 존재의 당대적 외적 가치부여 방식이 더이상 밑돈을 대주지 않는 자리에서, 존재의 조건 자체로부터 자신의 존재론적 의미를 길어올린다는 의미에서, 동시에 대단한 오만이기도 하다. 이 문학은, 세계에 대고 정당성을 인준해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아주 고요하지만, 그러나 더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는 의미에서 격렬하다. 그 문학은 20세기를 건너뛰어 격세유전적 근원에게로 나선형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문학을 예고하는 한 젊은 작가가 우리 곁을 찾아왔다. 아직은, 속단일지 모르지만, 이 작가는 미국식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유력한 대안으로 보이는 프랑스적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수가 될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대담자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우리의 성정은 미국사람들보다는 이들에게 더 가깝다. 그를 찬찬히 읽는다는 것은, 자본의 음모에 휘말려 헐떡이고 있는 세기말의 한국인에게 문학적 의미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참고 삼아서 말한다면, 거대 담론들에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젊은 작가에게 일반적인 얘기를 묻는다는 게 의미 없다고 느껴졌으므로, 그의 작품, 특히 최근작 『시간의 지배자』를 중심으로 대담을 진행시켰다. 좋은 작가는 무엇보다 작품으로 충분히 말하는 사람이니까. 따라서 작품을 미리 읽고 이 대담을 읽는 것이 훨씬 더 이 작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말을 덧붙여둔다.

김정란 우선 바보 같은 질문부터 던져보기로 하죠. 왜 경영학을 그만두셨어요? HEC를 나오셨는데, HEC라면 프랑스에서 최고 수재들이 진학하는 학교 아닌가요? 빛나는 장래가 보장되어 있었을 텐데…….

바타이유 경영학을 택한 건 실수였어요. 리세(중고등학교 통합과정) 다닐 때 공부를 잘했어요.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대개 택하는 진로 중 하나를 택했던 것뿐이죠. 왜 경영학을 공부해야 하나 하고 자신에게 질문도 던져보지 않고 열여덟 살에 경영학 에콜에 입학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자, 내가 정말 마음 깊이 하고 싶어하는 건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경영학을 선택할 당시의 제 모습은 많은 프랑스 학생들의 이미지와 같아요. 어떤 일이 생길지 생각도 해보지 않고, 무슨 수단을 쓰든 직업을 얻으려고 하는 젊은이들의 이미지 말입니다.

김정란 아주 훌륭한 학생이었을 거예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아주 훌륭한 작가가 되었고.

바타이유 , 그건 잘 모르겠어요. (웃음)

김정란 아니오, 진심으로 드리는 말이에요. 바타이유 씨의 처녀작을 읽고 전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스물두 살짜리가 이런 작품을 쓸 수 있을까, 하고 말이죠. 삶의 어떤 면모를 정확히 파악하고 쓴 작품이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마치 나이가 지긋한 아주 지혜로운 사람이 쓴 글 같았거든요. 젊은이답게 감각이 날카로우면서도, 완벽한 자기 통제력 같은 게 느껴졌거든요. 이번 작품 『시간의 지배자』도 마찬가지였구요.

바타이유 그건 아마도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노인을 나레이터로 설정했기 때문에 오는 효과일지도 몰라요. 생의 경험이 없이 글을 쓴다는 것이 당연히 두렵게 느껴졌거든요. 그래서 늙은 대사를 나레이터로 선택한 거죠. 그는 자신이 잘못 살았다고, 권력과 돈을 찾아다니며 삶을 탕진했다고, 이제 내 삶은 공허 속으로 추락할 거라는 회한에 시달립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글쓰기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죠. 왜냐하면, 이 남자가 글쓰기를 통해서 구원과 부활을 꿈꾼다는 게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작품 첫머리에서 그가 여인들의 속옷과 치마들이 던져져 있는 강가를 배회하는 거예요. 썩어갈 우리의 육체를 감싸는 이 옷감들로 이제 종이가 만들어질 테니까요. 그 종이들, 책장들을 가지고 그는 자신을 구원할 거예요.

김정란, 무거운 주제군요. 글쓰기와 구원의 주제.

바타이유 그렇습니다. 하지만 전 이 작품에서 특히 죽음에 대해 썼어요.

김정란 첫번째 작품 『다다를 수 없는 나라』에서도 죽음의 주제가 나왔잖아요? 죽음이 앞뒤로 맞물려 있었죠.

바타이유 조금 달라요. 『다다를 수 없는 나라』에서 다룬 주제는 사라짐과 버림받음이죠. 예를 들면, 일곱 살에 프랑스에 온 어린 왕자 칸은 완전히 홀로 버림받고 병들어서 혼자 죽어요. 끔찍한 일이죠.

김정란 바타이유 씨에겐 그게 삶의 근본적인 조건인가요?

바타이유 그렇습니다. 전 파스칼 식으로 교육받았습니다.

김정란, 그래요. 바로 그 점 때문에 제가 바타이유 씨 작품을 특히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시간의 지배자』 끝부분에 나오는, 세 번의 비명 있잖아요? 그 장면이 특히 그랬어요. 인간의 근원적인 비참을 알리는 비명. 마르그리트 뒤라스 작품 안에도 그 비명이 나오죠. 뒤라스도 아주 파스칼적인 작가잖아요? 저 역시 마음속 깊이 파스칼적인 인간이거든요.

바타이유 가톨릭 리세를 십이 년간 다녔습니다. 프랑스에선 드문 일이죠. 사제들에게서 교육받았다는 것이 제 문학의 모든 특성, 특히 문학을 통한 구원이라는 주제를 설명하기 위해선 상당히 중요한 점인 것 같아요. 신을 믿건, 그렇지 않건 상관없이 제 주인공들은 인간의 비참이라는 문제 앞에 홀로 대면하거든요.

김정란 『시간의 지배자』를 번역하기 전에, 일간지에 난 기사들을 대충 훑어보았습니다. 인터뷰에서 밝히신 바에 따르면, 베트남 여행이 글을 쓰게 된 직접적인 동기라구요. 왜 하필 베트남인가요?

바타이유 유럽을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었기 때문일 거예요. 대학에서 경영자 수련과정으로 외국 트레이닝 코스가 있었거든요. 처음엔 스위스엘 갈까, 아니면 영국엘 갈까 하고 망설였죠. 그러다가 베트남을 택하게 되었는데, 스무 살짜리 젊은이들이 잘 그러듯이 어떤 도전의식 때문이었을 겁니다. 내가 잘 모르는 이국적인 나라를 택하자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오 개월 과정으로 베트남으로 떠났는데, 그곳에서 겪었던 고독이 내 정신에 깊이 각인되어버렸어요.

지독한 더위였어요. 그리고 말도 못하게 끈적거리구요. 식물들은 무시무시하게 울창하고요. 많이 힘들었죠. 왜냐하면 집에서 떠날 때만 해도 전화를 하거나 팩스를 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돈이 별로 없었거든요. 그런데 전화 비용은 엄청나게 비싸구요. 그 누구하고도 이야길 나눌 수 없었던 거죠. 프랑스에 돌아온 뒤에, 그 고독의 경험을 글로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20세기 말에 혼자가 된다, 자, 그럼 3세기 전 어느 날인가 자신의 삶을 구원하기 위해서 베트남으로 떠났던 그 선교사들은 어떤 걸 느꼈을까. 난 그렇게 해서 태어난 내 첫번째 소설 『다다를 수 없는 나라』가 일종의 기도였다고 생각해요. 100페이지 정도 되는 짧은 책인데, 포교를 포기하고 수도사들에게 금지되어 있는 사랑을 하고 죽어가는 수녀와 수사의 이야기죠. 스무 살짜리가 그런 이야기를 쓸 수 있다고 생각한 건, 엉뚱한 생각이었죠. 그렇지만, 중요한 건 내가 버림받음과 침묵에 대해 쓰고 싶어했다는 사실이었다고 생각해요.

김정란 그러나 역사가 있잖아요? 대문자로 씌어지는 역사일지는 몰라도. 한 명의 아시아 여자로 난 이 선택에 관심이 많거든요. 작가는 왜 하필 식민주의에 의해 고통당한 나라를 선택했을까? 그 고독은 바타이유 씨에겐 개인적인 고독이지만, 제겐 베트남의 고독으로 느껴져요. 특히 고통스러워하는 나라의 고독으로요.

바타이유 제가 1992년에 이 나라에 가겠다고 결정한 건 어쩌면 역사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지요. 천 년간 중국인의 지배하에 있었고, 백오십 년간 프랑스인에게 식민통치를 받았고, 삼십 년간 공산주의 지배를 받은 나라였으니까요. 겉으로 보기에 사이공 같은 도시는 멀쩡해 보이죠. 아시아의 파리라고 불리기도 하잖아요? 하지만 그건 겉모습일 뿐이죠. 겉모습 아래엔 학살과 전쟁의 피가 가득 차 있어요. 그러니까 프랑스인에게 베트남을 향해 다가간다는 건 회한을 향해 다가간다는 의미예요. 베트남은 프랑스에겐 커다란 실수니까요. 난 소설 속에서 그 실수를 향해 두세 명의 수도사들을 데리고 다가갔던 거죠. 굉장한 야심이었어요. 그런데 그들은 베트남 안에서 점점 더 조국과 종교로부터 버림받게 돼요. 그리고 점점 더 자유로워지죠. 점점 더 헐벗고요.

김정란 주인공들이 현대적 삶으로부터 떠날수록 베트남의 오지로 들어가고, 오지로 들어갈수록 높은 곳으로 올라가도록 설정하셨더군요.

바타이유 그건 해방과 상승을 말하는 장치입니다. 세속의 삶으로부터 떠나서 그들은 자신의 따스하고 가벼운 육체를 발견해요. 자신들을 육체적으로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죽습니다. 죽을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겉으로 보면 이들이 불행해 보일 수도 있어요. 모든 접촉을 잃고,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았으니까요. 그렇지만 마지막 장면에 그들은 미소를 짓고 있죠. 그리고 그들의 모습에는 어딘가 신성한 데가 있어요. 이 책의 결말은 주인공들로서도 전혀 예상치 않은 것이었을걸요.

김정란 한국에선 선교사의 이미지가 좀 그래요.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어떤 역사적 상처로부터 자유롭질 못한데, 선교사들이 많은 경우 식민정책의 첨병 노릇을 하니까…….

바타이유 제 선택은 어렵지 않았어요. 병사들은 베트남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죠. 반면에 수도사들은 경직되어 있는 선교사들, 즉 식민주의자들이 아니었어요. 그들은 부드럽고 단순한 사람들이었죠. 그들과 베트남 사람들은 서로 가까워지죠. 베트남 사람들은 개종하지 않았어요. 개종한 건 오히려 수도사들이죠. 그들은 그들의 단순한 교리가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포기해버려요. 그들은 자기들이 환경 때문에 신앙을 잃게 되리라곤 생각지 않았겠죠.

김정란 하지만 그들과 원주민들은 새로운 신앙 안에서 만난 것 아닌가요? 도그마가 아닌 신앙 말예요. 아니, 오히려 새로운 조건이라고 말해야 할까?

바타이유 그래요. 새로운 조건이죠. 인간성에 대한 확신이라는 조건. 처음에 그들은 별로 인간적이질 않았죠. 왕의 명을 받아서, 십자가를 들고, 제복을 입고 도착했으니까. 그들이 새로 발견한 신앙은 일종의 혼합 종교죠. 가톨릭적 바탕에 더하기 지혜, 젊음, 우주 안에서의 현존.

김정란 바타이유 씨 첫번째 소설을 읽고, 아주 소박하지만 동시에 오만한 작품이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생의 문제, 아니면 패러독스를 해결하고 싶어한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상업성은 없겠지만, 그건 굉장한 형이상학적 야심이죠.

바타이유 사실 오만한 책이긴 하죠. 제 말은 해피엔딩으로 끝났더라면 그럴 뻔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책은 비극으로 끝나죠.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은 겁니다.

김정란 장래가 보장된 직업을 버리고 작가가 된 것도 일종의 오만 아닌가요? 글 써서 먹고살기 힘들잖아요? 그 선택 자체가 물질주의에 대한 저항, 또는 도전 아녜요? 내가 과장하는 건가요? 바타이유 씨 책이 많이 팔릴 것 같지는 않은데…… 프랑스라고 해도 말이죠. 어쨌든 『람세스』처럼 팔리진 않을 거잖아요. (웃음)

바타이유 불행히도 아니죠. (웃음) 하지만 주제에 비하면 꽤 많이 팔렸어요. 제 책이 무척 어둡잖아요. 아까 오만과 도전이라는 말을 하셨는데, 그래요, 사실 그렇죠. 하지만 전 작은 사물들을 통해서 생의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해요. 『시간의 지배자』는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해서 모든 것을 유지시켜보려고 하는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예요. 무질서는 죽음이니까요. 그러니까 그건 죽음을 해결하려는 시도죠. 그런 의미에서 오만하다고 말할 수 있어요. 하지만 작은 기계장치, 여기서는 시계를 통해서 추구가 이루어져요. 『시간의 지배자』는 시간에 대한 형이상학적 소설이 아닙니다. 시간에 대해서 뭘 말할 수 있겠어요? 시계를 선택한 건, 그건 그냥 말하는 방식일 뿐이죠. 시간을 맞추는 주인공은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어요. 어떤 의미에서 그는 범죄자예요. 죽음, 그의 시계에 너무나 신경을 쓴 나머지, 그는 오히려 카오스가 시테 안에 자리잡게 만들어요. 카오스는 시계를 통해서가 아니라, 강간당한 그의 딸을 통해 시테 안에 들어오죠. 왜냐하면, 강간이란 찢어진 살을 의미하는 것이고, 카오스는 살 안에 깃들여 있는 것이니까요. 헬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예요. 사랑에 대한 감각을 가진 여자, 부드럽고, 섬세한 헬렌은 책의 끝부분에서 다시 아기를 가지게 돼요. 아르투로가 떠난 지 한참 뒤인 이 년 후에 가진 아기이니까, 아르투로는 아버지일 수가 없죠. 아버지는 결국 공자그겠죠. 그렇게 부드럽고 아름다운 여자에게 공자그라는 시체를 연인으로 가지게 한다는 건, 그건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에요.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고 도망쳐버린 아르투로는 그런 의미에서 범죄자입니다.

김정란 해결하지 않은 게 아니고,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하셨던 것 아닌가요?

바타이유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오만하지만 동시에 겸손한 소설입니다. 죽음으로 끝나기 때문이에요. 나레이터 역시 죽을 사람이죠. 죽을 사람이 한 소녀의 죽음에 대해 말하는 형식을 택한 겁니다. 장소 역시 마찬가지예요. 그는 베르사이유에서 말하지만, 불 꺼진 베르사이유, 끝나버린 베르사이유, 가을의 베르사이유예요.

김정란 바타이유 씨의 소설 세 권이 모두 바로크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거든요. 그 시대에 특별히 매혹되어 있는 건가요?

바타이유 편의상 그 시대를 선택한 것이기도 해요. 『다다를 수 없는 나라』를 예로 든다면, 만일 오늘날을 배경으로 베트남에 대해서 썼다면 우스꽝스러웠을 거예요. 제가 택하는 시대는 역사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역사 밖에 있지요. 과거 시대를 택하면, 덤으로 생겨나는 효과가 있어요. 깊고 비극적인 울림이 생겨나거든요. 『시간의 지배자』도 마찬가지예요. 난 이 소설이 당대적이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게 똑같아요. 권력과의 관계, 남자들의 행태, 여자를 취급하는 방식. 난 이 책이 과거의 텍스트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비극적 차원은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어요. 신하들과 공자그의 관계는 기업에서 사장과 근로자들이 맺는 관계와 똑같아요. 인간 조건의 차원은 전혀 바뀌지 않았어요.

그러나 내가 이 시대(1700~1715년경)를 택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요. 이 시기는 루이 14세 시대 말기입니다. 루이 14세의 시대는 멋진 시대였지만, 절망스러운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왕은 지치고, 왕궁을 유지하기도 힘들고, 몰래 후궁들을 계속 맞아들이고…… 그러니까 그 시대는, 제 소설에 나오는 메타포를 인용한다면, “바위에 깃들여 있는 죽음”이에요.

김정란 전 이 시대의 선택을 그렇게 해석했어요. 이 작가는 20세기의 인류가 기대고 있었던 패러다임이 부서져버린 것을 예감하고, 20세기 패러다임의 근원지로 돌아가본 거라구요. 즉 근대성 패러다임, 국가 정체성을 발생시킨 근원지지요. 근원지로 돌아가 옛날 패러다임이 발생시킨 타자들을 뒤져내는 거라고요. 그래서 궁전의 하인들을 주인공으로 택한 것 아닌가요?

바타이유 탁월한 해석이군요. 하지만 난 그렇게 깊이까지 생각했던 건 아닙니다. 내가 궁정 하인들에게 관심을 가진 건 사실이에요. 그래서 밤에 촛불을 들고 시계를 맞추러 복도를 돌아다니는 사나이의 이미지가 얻어졌죠. 난 무엇보다도 왕국의 어떤 비전을, 천국의 이면을 살펴보고 싶었어요. 밤에 일하는 사람들이 발견했을 비전, 어떤 형태, 어슬렁거리는 그림자. 낮의 사람들인 권력자들은 그걸 보지 못하죠. 그에겐 모든 것이 가려져 있어요. 낮의 베르사이유는 우월한 버전이죠. 그러나 다른 버전도 있어요. 그건 베르사이유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분지, 호수, 늪지대예요. 그건 결국 디오니소스적 통행로, 켈트적 요소들이죠. 다른 쪽에는 태양왕 루이 14세와 함께 프랑스적 질서가 자리잡고 있고요. 사물들을 질서 속에 유지시키려고 애쓰지만, 한순간 디오니소스가, 옛날의 바탕이 돌아옵니다. 그건 폭력성, 잔인함이죠. 바위 속에 숨겨진 저주처럼 말예요.

김정란 시테의 어두운 분위기가 그걸 말해주는 장치겠군요. 주인공 이름 아르투로가 재미있어요. 전형적인 유럽 이름이면서도 혼성 문화적이거든요. 귀족적인 이름인데, 어쩐지 좀 동양적으로, 타르타르적으로 느껴져요. 어떻게 정해진 거죠?

바타이유 좀 우스꽝스럽게 보이라고 그렇게 정했어요. 프랑스어로 O로 끝나는 이름은 어쩐지 좀 웃기게 들리거든요.

김정란 아더와는 연관이 없나요? 킹 아더? 그도 역시 세계의 구원자가 아닌가요?

바타이유 약간은요. 카멜롯의 아더 말예요. 그러나 프랑스에서 아르투로는 촌스런 이름이에요. 아르투로는 키가 크고, 패션감각도 없고, 말도 할 줄 몰라요. 한마디로 농부 같은 사람이죠. 아르투로는 침묵입니다. 반면에 헬렌은 말을 잘하죠.

김정란 그건 이를테면, 문학의 자질 아닌가요?

바타이유 아르투로­헬렌 부부를 통해서 내가 보이려고 했던 것은, 오히려 어떤 구어 전통 같은 것이었어요, 헬렌은 목소리이고, 아르투로는 육체지요.

김정란, 그래요! 몸이 알고 있는 언어, 남자들에게서 사장되어버린, 남자들이 어둠 속에 파묻어버린, 그러나 여자의 음성을 통해서 햇빛 속으로 불려나오는 말이란 말이군요. 이를테면 어떤 ‘잠재적 문학’ 같은 개념이겠군요!

바타이유 틀림없습니다. 정확하게 보고 계시군요.

김정란 내게는 로도이프스카가 그 언어의 상징일 거라고 생각되었어요. 그러나 바타이유 씨는 작품 말미에서 그녀를 죽여버렸죠. 그녀는 삶 안에서 생존 형식을 얻지 못해요. 난 그녀가 아직 오지 않은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바타이유 바로 그렇습니다. 그녀의 얘기는 좀 복잡합니다. 처음엔 로도이프스카를 중심으로 얘기를 해나갈 생각이었거든요. 그런데 쓰다보니까 조금 달라졌어요. 그녀에 대해선 아직 무언가 잘 쓰지 못하겠더라구요.

김정란 로도이프스카는 사랑할 줄 모르는 남자에 의해 강간당하죠. 공자그는 여자의 살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니까. 공자그는 나에겐 물질주의, 또는 권력의 상징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바타이유 분명히 그렇습니다. 그는 소유에 대한 광기이죠. 그와 로도이프스카의 관계는 미묘해요. 공자그가 로도이프스카를 소유하려 했는지, 아니면 아르투로의 딸을 소유하려 했는지 분명하지 않거든요. 공자그는 로도이프스카를 소유함으로써 아르투로를 지배하려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로도이프스카는 일종의 전달 장치인 셈이죠. 로도이프스카를 소유한다는 건 공자그에게는 아르투로에게 누가 아르투로의 주인인가를 보여주는 방법도 되는 거죠. 아르투로는 복수하지 않고 도망가요. 떠나버리죠.

김정란 아무 데로나 가버리죠. 아니면 아무 곳도 아닌 곳으로 갔든가.

바타이유 사라진 거예요. 공자그의 태도를 ‘권력’말고, ‘권태’로 설명할 수도 있어요. 그는 여자, 문학, 도서관, 그런 식으로 계속 오락을 찾아다니죠. 결국 마지막엔 로도이프스카를 강간하죠. 그의 마지막 오락은 잔인함이죠. 그것이 강간의 동기예요. 한순간, 그는 한 여자의 육체에 물리적인 힘을 행사함으로써 진짜 힘을 소유했다고 느끼는 거죠. 중요한 건, 그녀가 자기가 파괴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거예요. 그것이 강간의 도착적 쾌락이죠. 그건 더 나쁜 일이에요.

김정란 『시간의 지배자』에선 시계가 중심 상징으로 나오죠. 218개의 시계가 나오는데, 그 숫자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나요?

바타이유 아뇨. 난 숫자를 믿지 않아요. 무엇인가 의미할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정말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난 그것이 엄청난 숫자라고 생각해요. 엄청날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근거가 있다고 생각되는데, 베르사이유에는 약 6백 개 정도의 벽시계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2백 개 정도는 가능한 숫자죠.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요. 샤를르 캥(샤를르 5세)이 스페인의 성에서 말년을 보내고 있을 때 일인데요. 어느 날인가 꿈속에서 40개의 벽시계가 한꺼번에 울리는 꿈을 꾸고 그것을 실현해보려고 했답니다. 그런데 물리학자들이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는 거예요. 40개의 벽시계는 수학적으로 무한에 가깝다는 거지요.

김정란 아르투로의 태도 중에서 특히 나에게 흥미로웠던 것은, 그가 한 시간 늦게 가는 고장난 시계를 다 분해하고 난 뒤에, 고장난 것이 없다고 말하면서 “그런 거예요”라고 말하는 장면이었어요. 모순을 견디는 태도지요. 말하자면, 어떤 동양적 견딤, 똘레랑스를 알고 있는 거죠.

바타이유 그리고 동시에, 그가 나약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 나약함 때문에 그는 로도이프스카를 공자그의 품에 내던지죠. 물론, 그 때문에 그가 공자그처럼 편집광적 인간이 되지 않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는 결국 운명이 굴러가는 대로 내버려두는 사람이에요.

김정란 그건 결국 『시간의 지배자』 전체를 덮고 있는 쇠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헝겊’과 ‘속옷’의 이미지로 표현되고 있지 않나요? 몸에 아주 가까운, 꼭 조이는 코사쥬, 투명한 헝겊. 아르투로가 오간디 보자기 위에 시계 부품을 늘어놓는 장면이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바타이유 그 장면에서 드러나는 건 특히 살과 시간과의 싸움이죠. 아르투로는 그래서 매일 밤 시계 부품들을 재조립하는 거지요. 하지만, 공자그는 그걸 잘 견디질 못해요. 그는 분명히 살을 택했으니까요.

김정란 아르투로는 밤의 존재지요. 그렇지만 헬렌과의 결혼에 의해서 그는 낮의 자질을 흡수하게 되잖아요? 여자의 존재에 의해서 디오니소스적인 살이 아폴로적인 살로 바뀌잖아요. 결혼 전에 문을 꽁꽁 닫고 커튼을 치고 살던 그가 결혼 후에 비로소 빛을 만나는 걸로 묘사하셨던데…….

바타이유 정확히 말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냥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서른다섯 살이나 마흔 살 먹은 독신남성이 사는 방식 말예요. 엉망으로 살죠. 여자를 얻으면 사는 게 좀 나아지니까. (웃음)

김정란 에이, 그것만은 아닌 것 같던데요. 아르투로의 아파트는 작품 안에서 중요한 상징적 역할을 하고 있던데요.

바타이유 그래요. 솔직하게 말하면 그래요. 아르투로의 아파트는 왕궁 안에서 무질서가 허용되는 유일한 공간이에요. 그 무질서를 누리기 위해서 ‘다른곳’으로 갈 필요가 없다는 거죠. 왕궁은 일종의 공식적인 장소예요. 모든 것이 조직화되어 있죠. 궁정사람들은 온갖 잡동사니들이 널려 있는 그곳에서 스스로에게 약간의 가벼움을 용인합니다. 아르투로의 아파트는 약간의 카오스예요.

김정란 포스트모던한 태도죠. 카오스를 로고스로 통제하지 않고 견디는 거죠. 그런데, 아르투로는 시계를 꼬박꼬박 맞추거든요. 그건 분명히 모던한 태도구요. 그건 바타이유 씨 작품 전반에서 읽히는 완벽한 통제력과 맞물려 있어요. 그런 특성을 어떤 평론가들은 ‘고전주의적’이라고 보고 있는 것 같구요. 그런데, 이게 아주 흥미로운 부분인데요, 바타이유 씨 작품은 그렇게 통제되어 있고,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는데도 어딘가 부서져 있어요. 어떤 신비한 비논리, 또는 비규정성이 안개처럼 작품을 감싸고 있거든요. 그게 뭘까? 그래서 난 이 작가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에서 어떤 오솔길을 찾아내었다”라고 썼어요.

바타이유 아주 흥미로운 해석이군요. 하지만, 그건 제가 일부러 시도한 건 아녜요. 어쨌든, 아르투로에게 포스트모던한 데가 있다는 건 인정합니다. 그가 기계만을 만지는 건 아니거든요. 그는 지성의 인간이 아니라 직관의 인간이죠. 그는 생각하지 않고 느껴요. 특히 밤의 소리, 무한의 소리를 듣죠.

김정란 그 직관적 비논리가 폭발하는 장면이 강간의 장면 아닌가요? 아까도 말했지만, 난 그 장면이 너무나 좋았어요. 어떤 아름다운 잔인함. 아주 잘 형식화된 잔인함이라고 할까? 난 로도이프스카가 지르는 세 번의 비명 소리가 그녀의 아버지의 세 번의 야간 순찰과 겹쳐진다고 생각했어요. 어쩌면 네번째의 비명은 헬렌이 가지고 있는 그 아기 아닌가요? 어때요? 그 네번째 비명은 세계와 화해할 수 있을까요? 저는 노래가 될 수 있느냐고 묻고 있는 거죠.

바타이유 아기가 나오려면 일 년은 기다려야 하니까, 일 년 뒤에나 보아야 할 것 같은데…… (웃음) 어쨌든 그 아기는 희망의 기호입니다. 모두들 다 죽은 다음에도 한줄기 빛이 남아 있을 거라는 믿음이죠. 어쩌면 로도이프스카가 너무나 비현실적인 인간으로 느껴져서 그 아기의 아버지를 공자그로 설정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어요. 강간의 장면만 해도 그래요. 전혀 현실적이지 않거든요. 그건 강간이 아녜요. 피도 살도 없어요. 내가 써놓고도 비현실적 순간처럼 느껴져요.

김정란 전 로도이프스카를 작은 프란체스코라고 불렀어요. 그녀가 짐승의 말에 가까운 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녀의 비명은 일종의 말하기 방식 아닌가요? 응결된 말. 아니면, 말에 대한 거부로서의 말하기.

바타이유 이 비명에는 다른 뜻도 있습니다. 이건 로도이프스카가 시테에 말하는 방식이에요. 그 비명 때문에 시테 전체가 사건을 알게 되었거든요. 그리고 그 다음날 바닷가에서 아이의 시체를 발견하죠. 그런데 이상한 건, 아무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러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죠. 헬렌도, 아르투로도, 그 누구도. 밤에 일하니까 분명히 깨어 있었을 아르투로도 꼼짝하지 않았어요. 이 비명은 반향이 없는 비명입니다. 무거운 납으로 짓눌려 있어요.

김정란 원초적 살인사건 같은 거죠.

바타이유 결과가 없는 행동.

김정란 이미 저질러졌고, 그리고 그것에 대항해서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건.

바타이유 , 정확해요. 그 때문에 내가 책 앞머리에 셰익스피어의 문장을 인용한 거죠. 시테는 침묵했지만, 분명히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었어요. 그게 바로 강간―부서진 살에 대한 비전, 그리고 그것이 어떤 위치를 가질 수 있느냐 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죠. 그런데 위치가 없는 거죠. 그건 그냥 벌어진 일일 뿐이에요. 이미지죠.

김정란 모든 게 나아질 거예요. 제로부터 다시 출발하면 되죠, 뭐.

바타이유 제로보다 못한 데에서 출발해야 할지도 모르죠. (웃음)

김정란 이 정교한 글쓰기가 어떻게 가능한가요? 어떻게 작업하세요?

바타이유 처음엔 몇 개의 이미지가 있어요. 베르사이유의 오두막에서 밤에 일하는 하인이 생각났다든가 하는 식으로 어떤 합리적 요소들이 있어요. 그런데, 나머진 어떻게 씌어지는지 잘 모르겠어요.

김정란 아마 천재성이 받아쓰기를 시키나보죠?

바타이유, 설마…….

김정란 바타이유 씨의 작품은 삶에 대해 깊이 절망한 사람이 쓴 책처럼 보여요. 어떤 이유라도 있나요? 어떤 인터뷰에선가 “난 현대가 추악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걸 보았는데…….

바타이유 그건 제 확신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할 때, 난 의식하고 있습니다. 부자이고, 힘세고, 과거가 찬란했던 나라 사람으로서 쉽게 하는 말일 수도 있다는 걸 말입니다. 내가 “세계는 추악한 곳이다”라고 말할 때, 그건 부자나라 국민의 예술적 시각을 말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제 느낌은 분명해요. 난 세계가 추악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것이 내가 글을 쓰는 진정한 유일한 이유예요.

김정란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걸 문학의 이유로 생각하신다는 거죠?

바타이유 싸움입니다. 제 감각으론 언제나 싸움입니다.

김정란 역시 파스칼리엥다운 용어로군요. 벌써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던 싸움 아닌가요? 그렇게 젊은 나이에…….

바타이유 흥미로운 건, 세계가 추악한 곳이라면, 문학 역시 추악한 것을 사용한다는 얘기거든요. 예를 들어서 포크너는 강간에 대해서 무려 3백 페이지 가량을 쓰고 있어요. 그런데, 아름다움에 의해서, 그 추악함이 윤리적인 것으로 바뀌어버려요. 도스토예프스키도 그 비슷한 말을 했어요. 그의 말은 일종의 종교적인 언급이지만, 신의 현존 안에서든, 밖에서든, 전 아름다운 것을 찾아요.

김정란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 아니라면, 당신 책에는 어떤 종교성에 대한 믿음이 있어요. 신도 등장하지 않고, 신의 이름도 말해지지 않지만, 분명히 어떤 존재를 찾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요.

바타이유 그렇습니다. 신은 없지만, 신이라는 목표가 없는 건 아녜요. 하지만 성공하고 있지 못한 목표죠. 언젠가 난 신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죠. 내 등장인물들 중에서 그럴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사람은 헬렌뿐이에요. 사실, 신을 만날 수 있는 자질은 사랑으로부터 오는 것이거든요. 그녀만이 제대로 사랑할 줄 알죠. 사람들이 공자그에게서 용서하지 않는 것은 바로 그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즉, 신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에요. 신에 대한 감각은 사랑을 통해 드러나거든요. 사랑에는, 그것이 아무리 괴상하고 폭력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어떤 기독교적 의미가 있어요. 자기자신만을 사랑한다는 것은 악마적인 것이죠.

김정란 이제 작품 밖으로 조금 나가볼까요? 약관 22세에 쓴 『다다를 수 없는 나라』부터 평단의 대대적인 조명을 받으셨는데, 그런 뜨거운 반응을 기대하셨나요?

바타이유 아뇨, 전혀. 하지만 칭찬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어요. 잘 썼다고 칭찬해준다고 들뜰 이유 없어요. 결국 저 자신에게 달린 문제죠.

김정란 요샌 예술적 재능을 가진 젊은이들이 몽땅 영화판으로 몰리는 추세잖아요? 프랑스만 해도 30세 미만의 재능 있는 시네아스트들이 진을 치고 있고…….

바타이유 그래요. 괜찮은 친구들이 많죠. 하지만, 영화는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거든요. 그 점도 중요한 요소죠.

김정란 문학은 지원 안 해줘요?

바타이유 문학은 없어요.

김정란 어떤 작가들을 좋아하세요?

바타이유 아직 잘 모르겠어요. 계속 발견해가고 있는 중이니까. 도스토예프스키, 포크너, 클로델, 보들레르, 랭보, 라 로슈푸코, 복음서 저자들, 생종 페르스 등등.

김정란 프랑스 문단은 어때요? 간단하게 묘사해줄 수 있어요?

바타이유 베르사이유죠. 좀더 요란하거나 덜 요란한 코스츔을 입은 15명 정도의 권력자들이 중앙에 포진하고 있고, 그들을 3천 명 정도의 궁인들이 둘러싸고 있죠. 어디나 다 똑같지 않은가요?

김정란 궁녀들은 없어요? (웃음)

바타이유 물론, 다행히도, 있죠. (웃음) 재능 있는 작가들이 많아요. 뚜렷하게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은 없지만, 기다려볼 만하다고 생각해요, 지금 프랑스 문단은 1895년 상황과 비슷하거든요. 말라르메와 랭보가 사라졌지만, 벌써 지드, 클로델, 발레리, 생종 페르스 등이 대기하고 있었거든요. 사르트르, 아롱, 들뢰즈, 푸코, 사로트 등의 대가들이 지난 삼십 년 동안 모두 세상을 떠났어요. 지금 나타나지 않았다 뿐이지 어딘가 숨어 있는 작가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영화는 정말 굉장히 힘차고 아름다운 걸 만들어내고 있거든요. 타르코프스키나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들은 정말 기차요. 같은 영화는 너무나 힘차고 아름답거든요.

김정란 아주 야만적이면서도 도시적이죠. 아름다운 잔인성. 그러면서도 생에 대한 아주 구체적인 감각이 있어요.

바타이유 카프카가 그랬어요. “책이란 무엇인가? 그건 균열이다.” 읽고 나서 무언가 깨어지는 느낌을 받아야 하는데, 요즈음 책들에선 그게 안 느껴져요.

김정란 영상 문화 앞에서 문학이 너무 주눅들어 있는 건가요?

바타이유 아뇨, 꼭 그렇다고 생각 안 해요. 물량적으로 하도 밀고 들어와서 그렇지, 많은 영화들은 쓰레기들이죠. 문학은 약한 입장이긴 하지만 폭발의 핵이 될 수도 있어요. 예를 들어서 랭보의 『지옥에서 보낸 한철』은 발표 당시엔 15페이지 정도의 팜플렛 같은 책이었거든요. 그 당시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김정란 그땐 영화가 없었잖아요. (웃음)

바타이유 글쎄, 그런가요? 어쨌든, 기다릴 줄도 알아야죠. 그래서 편집자의 입장에서도 전 대가들보다는 젊고 이름 없는 친구들을 돌보는 쪽이죠. 그들 중에 미래의 랭보가 있을지 어떻게 알겠어요?

김정란 당신 자신은 아닌가요? 이런 게 그야말로 독­아첨인가? 문학뿐 아니라, 인문학 전체가 상업주의 앞에서 맥을 못 추는 것이 세계적 추세인 것 같아요. 프랑스는 어떤가요?

바타이유 인문학의 위기는 인문학 자체의 위기라기보다는 출판 유통의 위기죠. 책들을 도통 안 사거든요. 그나마 인문학 책을 사는 사람들마저도 영성이나 종교에 대한 책들만 사요. 파라셀즈, 프리메이슨단, 연금술 등등. 인문학이 힘을 잃고 있는 반면에 신에 대한 추구는 강력하게 나타나고 있는 거죠.

김정란 그건 인문학이 대중의 요구에 대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요?

바타이유 그런 측면도 있겠죠. 어쨌든 이런 반응이 어떤 특별한 콘텍스트를 구성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아요. 하나의 콘텍스트가 끝났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일련의 현상들이 있어요. 사회학, 생태학 책들은 이미 충분히 소비되었거든요. 지금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도래를 기다리고 있는 시기인 것 같아요.

김정란 기다리면서, 당신의 문학이 훗날 폭발의 핵이 되길 바랍니다. 어쨌든, 지구의 어디에선가 진지한 태도로 글을 쓴 사람이 있다는 걸 안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즐거운 일입니다. 오랜 시간 애쓰셨습니다.

바타이유 한국의 독자들을 만나게 되어 많이 기쁩니다. 앞으로도 다시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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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urblue > [퍼온글] 피카소의 드로잉 모음

 


Francoise in the Form of the Sun, 1946


Rooster


Permission Vega/Spadem

 

Dance of Youth


Woman/Flower, 1946


King Kagpha


Dove of Peace


Maternity


Evening Flowers


Portrait of Olga Picasso and Son


Fleurs et Mains


Head, 1946 (on special paper)


Dove of Peace - Sun


Dove with Flowers


Femme


War and Peace (embossed)


The Face of Peace


Sitting Nude 


Sur la Plage,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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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urblue > [퍼온글] 김지하는 왜 파시스트로 전락했는가?

  "김지하는 왜 파시스트로 전락했는가?"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6> 바그너와 김지하
  2005-08-11 오전 11:57:06
  파르지팔
  
  2001년 12월 런던에 도착한 이틀 후 아직 시차에 적응하지 못한 채로 코벤트가든의 로열오페라하우스를 향했다. 사이먼 래틀의 지휘에 의한 바그너의 <파르지팔(Parsifal)>의 공연날인 것이다.
  
  나는 오페라 애호가이지만 바그너에 한해서는 불과 세 번째 관람이었다. 분명히 말하자면 멀리해 온 것이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십수 년 전에 빈국립가극장에서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보고 아주 따분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건 내가 미숙했던 탓일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바그너와 반유대주의, 바그너와 나치즘이라는 곤란한 문제이다.
  
  뛰어난 예술을 정치적 이유만으로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은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바그너의 경우, 그렇게 말하고 끝내기에는 문제가 너무도 크다. 나치가 바그너를 이용했다고 하는 옹호론이 있는데 1850년에 '음악에 있어서의 유대성'이라는 논문을 공표했듯이 그자신이 19세기의 반유대주의이데올로기의 주요한 제창자였던 것이다.
  
  히틀러는 바그너에 심취한 사람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할 때 배낭에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악보를 넣어가지고 지냈다고 전해진다. 바그너의 음악자체에도 나치를 매료하는 요소, 국수주의나 파시즘에 이어지는 요소가 있음에 틀림없다. 그것에 무경계해도 될 것인가? 이점을 바그너 애호가로 불리는 몇명에게 물어 본적이 있지만 속 시원한 대답을 들은 기억은 없다.
  
  그런데 실은 그 전해인 2000년 여름 잘츠부르크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본 것이다. 지휘는 병중인 클라우디오 아바도를 대신해 로린 마젤. 나에게 있어 두 번째 바그너 체험이었다. 그게 좋았던 것이다. 불가해한 감동이었다. 더 알고 싶다는 강한 호기심이 솟아났다. 위험한데, 라고 생각한다. 생각하지만 호기심의 수위가 경계심보다 높은 것이다.
  
  공연은 오후 4시부터의 마티네였다. 토요일 오후인만큼 주위는 대단한 인파이다. <파르지팔>은 중세의 <성배전설>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로, 바그너 자신이 '무대 신성 축전극'이라고 부른 그의 생애 최후의 악극이다. 1882년에 이 작품을 완성해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에서의 초연을 성공리에 마친 후 바그너는 베네치아로 정양을 떠나 이듬해 거기서 세상을 떠났다.
  
  * * *
  
  스페인 북부의 산지 몬살바트의 성주이자 성창(聖槍)과 성배(聖杯)의 수호자인 암포르타스왕이 요녀 쿤드리를 향한 애욕에 눈이 멀어 사악한 마법의 신 클링조르에게 성창을 빼앗기고 상처를 입는다. 그러나 '순수한 바보'인 파르지팔에 의해 구제되어 성창을 되찾는다. 파르지팔은 성금요일에 왕의 후계자가 된다.
  
  이런 식으로 줄거리를 써 본들 동화로밖에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이 단순한 스토리를 상연하는데 3막, 5시간 남짓의 시간을 쓴다는 것은 상식적으로생각해 제 정신이라고 보기 어렵다. 바그너의 세계를 외부에서 바라보는 한 그것은 이해곤란이며 편집광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그 안에 들어가면 상황은 달라진다.
  
  나치제3제국의 선전 담당 장관 괴벨스는 1938년 "유대성과 독일음악은 그 성질부터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당연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독일적인 음악과 유대적 음악을 명확하게 구별해 인식하는 선을 긋는 것은 불가능하다. 제3제국의 문화 정책 이데올로기 이론에서는 바하, 베토벤, 헨델, 모차르트는 모범적이고 독일적으로 간주되었으며, 멘델스존, 말러, 쇤베르크, 코른골트, 쿠르트바이엘 등의 유대계 작곡가의 작품은 독일 음악의 모방에 불과하며, 기법에 치우치고, 깊이가 없으며 진부하거나 부도덕하다는 평가되었다. 힌데미트는 유대계는 아니었지만 문화 볼셰비키여서 배척당했다.
  
  이와 같은 나치에 의한 사이비 이론화 작업을 유리하게 만드는 데 대대적으로 인용된 것이 바그너였다. 나치즘 미학에서 바그너야말로 이상적으로 독일적이었던 것이다.
  
  '성배'란 예수그리스도가 최후의 만찬에서 쓴 식기로, 십자가 위의 예수의 상처에서 솟는 피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11세기부터 12세기에 걸쳐 이와 같은 '성유물'에 대한 숭배가 유럽전역에 퍼졌다. 십자군이 원정에 의해 동방으로부터 갖고 돌아 왔다고 하는 성유물, 예를 들면 그리스도의 '피', 성인의 유골, 성의(聖衣)등이 성스러운 것으로 받들어져 그것을 모시는 성당이 각지에 세워졌다. 당시의 사람들은 그 성유물들이 실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 부조리한 열광이 이교도인 이슬람교도나 유대교도에 대한 적의와 하나였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그리스도 수난극'도 이 시기에 전파되어, 일반 민중들 사이에 '유대인'은 '그리스도의 살인자'라는 반감을 심게 되었다. 각지에서 유대인 학살 사건도 다발했다.
  
  '성배'를 찾는 행위는 절대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행위의 은유이다. 암묵리에 소박하고 순진한 그리스도 교도인 파르지팔에 대비되는 것은 교활하고 신용할 수 없는 '유대인'이다. '유대인'을 타자로서 배제하고 그것과는 다른 '그리스도교도', '아리아인종', '독일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나르시스틱하게 강조하는 것에 성배 전설은 크게 기여했던 셈이다. 그에 더해 바그너는 이 전설을 먼 과거에의 동경, 헌신과 자기희생에의 도취, 초인이나 천재의 찬미와 같은 낭만주의 미학에 의한 일대 그림극으로 그려내었던 것이다.
  
  * * *
  
  이런 것들를 알고 경계심을 잔뜩 가지고 관람을 시작했는데 결과적으로는 다섯 시간 남짓한 상영 시간 내내, 시종 바그너의 악극이 지닌 불가사의한 광택에 매혹당하고 말았다. 내 머리 속에 전에 함부르크에서 본 프리드리히의 그림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높은 봉우리의 정상에 선 남자. 멀리 보이는 저편에는 험한 산봉우리가 이어지고, 지상은 구름의 바다에 덮여 보이지 않는다. 고독, 우울, 그리고 차가운 고양감. 프리드리히는 독일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바그너의 음악세계는 프리드리히의 회화 세계와 강렬한 친화성이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통설을 몸으로 검증하고 있는 심정이다.
  
 
Caspar David Friedrich, , Oil on canvas, 94 x 74.8 cm, Kunsthalle, Hamburg, 1818. ⓒ프레시안  

  베토벤에서는 문제 있다고 생각되었던 래틀의 지휘가 바그너에서는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왕의 역을 맡은 토머스 함프슨의 가창도 일품이었다. 막이 내린 후 나는 흥분과 동시에 크게 당황했다. 한편에는 크나큰 감명이 있었으며 다른 한편에는 깊은 의문이 있었다.
  
  게다가 교양 있는 백인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관객들이, 오늘날의 이른바 '아우슈비츠 이후의 세계'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바그너에 도취되어 있는 것도 나에게는 섬뜩한 것이다. 또한 백인들과 마찬가지로 도취되어있는 일본인 관객의 대부분이 아마도 이와 같은 위험성에 무지할 것이 불안해 견딜 수없는 것이다.
  
  바그너의 음악에 자주 쓰이는 것이 '무한선율'이다. '무한선율'이란 '리듬적, 화성적인 단락의 느낌, 종결의 느낌을 가지지 않는 자유로운 선율'을 의미한다. 즉 '네, 그럼 여기서 일단락'이라거나 '자 이걸로 끝'과 같은 마디를 의식적으로 없애고 있는 것이다. 높이 올라갔는가 하면 다시 내려오고, 내려갔는가 싶으면 다시 올라간다. 커다란 음향이 귀를 울리는가 하면 가늘게 잦아들어가고, 사라졌는가 하면 다시 울려퍼진다. 끝없이 파도치고, 너울거리며, 어디까지나, 어디까지나 계속된다. 드디어 끝났나 싶으면 다시 다음 물결의 너울이 밀려온다.
  
  처음에는 당혹감이 있고, 따분함과 피로감이 있지만, 일단 그 무한의 물결에 몸을 맡겨버릴 수만 있다면, 불가해한 관능과 고양감에 잠길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 장치가 되어있는 것이다. 아마도 다섯 시간이라는 긴 무대에서 오는 피로나 일종의 감각의 마비가 관객의 감성에 가져오는 효과까지 계산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바그너의 '종합예술'의 경우도 부르크너의 교향곡의 경우도, 음악과 듣는 이의 관계는 말하자면 '대등'한 것이 아니다. 바그너의 장대한 '물결의 너울거림' 속에 청자는 '몸을 맡겨야'하며 몸을 맡긴 청자는 부르크너의 음의 신전을 '우러러야' 한다. (클 H 케이터, <제3제국과 음악>, 아카시마 사노리 옮김, 水声社) 바그너는 물결의 너울거림에 몸을 맡기자, 바로 이게 특징이다.
  
  개인의 취향이나 취미, 의심이나 비판, 위화감이나 저항, 그와 같은 감정을 어쨌든지 일단 젖혀두고 말하자면 몰주체, 몰아의 경지로 나아가 거기에 몸을 두고 크나큰 물결의 너울거림에 몸을 맡기는 것, 그것이 바그너의 음악에서 감명과 도취를 얻는 최상의 방법이다. 그리고 그런 태도만큼 파시즘에 바람직한 것은 없는 것이다.
  
  예술과 정치는 별개다, 라는 말을 들을까? 그러나 나는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범용한 예술이라면 어떤 정치와도 타협할 수 있을 것이다. 바그너의 예술이 뛰어난 점은, 바로 그 둘이 별개가 아니라는 데에 있다. 그래서 고민스러운 것이다.
  
  성배민족(聖杯民族)
  
  코벤트가든에서 지하철을 갈아타고 본드스트리트에서 내려, 조용한 밤길을 걸어 호텔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와 침대에 누워도 아직 바그너의 무한선율이 몸속을 흐르고 있어 신경이 흥분되어 잠이 올 성싶지 않다.
  
  잠들지 못하는 채로 일본에서 가져온 잡지를 집어 들었다. <현대사상(現代思想)> 2001년 12월호, '내셔널리즘의 변모'라는 특집호이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에는 바빠서 아무리 해도 읽을 시간이 없어, 그대로 여행 가방에 넣어가지고 온 것이다.
  
  거기에 실린 연세대학교 교수 김철의 '한국의 민족-민중문학과 파시즘 김지하의 경우'라는 논문을 무심히 읽기 시작했는데 금세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논문에 김지하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민족은 사명과 과제를 가진 민족입니다. 뛰어난 전통, 영적인 전통을 가졌으면서 오랜 고난 속에서 수난만 받아온 고난의 민족입니다. 한 문명의 쇠퇴기에는 반드시 인류의 새로운 생의 원형을 제시하는 민족이 나타납니다만, 그 민족을 성배의 민족이라고 합니다. 로마가 지중해 세계를 지배할 당시에는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지금은 한민족입니다. (<사상기행 2>)
  
  또 '성배'라니. 이것은 어찌된 우연인가. 바그너로부터 기분을 바꾸려고 하는 참인데 여기서도 '성배'와 만나고 만 것이다.
  
  김철의 논문은 1970년대 한국 민주화 투쟁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민족-민중문학론(그 대표적 표현자인 시인 김지하과 이론가인 백낙청)이, 오늘날에는 과거에는 투쟁의 대상이었던 파시즘과 심정과 이론을 공유하고 상호침투해 마침내는 공범관계를 이룬다고 하는 빠져나갈 길이 없는 모순과 배리에 빠져버렸다, 이렇게 주장한다. 과거에는 식민지주의나 파시즘에 대한 저항의 정신적 근원이었던 내셔널리즘이, 오늘날에는 국수주의, 파시즘사상으로 전락해버렸다, 그 주된 원인은 민족-민중문학론이 '민족'이나 '민중'이라는 개념을 근본적으로 묻지 않고, 자기완결적으로 절대화해 온 것이 있다는 것이다.
  
  논문을 읽고 심경이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논자의 주장에 반대해서가 아니다. 그 반대인 것이다. 이와 같은 논의는 내게는 처음이 아니었다. 나 자신 1995년에 '김지하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글을 통해 그의 국수주의 사상으로의 전락을 비판한 적이있다. (<분단을 산다>, 影書房)
  
  김철의 논문이 지적하듯, 김지하가 하는 말은 어리석고 황당하고 논리성을 결여하며 전형적인 국수주의성향을 보이는 것은 틀림없다. 그 점을 다시 한번 인식해야만 하는 것은 유쾌하지는 않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어버렸는가. 저 80년대의 어둡고 험난했던 날에 김지하라는 이름이 얼마나 특별한 것이었는지 상상할 수 있을까.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타는 목마름으로>, 창비, 1982)
  
  1970년대의 김지하의 대표작 <타는 목마름으로>이다. 이것은 신에게 선택받은 위대한 '성배민족'을 찬양하는 노래가 아니다. 뒷골목에서 흐느껴 울며, 나무 판자에 남몰래 '민주주의만세'라고 쓰는 사람들의, 자유를 갈망하는 노래이다. 여기에는 의심할 바 없이 한국이라는 하나의 국가를 꿰뚫는 보편적인 인간해방에의 지향이 있다.
  
  나 자신, 1970년대초 두 형이 투옥돼 재일조선인으로서 일본에 살면서 바로 타는 목마름으로 자유, 자립, 한국의 민주화를 절절히 바라고 있었다. 당시 나는 한국이 민주화되어 형들이 해방되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마음으로부터 믿고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런 날은 끝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인생을 의의 있는 것으로 만들기를 갈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나는 주관적 상상에 있어서는 김지하로 대표되는 민족-민중문학을 매개로 해 민주화 투쟁를 하는 한국의 동포들에 속해 있었다. 그것은 내가 일본이라는 장소에서 사는 재일 조선인 2세로서 스스로의 생의 의의와 방향성을 모색하는 데 있어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살기 위해 필요했다고까지도 할 수 있다.
  
  그랬는데, 지금은 어떤가? 그 무렵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형들은 둘 다 살아서 감옥으로부터 풀려났으며 한국사회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민주화의 길을 걸었다. 잇따른 시련이 계속되고는 있으나 저 '한 시대'는 과거의 것이 되었다. 그러나 탑과도 같이 우뚝 서 있던 시인은 '성배의 민족' 운운하는 국수주의자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이전에 1970년대 한국 민주화 운동의 과정에서 진정으로 괄목할 만한 움직임을 보였던 한국 민중 신학이 지금은 김지하와 '선민사상(選民思想)'을 공유해 '일종의 자기중심주의, 나르시시즘'에 전도해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우려를 표한 적이 있다. 그리고 재일 조선인과 같은 '디아스포라의 조선인'을 시야의 밖에 두지 말고 오히려 어떻게 하면 '디아스포라'와 과제를 공유할까를 생각하는 것이 자기 중심주의의 함정을 피하는 길에 통할 것이라는 생각을 썼다. ('재일 조선인은 민중인가', <반난민의 위치에서>, 影書房)
  
  물론 김지하 한사람이 1970년대 저항 내셔널리즘의 대표는 아니다. 이 시인은 오히려 과격한 예외라는 견해가 있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왜 70년대를 그와 함께 겪은 사람들 속에서 강하고 이성적인 비판이 나오지 않는 걸까.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내가 피억압민족에 의한 해방과 자립을 위한 운동들이, 언제든 어디에서든 불가피하게 자기중심주의나 국수주의에 전락해버리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고 결론짓고 있는 것은 아니다. 현실을 외면한 시니컬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이와 같은 생각은, 식민지지배의 책임을 인정하게 않으면서 피억압민족의 저항을 눈의 가시처럼 느끼는 사람들에게만 환영받을 것이다.
  
  내셔널리즘을 넘는다는 것은 '선진국'이라는 안락한 장소에서 '선진국'으로서의 기득권을 의심 없이 향수하면서 타자를 내셔널리스트라고 지칭하면 그걸로 되는 것이 아니다. 피억압자가 저항을 위해 내셔널리즘을 필요로 하는 상황, 피억압자를 내셔널리즘에 결집시키는 억압구조,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방향성을 결여한다면 그 담론은 '내셔널리즘'이 아니라 '저항'을 무력화시키는 힘으로만 작용할 것이다.
  
  1970년대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내셔널리즘'이라는 한 마디로 아우르는 것도 하물며 그것을 김지하로 대표하게 하는 것도 단락적인 시각에 불과하리라. 그것은 무엇보다 해방과 자립을 위한 투쟁이었다. 그것은 내셔널리즘에서 기독교, 자유주의에서 마르크스주의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정치적 입장의 상이를 지니고, 군사 독재 타도라는 공통의 목표로 묶인 일군의 사람들이 진 역할이었다. '김지하'란 그와 같은 다양한 사람들의 집합을 상징하는 집합명사였다. 시대의 변화, 상황의 진전은 그 집합적 '인격'의 분열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분열과정을 거쳐 한국의 저항 내셔널리즘이 더 보편적인 인간해방의 사상을 향해 스스로를 열어 가는 가능성을, 나는 단념하고 싶지 않다.
  
  지금의 한국에서는 1970년대, 1980년대에 군사 정권과 싸운 세대가 사회 각 분야의 중핵을 차지하고 있다. 그들의 대부분은, 하나의 시대, 하나의 사회의 주인공으로의 자신에 넘쳐있다. 김철이라는 논객도 자신이 한국이라는 사회의 일원으로서 시련의 한 시대를 살아왔다는 자각에는 흔들림이 없을 것이다. 그의 논의는 저항 내셔널리즘의 바람직한 분열과정을 촉구하고, 그 최량의 자산을 내일에 살리는 것에 기여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해서 어떤 한시대의 변혁을 중심에서 짊어졌던 '우리'는 해체돼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답할 수 있는 다음의 '우리'가 형성된다. 다이나믹한 분열과 종합의 과정을 반복하면서, 새로운 시련에 맞서는 새로운 운동과 사상이 단련을 받아갈 것이다.
  
  내 심정이 혼란되어 있는 것은, 나 자신이 그와 같은 다이나미즘의 '밖'에 놓여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한국의 동포들과 똑 같은 고통을 체험한 것은 아닐지라도, 나 또한 '시련의 시대'의 수인(囚人)의 몸이었다고 하는 것은 아마도 허락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난 30년을 '밖'에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20대부터 50대라는, 사람의 인생의 중심을 이루는 세월이었다.
  
  나와 같은 디아스포라와 한국 동포들이 투쟁을 통해 '합류(合流)'하는 것이 1970년대초에 내가 막연하게 지니고 있던 비젼이었다. '합류'란 한국 민중 신학의 용어이다. 그러나 '합류'는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 나는 자신이 여전히 '밖'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내 인생의 유한한 시간이 그렇게 지나갈 것이라는 것을 런던의 오래된 호텔에서 실감하고 있는 것이다.
  
  번역 : 김혜신 가쿠슈인대학 강사(미술사)
   
 
  서경식/일본 게이자이 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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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urblue > [퍼온글] 넥타이 종류별 매는 방법

출처 : daelimtextile.com
V존의 인상을 결정하는 요소 중에서 중요한 것들 중의 하나가 넥타이 매듭법이다.
셔츠의 카라 형태나 넥타이 폭의 너비,또는 생지의 두께에 의해서 그에 적합한 매듭법으로 V존을 연출할줄 안다는것는 "넥타이를 맨다"는 고유의 의미를 높여 주는 것의 하나라 여겨진다.
셔츠카라 사이의 열림이 거의 수평에 가까운 와이드카라 셔츠가 유행한다고 할 때 그것에 어울리는 형태의 넥타이를 잘 선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매듭법으로 연출하느냐에 따라서 전체적인 분위기와 느낌이 확연히 달라지게 되므로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몆가지 넥타이 매듭법에 대해서 잘 알아 놓는 것도 자신의 개성과 패션 감각을 높이는 방법의 하나라 생각된다.
넥타이의 매는방법을 188여가지나 적어놓은 책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실용적인 면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매듭법은 포인 핸드넥타이 기준으로는 플레인 놋트, 윈저놋트, 하프윈저놋트, 크로스놋트, 더블놋트, 브라인드 폴드놋트, 보우타이를 기준으로는 >베이직놋트와 더블 베이직놋트 이며, 아스콧타이는 논 놋트이다.


※딤플 (Dimple) 이란?
딤플 이란 보조개라는 말로 넥타이를 맷을 때 매듭밑에 만드는 옴폭한 홈을 뜻한다.
넥타이매듭에 있어서 크게 두가지 흐름이 있는데 하나는 영국인과 앵글로 어메리칸들이 선호하는 방식이고 또 하나는 프랑스식인데 전자는 매듭밑에 딤플을 만드는 매듭법이고, 후자는 딤플을 만들지 않는다기보다는 딤플을 의식하지않고 가볍게 살짝 매는 방법이다. 이 딤플에는 넥타이를 비교적 가늘게 맷을 때 잘 어울리는 「센터 딤플」과 비교적 굵은 와이드 타이에 잘 어울리는「더블 딤플」두가지 타입이 있다.
센터 딤플은 매듭 바로 밑 중앙의 한군데, 더블 딤플은 매듭 바로 밑 중앙의 양단에 홈을 만드는 방법으로 당연히 센터 딤플 보다 더블 딤플이 고도의 테크닉을 요구한다.
딤플이 없이 꽉 조여진 매듭의 넥타이를 착용한 사람을 보면 여유가 없는 듯한 느낌과 단지 넥타이를 매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에 비해 넥타이매듭 하단에 우아한 딤플을 연출한 모습은, 보다 넉넉하게 여유있고 풍성한 느낌을 받는다.
 
 
가장 기본적으로 포플러한 매듭방법으로19세기 중엽 넥 웨어의 주류를 이루던 나비 매듭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로 등장하였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가장 활용 범위가 넒은 매듭법으로 우리 나라에서도 윈저 놋트, 하프윈저 놋트와 함께 가장 선호 되는 넥타이 매듭 법이다.
이 매듭법은 대검을 좌우 어느 쪽에도 걸지 않고 한 바퀴 만 감아 내려 매는 것으로 매듭 모양이 길고 가늘게 형성되므로 '얼굴이 마르고 삼각형에 가까운 사람에게 잘 어울리는 매듭법'이며 경쾌하고 산뜻한 느낌을 준다.
응용범위가 넓어서 확실히 익혀둔다면 어떤종류의 넥타이도 잘 멜 수 있게 한다.
       
 
  매듭의 중심이 흐트러지기 쉬우므로 좌측 끈에 밀려 한쪽으로 밀리지 않도록 주의.
매듭의 밑 쪽 중심에 만드는 딤플이 심플하게 보이도록 한다.
 
 
 
 
  밝은 색조의 무지, 또는 극히 작은 무늬의 타이로 다소 재치있고 장난끼 섞인 느낌을 나타내 보고 싶을 때 시도해 봄직한 매듭 법이다.
무지 또는 무지 감각의 넥타이로서 만드는 V존은 당연 대단히 심플한것 이 되지만 이 매듭법은 그 심플함에 조금 변화를 줄 수가 있다.
플레인 놋트와 같은형으로 매듭의 중앙을 비스듬하게 달리는 1가락의 줄기가 그 비결이라 크로스 된 매듭의 선이 충만한 생동감을 준다. 무지 넥타이는 자칫하면 단순히 넥타이를 매고 있을 뿐이라는 느낌이 되기가 쉬운데 이런 변화가 이미지를 변화시킨다. 넥타이 자체보다도 매듭의 독특함이 전체 이미지에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는 점에서 다른 매듭 법보다 한층 더 두드러진다. 따라서 이 매듭법을 사용할 경우에는코디네이트 전체를 조금 억제하고 이 매듭법 만으로 연출 한 다고 하는 생각을하면 좋다. 실용성도 비교적 높은 매듭법이다.
       
 
  심플함에 변화를 주는 이 크로스 놋트는 무늬가 큰 넥타이는 피하고 수수한 느낌의 넥타이를 해야 한다. 무늬가 너무 크면 색다르게 변환 매듭의 재미가 오히려 역효과로 되어 전체가 너무 두드러진 게 되어버린다. 또 하나 주의해야 될 것은 넥타이의 소재인데, 실크 타이로도 훌륭한 매듭을 할 수 있지만 울 타이라면 음영의 효과가 보다 강하게 된다.
 
 
  보우타이의 가장 기본적인 매듭 법이 이 베이직 놋트이다.
오늘날과 같은 보우 타이가 탄생한 것은 19세기 말경이라고 한다. 퇴폐와 향략의 세기말 적인 사회 풍조 중에서 당시의 상류 계급 남성들 사이에는 급진적인 넥타이에 대한 욕구가 있었었다.
그때까지 유행하던 크라바트를 대신할 새로운 칼라 장식에 대한 여러 가기 시도에 의해 생긴것이 펠트 형태의 천으로 묶는 나비 넥타이라는 것이었다. 나비 매듭으로 묶는 이 새로운 넥타이는 그 신선함으로 맺을 때 칼라의 모던한 이미지는 당시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한 것이 였으며 이후 여러 가지 형태의 보우 타이가 났으나 그 매듭법만은 이 베이직 놋트뿐이였다고 한다. 포멀 웨어 착장시 빠지지 않는 보우 타이는 평상시 그다지 사용할 기회가 적어 완벽하게 매기까지 는 숙련을 요한다. 요즘은 아예 매듭지어져 있어 띠로 두르기만 하면되는 보우 타이도 시판되고 있으나 자신이 스스로 매어 그 방법을 알아 놓는것도 좋겠다.
       
 
  매듭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 균형을 이루도록 매는 것이 중요하다.
 
 
 
  일반적인 넥타이 매듭 법으로는 자주 사용되지 않는 매듭 법이지만 한 번쯤 변화를 시도해 봄직한 넥타이 매듭 법이다.
방법은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넥타이를 감아서 뒤쪽 앞으로 묶어 통상의 셔츠 속에 감추어져 있는 부분이 바깥쪽으로 보이게 하게 하 는 매듭 법이다.
전체적으로 소프트하게 마무리하므로 V존에 부드러움을 나타내고자 할 때 적합한 매듭법이다. 보통의 포인 핸드 타입의 넥타이보다는 아스콧 타이에 잘 어울리는 매듭이며 아스콧타이에 적 용하면 한층 부드러움이 더해져 니드 한 연출이 가능하다. 여름철에는 린넨 재킷에 코튼 또는 린넨의 타이를 논 놋트를 적용해 보는 것도 색다른 멋을 연 출할 수 있다. 특별히 큰 특징이 없는 자켓을 좀 니드 하게 입고 싶을 때 효과를 발휘 할 수 있는 매듭이다.
       
 
  좌우로 끌어넣은 부분이 서로 대칭이 되도록 유의할 것. 양쪽에 감겨진 2개의 매듭이 깨끗하게 삼각형을 이루도록 조정할 것. 강하게 꽉 조여 매면 이 작업이 어려우므로 주의한다. 가벼운 느낌을 내기 위해서는 아스콧 타이가 적격이지만 부드러운 실크 프린트 타이등에도 적용 할 수있다.
 
 
 
  윈저 놋트의 정갈함과 단정함이 좋기는 하지만 매듭이 너무 크다고 생각 될 경우 적합한 매듭 법이 하프윈저 놋트이다.
세미 윈저 놋트라고도 부르는 이 매듭 법은 가는 넥타이를 맺을 때 매듭 이 가늘고 길게 되는 것을 피하고자 할 때 적합한 매듭이다.
윈저 놋트는 매듭 중심에서 대검을 좌우로 2회 걸지만 하프윈저 놋트는 이것을 한번만 거므로 매듭 의 볼륨감이 윈저 놋트 보다는 다소 작다. 한쪽에만 대검을 걸기 때문에 좌우를 균등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각 과정에서 꽉 조여야 할 필요가 있다. 생지가 두꺼운 넥타이는 윈저놋트와 거의 같은 볼륨감을, 심지를 넣지 않은 것 같은 얇은 넥 타이는 플레인 놋트 같은 심플함을 연출 할 수 있는 매듭 법이다. 단정하고 깔끔한 이미지로 비즈니스 정장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매듭법중 하나이다.
       
 
  윈저 놋트의 경우와 같이 두꺼운 넥타이는 매듭이 크게 되므로 피하는 것이 좋다.
 
 
  보우타이를 내는 방법 중 가장 손쉬운 방법 중의 하나이다.
원링 놋트라 부르는 것은 매듭 후 고리가 하나만 생기는 것에 연유한다. 매듭 후의 상태는 타이가 수평한 일직선이 되지 않고 한쪽으로 약간 기 울여지게 된다. 이것이 이 매듭의 특징이며 멋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에나 잘 어울리는 매듭으로 는 볼 수 없으며 가까운 동료들의 파티등에 적용하기 에 적당한 매듭이다. 이 매듭의 장점의 하나는 타이의 소재, 종류에 구애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카라부분이 허전할 때 스카프나 치프, 리본 등을 이용해서 자신만이 타이를 연출해보는것도 개성 있는 패션 연출을 위한 지혜이다.
       
 
  보통의 보우타이로 충분하지만 목뒤에서 길이 조정이 가능한 타입의 보우타이가 적격이다. 매듭의 끈부분이 너무 짧거나 길면 검선이 밑으로 쳐기지게 되어 이 매듭의 장점이 반감되므로 주의
 
 
  세계적인 베스트 드레서 였던 영국의 윈저공이 창안한 넥타이 매듭 법으 로 폭이 넓은 매듭이 특징이다.
윈저공 (1936년 에드워드 8세로 즉위했으나 미국인 이혼녀 심프슨 부인 과의 사랑으로 국민적 반대에 부딪쳐 10개월만에 왕위를 버리고 윈저공 이 됨)이 왕세자 시절 당시 궁정 외교가 성행하여 친선사절로 세계 각지 를 돌아다녔는데 그의 옷차림은 신문과 잡지 그리고 귀족 영화를 통해서
세계로 퍼져나가 강렬한 인상을 남겼었다. 그가 한번 입었던 옷차림은 그것이 점잖은 것이든 파격적인 것이든 그대로 정석으로 받아들여져 당시 귀족은 물론 세계 비즈니스맨들에게 대 유행되었다. 이 윈저 놋트도 윈저공 자신이 즐겨 입는 스프레드 칼라(Spread colla)셔츠의 깃 사이를 정리하 기 위해 이 매듭을 고안했다고 전해지지만 정작 윈저공 자신은 이것을 부정하였다한다. 윈저 놋트가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역시 브리티시 스타일이다. 매듭이 역간 수평으로 퍼지는 매듭법이므로 특히 윈도우 칼라에 잘 어울린다. 얼굴이 비교적 길거나 턱이 홀쭉한 서구인들이 얼굴모양을 짧게 보이게 하기 위한 매듭이다.
       
 
  대검을 걸칠 때 조르는 상태를 양쪽 걸린 부위의 조임이 균등한 상태를 유지 할 것. 또 매듭이 너무 크면 품위가 없이 보이게 되므로 두꺼운 넥타이는 피하는 것이 좋다. 매듭의 밑쪽 중심에 하나 또는 두 개의 딤플을 만들면 매듭자체가 주는 강한 인상이 보다 부드러워 지고 여유 있어 보인다.
 
 
  비즈니스 슈즈가 아닌 캐주얼 슈트나 주말에 드레스다운을 즐길 때 사용되는 매듭 법이다.
매는 법은 플레이 놋트와 같다. 플레인 놋트로 넥타이를 맨 후, 대검과 소검을 좌우로 뻗쳐 놓는다.
통상의 플레인 놋트에서의 매듭은 밑을 향하여 원추형을 만들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좌우로 잡아 당겨서 원추형을 반대로 향하게 한다. 이로써 대검과 소검은 좌우로 나누어져 나란히 내려지게 되는데 이런 작업으로 보통의 넥타이가 변해 유니크한 것으로 변신하는 모양은 정말 감동적이다. 넥타이를 사용한 드레스다운은 어느 정도 패션에 흥미를 가지고 있으면 바로 생각이나는 테마이 기도 하며 평소와 다른 새로운 느낌을 연출 할 수 있다.
       
 
  대검과 소검이 거의 같은 길이가 되게 매도록 한다. 진즈의 차림에 맞추거나 닛트 폴로의 칼라에도 잘 코디네이트되며 전체적으로 와일드한 느낌을 나타낸다.
 
 
  더블크로스 놋트는격조 높은 중후한 느낌을 주는 매듭 법으로 유럽의 신사들이 애용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의 특징은 뭐니뭐니해도 매듭부분에 있다. 교차되어 균형을 이룬 Z형 매듭에서 넥타이의 섬세한 풍요로움이 살아 난다 하겠다.
매듭법은 큰 날을 좌우한번씩 감은 후 그 위에 다시 두 번 감은 후 감은 매듭 속으로 넣어 앞으로 내린다. 이 매듭법을 사용하면 옷깃이 꽉 조이는 느낌이 들게 되므로 착용감을 크게 느끼게 한다. 와이드칼라셔츠나 깃을 높이 세운 레귤러칼라의 드레스셔츠에 잘 어울리며 윙 칼라의 셔츠에 적 용하면 보다 격조 높은 세미 포멀함이 연출된다. 무지 넥타이 또는 화려한 모티브의 실크 타이에 잘 어울린다.
       
 
  매듭 위에 넥타이가 교차하고 있는 것을 잘 보이도록 조절할 것 매듭이 여러 겹이 되므로 너무 두꺼운 넥타이는 피하는 것이 좋으며 타이의 폭도 넓은 것보 다는 좁은 것이 적합하다.
 
 
  넥타이 매듭 법 중에서 가장 오래전부터 있어 왔던 매듭 법이다
17세기, 화려함이 즉에 달했던 루이 14세 시대에 생겨난 매듭 법으로 당 시는 현재와 같은 보우타이가 아니고 오히려(차라리) 리본 타이에 가까 운 것을 맷다고 한다.
당시에는 낵타이를 매는 이렇다 할 매듭 법도 없었고 넥타이의 길이도 현재처럼 어떤 정도로 통일 되어져 있었던 것이 아니었으므로 멋쟁이들은 되도록 독특한 방법으로 매고자 했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갖은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는데 이 더블 베이직 놋트는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 한 것이었다.
       
 
  베이직 노트보다 고름을 하나 더 잡아매는 이 방법은 매우 세련된 브이 존을 연출한다. 특히 좁고 길쭉한 보우타이를 사용하면 멋지게 묶이는데 양끝의 처짐에 각별히 신경써야 한다. 양끝이 적당히 흘러 내리도록 묶는 것이 세련된 모양으로 만드는 방법이다.
 
 
  플레인 놋트의 변형 매듭 중의 하나가 발룬 놋트인데 매듭의 윗 부분 을 당겨 올려 부풀게한 것이 특징이다.
매듭 윗부분에 부풀어오르게 한다는 의미로 발룬 놋트라 부른다. 매듭 법은 플레인 놋트와 동일하다. 우선 플레인 놋트를 기본으로 매듭을 만든 후 꽉 조여 형을 완성한 후 윗 부분을 조금 당겨 올린 후 다시 매듭을 조이면 된다. 매듭이 느슨하게 되면 야무지지 못한 느낌과 싸구려 넥타이를 매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게되므 로 주의한다. 능숙하게 매면 매듭의 풍성함은 마치 열기구 같은 폼으로 만들어 V존의 즐거움을 넓혀준다. 열기구 같은 화려한 폼, 이것이 발룬 이라는 명칭의 뉴앙스이다.
19세기에는 당시의 셔츠의 크고 높은 깃에 어울리는 방법으로 실제로도 자주 사용 되었다고 한다. 보통의 플레인 놋트에서는 작아서 바란스가 나빠 좀더 훌륭한 매듭을 만들고 싶은 경우 에 유효한 매듭 법이다.
       
 
  매듭 윗 쪽 부분을 당겨 올릴 경우에 정 중앙으로 수직으로 당겨 올릴 것. 넥타이는 질이 좋은 약간 두꺼운 실크소재의 것을 사용하면 매무새가 깨끗하다.
 
 
  가는 넥타이 매듭 법으로 플레인 놋트보다도 작은 볼륨감을 나타내고 싶거나 심지가 부드러워서 쭉 펴지는 화사한 넥타이를 맬 때 적격인 매듭 법이다.
매듭 법은 플레인 놋트의 대검고리를 1회 더 감아서 2중 고리로 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2중 고리로 인하여 볼륨감도 어느 정도 나오고 매듭도 단단히 결속되므로 심플한 V존을 연출할 수 있다.보통의 비즈니스 슈트에 약간의 좁은 듯 한 롱 칼라 셔츠에 잘 어울리는 매듭으로 여가 에서 비즈니스까지 실용도가 높은 매듭법의 하나이다. 오히려 대단히 형태가 좋은 깃 언저리를 만들 수가 있다. 얼굴형이 두터운 사각형이나 긴 삼각형에 잘 어울린다.
       
 
  대검이 이중 고리로 되므로 첫 번째 고리가 두 번째 고리 밑 부문에 조금 보이게 된다. 이것이 이 매듭법의 특징이므로 그것을 감추기 위한 조정은 불필요하다. 오히려 이 작은 삐져나옴이 포인트이다.
 
 
  블라인드 폴드 놋트는 V존을 장식하는 넥타이 매는 법 중에서 넥타이 자체의 존재감이 가장 강하게 어필되는 넥타이 착용법이다. 이제까지 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V존을 형성하여 강렬한 이미지를 표현한다.
매는 법은 플레인 놋트 상태에서 대검을 매듭의 뒤쪽으로 돌려 앞으로 빼낸는 것이다.
이 매듭 법은 실제로 그리스의 해운왕 오나시스가 즐겨하던 넥타이 매듭 법으로 실용도 높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시험해보면 알겠지만 단지 조금의 변화도 이처럼 전혀 다른 V존의 연출이 가능하다. 이 매듭 법은 중후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싶을 때라든가 파티 등 모임의 자리에서 세 미 포멀 한 느낌을 나타내고자 할 때 적절한 매듭 법 중의 하나이다.
       
 
  이 매듭법은 스포티한 복장에서는 역효과가 난다. 또한 사용하는 넥타이도 보통의 가는 트래드 한 무늬의 폭이 너무 넓지 않은 넥타이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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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urblue > [퍼온글] 3.000원으로 만든 매일 반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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