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실 비치에서
이언 매큐언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그녀의 마지막 말, 특히 그 예스러운 구문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한밤중에 자다가 깨어나 그 말이나 그것의 메아리 같은 것을, 그 간절하고 회한이 어린 어조를 듣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 순간과 자신의 침묵을, 화가 나서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던 자신의 모습을, 자기가 어떻게 한 시간 동안 더 해변에 머물면서 자신은 지극히 건전하고 비극적으로 옳다는 구역질나는 자의식에 북받쳐 그녀가 자신에게 가했던 상처와 잘못과 모욕의 감미로운 맛을 음미했던가를 떠올리며 신음하게 될 것이다.

 

이따금씩 나도.

그때 조금 더 잘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모든 일들이 그렇지만, 사랑에 조금 더 인내하고, 이별에 조금 더 신중했더라면... 하는 후회.

 

하지만 조금 더 빨리 이별을 했더라면, 아예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후회도 한다.

 

이뤄지지 않은 사랑은 그렇다. 고통스럽다가도 후련하고, 잠시 어딘가로 치워놓았을 땐 아무렇지 않다가도 근질근질 다시 꺼내보고 또 후회하는... 결코 답이 나오지 않는, 시험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린 후에도, 시험이 끝난 후에도 잡고 끙끙대다가 기분만 망치는 그런 것이지 않을까? 지금의 나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글쎄. <체실 비치에서>라는 책을 내가 더 젊었을 때 읽었더라면 지금처럼 어정쩡한 기분은 아니었을 것 같다.

좀 더 나이들어 읽었더라면 어떤 나름의 답을 알고 읽었겠지?

에드워드 또한 그렇지 않았는가.

 

플로센스와 에드워드의 안타까운 줄다리기 부분은 읽는 내게 고통스러웠다. 순수하게 관찰자일 수가 없어서 힘들었다.

그리고 아련하고 회한 가득한 에필로그는 차라리 흐뭇하게 볼 수 있었다.

그들이 불행했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라, 그래도 나름의 생을 훌륭히 잘 살아냈지 않은가, 싶어서.

 

나의 그녀는 누군가의 플로렌스가 될지도 모른다.

나는 아니지만 당신은 언젠가 당신이 빛날 때 세번째 줄 중앙 9c 좌석에서 관객들의 박수와 환호성을 유도하는 당신만의 에드워드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

나 또한 나만의 플로렌스와 알콩달콩 잘 살게 될지도 모르지.

 

그래서

 

내가, 혹은 당신이 했을 법한 마지막 말

 

"미안해. 에드워드. 진실로 미안해."

 

그 예스러운 구문이 앞으로 살면서 몇 번이고 서로를 괴롭혀도, 우리는 그걸 그대로 각자의 마음에 품고 잘 살도록 하자.

'우리' 라는 말은 이제 어색하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런 이야기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이세욱 옮김 / 비채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상한 기분이다. 분명 내가 태어나기도 전 가보지도 못한 나라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내겐 비슷한 추억이라고 할만한 것도 없는데도, 읽는 내내 아련하고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왜일까. 알레산드로 바리코의 책을 처음 읽었지만 나는 이 책을 계속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이 책을 읽는 동안 누군가도 나를 들여다보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부끄럽기는 커녕 고마웠다. 누군가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으니까.
 

 


길.

 

 길과 인생을 결부시킨 책. 세상에 수없이 많은 진부한 이야기와 노래들. 하지만 바리코의 <이런 이야기>의 주인공, 울티모의 길은 그렇지 않다. 목적지가 없는 길, 거창한 어떤 곳으로 통하는 길, 유혹과 방황이 가득한 길 등 시작과 끝이 있어야 한다는 강박으로 가득 찬 길이 아니라 완성된 하나의 서킷. 여러 개의 굽이들이 그 길을 지나는 사람의 여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그런 길이다. 주인공 울티모는 길에 심취한 남자, 오직 평생을 그런 길을 만들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산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목적에 병적으로 집착하거나 미련을 남기지 않았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았고, 누구의 이해도 바라지 않았다. 세상에 자신의 결과물을 드러내고 싶어 안달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하고 싶었던 것을 했고 자신만의 길을 이루었다. 그것이 울티모라는 인간의 강한 의지의 산물, 신이 내려준 재능과 영감에 사로잡혀서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 것보다는 노래하는 새들, 집을 짓는 개미들, 물을 거슬러 오르는 고기들 같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였다. 설명하기 힘들지만 그래서 더 아름다운 어떤 본능 같은 것. 울티모에게 길의 완성은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음악.​

 

​알레산드로 바리코의 <이런 이야기>는 울티모의 어린 시절, 카포레토 회상록, 엘리자베타, 잉글랜드의 시닝턴, 천 마일 레이스 크게 다섯 부분으로 각 장이 나누어져 있다. 각 부분의 화자는 조금씩 다르고, 그 분위기도 다르다. 같은 작가의 작품이 맞나 싶을 정도로 파격적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절묘하게 연결되어 있다. 울티모가 인생의 굽이굽이들을 담아 하나의 길을 완성했다면, 바리코는 그 굽이들을 글로써 묶고 있다. 그리고 그 글과 함께 흐르는 듯한 음악이 이 책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든다.

 

울티모의 어린 시절은 순박하고 유머러스한 분위기가 마음을 따스하게 한다. 카포레토의 이야기는 비극적이고 슬프지만 결코 어둡고 처절하게 그리지 않았다. 엘리자베타의 일기는 그 악의적이고 불순한 생각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음산함과 위태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하지만 그런 불안함이 뒤에서는 반대로 울티모와 엘리자베타를 더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게 만들고 울티모의 길을 마주한 엘리자베타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이 모든 것들이 너무나 아름답다. 키득거리면서 읽을 수 있는 부분과 때로는 말로 형용하기 힘든 벅찬 울림까지... 한 권의 책에 소박함과 웅장한 어떤 것들이 동시에 들어있으면서 전혀 이질감이 느껴지질 않다니. 알레산드로 바리코라는 작가에게 흠뻑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야기.

 


 이야기에 끊임없이 죽음이 등장하고,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으며, 성공담과 안정된 삶에 대한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이 책이 전체적으로 주는 느낌은 낭만적이고, 우아하고, 풍족하고, 멋있다. 어둡지 않다. 울티모도 엘리자베타도, 인간을 타락시키거나 억누르는 가장 큰 적인 '돈'에게서 자유로웠기 때문일까. 울티모는 그때그때 만났던 삶의 굽이들을 사랑하고, 기억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만을 추구했다. 엘리자베타는 비록 평생 자신의 길을 갖진 못했지만 울티모를 찾는 여정 끝에서 그의 길과 만나, 그의 음악을 들어준 유일한 관객이 될 수 있었다.

 

길이란, 삶이란 무엇일까.

 

열정이 집착처럼 보이지 않고, 과거에 대한 그리움, 사랑이 미련이나 후회처럼 보이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내가 살고 있는 인생이 초라해보이지 않고, 현재의 삶 속에 가득한 강박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꿈.

 

꿈이다.​

 

울티모가 끝까지 지켜 자신의 길에 담은 꿈에 나는 내 삶에 대한 어렴풋한 희망을 가져본다.

 

한 폭의 그림이 되기 위해서, 한 편의 시와 노래가 되기 위해서, 하나의 길이 되기 위해 살았던 소박하지만 위대했던 그 소년의 꿈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The Wes Anderson Collection (Hardcover) - 웨스 앤더슨 콜렉션 Wes Anderson Collection 1
Matt Zoller Seitz / Harry N Abrams Inc / 201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처음 봤는데 정말 인상적이네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병든 사회에 살고 있다. 내성과 저항성을 갖춘 건강한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미시시피 미시시피
톰 프랭클린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왜 구매 아이콘이 안 붙을까... 저 이거 샀다구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