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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맨 앤드 블랙
다이앤 세터필드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처음에 읽었을 때는 감흥이 별로 없다가,
뒤늦게 영화 퍼스트맨을 보고 나서 이 책 생각이 많이 났다.
이럴 때 참 신기하다.
어떤 책은 읽을 당시보다 한참 지난 후 혹은 완전히 잊고 살다가 불현듯, 아니면 다른 뭔가를 접했을 때 본래보다 이미지가 강해지곤 한다.
그럴 때는 코끝에서 어떤 향기가 어른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선명한 눈빛과 마주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야기에도 잠복기가 있는 건지 아니면 애초에 어떤 촉매가 필요한 건지 모르겠다.
그 자체로 재미있었을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도 물론 들지만.
아니다. 인생이 재미있는 건 이런 복합적인 경험의 중첩이 만들어내는 층층의 미학 때문일지도 모른다. 무조건 일단 많이 읽어두어야 하는 이유이다.
영화 퍼스트맨은 스트레스를 굉장히 많이 주는 영화다.
닐 암스트롱을 '달에 가장 먼저 간 사람' 정도로 알고 극장에 갔던 나로서는 '어떻게' 거기까지 가게 되었는지를 보는 과정 내내 고문이었다. 라이언 고슬링의 뭘 생각하는지 모를 표정도 고통이었고, '왜' 그렇게까지 해서 거길 가야 하는지 신경질이 났다.
'관'을 연상시키는 우주선의 안과 밖, 흔들리는 포커스, 엔진 굉음 다 고통.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달이 펼쳐지는 장면에서 할 말이 없었다. 전율.
하지만 그게 전부 감동이었다고는 결코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고독할 수 있는, 아주 외로운 장소 하나를 손에 넣기 위한 여정으로 보였기에, 그동안 인류의 그 모든 삶의 편편들이 다 슬픔으로 여겨졌기에.
닐 암스트롱의 개인 감정은 배제하고 생각해보면, 그는 철저하게 어떤 커다란 계획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곳에 선택의 여지는 없다. 시간은 어쨌든 흐르고, 조금 망설이면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 차례가 갈 테니.
아니 조금의 여지는 있다. 내가 하느냐, 마느냐는 결정할 수 있다. 하지만 충분히 생각할 시간은 없다.
소설 벨맨 앤드 블랙의 주인공인 벨맨 또한 그런 점에서 마찬가지이다.
딸의 죽음 이후 그는 뭔가에 홀린 듯 새로운 사업, 장례사업에 몰두하고(원래부터 그런 경향이 강한 사람이긴 했다. 적어도 작중에서 목표의식이 뚜렷하다는 점에서 <퍼스트맨>의 닐 암스트롱보다는 덜 스트레스를 준다) 누구에게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자신만의 계획을 기어이 실현시킨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서? 죽음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었을까? 그 상황에서 '죽음 장사'가 막대한 부를 가져다줄 거라 믿었을까? 아니면 그 모든 것이 지금까지 죽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예의라고 믿었을까?
아니면
그저 수행해야 할 어떤 '임무' 같은 것이었을까.
소설은 디킨스의 '크리스마스의 유령'을 연상시키지만, 그 결말은 완전히 비틀어놓았다.
삶의 교훈이나 메시지보다 더 강하게 다가오는 것은 '운명'이라는 이름의, 결코 인간이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이다.
'블랙'이라는 존재 자체가 벨맨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을지 아니면 오히려 삶을 더 혼란스럽게 하는 방해물이었는지는 지금도 알 길이 없다.
벨맨에게도 그 선택이라는 것이 '내가 하느냐'와 '내가 하지 않느냐' 정도의 것, 여지가 별로 없는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벨맨 앤드 블랙>, <퍼스트맨> 모두 아주아주 많이 외로운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들 스스로 자신이 그렇다는 걸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시간 그리고 운명은 빠르게 흐른다.
어떤 운명도 한 개인을 파괴하거나 행복하게 만드는 데에 큰 공을 들이진 않는다.
그리고 좋은 결과든 좋지 않은 결과든 거기까지 다다르는 시간에는 호의도, 악의도 없다.
죽음은 언제나 공정하고 당연하다.
하지만 삶은 흐른다. 계속되어야 한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짧은 생들을 계속해서 이어 붙이고 기워낸다.
그 필사적인 몸부림은 아주 먼 곳에서, 높은 곳에서 보면 모두 다 부질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존재는 아니지 않은가.
우리에게도 한 번은 힘든 선택을 내릴 날이 오겠지.
아니, 이미 선택의 기회라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뭔가를 골라버린 채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소설의 벨맨과 영화 속의 닐 암스트롱을 보면서 '뭘 저렇게 악착같이 살았을까' 싶지만
저렇게 안 살았다면 뭔가가 더 좋았을까 나은 모습이었을까를, 나는 잘 상상하기 힘들다.
소설 <벨맨 앤드 블랙>과 영화 <퍼스트맨> 모두 참 괜찮았나 보다.
이런 정답 없는 글을 무작정 계속 쓰고 있었던 걸 보면.
개미처럼 열심히 일해야지. 오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