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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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숲 - 죽음을 살아낸다는 것

'노르웨이의 숲'은 주인공 와타나베  사랑과 섹스, 죽음과 상실의 청춘을 기억하는 서사다.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읽었던 어린 시절의 나는 '한 변태 싸이코의 야한 이야기'로 일축하고, 무라카미 하루키 포함 일본 소설은 취향이 아니라며 매도해 버렸다. 작품의 분위기, 주제, 인물의 세세한 면모도 전혀 기억에 없어서 읽지 않았다고 말하곤 했다. 강산이 변하고도 남는 세월을 살고, 재회한 '노르웨이의 숲'은 달라진 제목만큼 전혀 다른 여운을 남겼다. 여전히 캐릭터들의 행동에 공감하기는 힘들다. 나라면 절대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어느 캐릭터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 왜 그렇게 섹스는 난무하고, 자살은 많이도 하는지- 우울하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존재에 '연민'이라는 감정이 짙게 베어든다. 불완전한 존재들의 방황이 나의 모습 어딘가에 진하게 투영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노르웨이의 숲'에서 죽음은 모든 등장인물의 삶을 관통하고, 작품의 서사를 이끄는 사건이다. 주인공 와타나베는 유일한 친구 기즈키의 자살로 죽음을 인식하는 계기가 된다. 죽음을 인식한다는 건, 불완전한 인간 실존을 깨닫는 일이라고 했던가. 아픈 기억을 지우려 하지만 선명한 인식으로 남으면서 그의 청춘은 방황한다.

삶의 한가운데에서 모든 것이 죽음을 중심으로 회전했다. P56

죽음은 남은 이들의 삶을 재편하고 서로의 유대를 다지게 한다. 기즈키의 여자 친구였던 나오코, 와타나베와 상실의 고통을 함께하며 사랑을 키우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아물지 않는 상처를 견디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한다. 와타나베는 또 한 번 상실의 아픔에 빠진다.

'죽음은 삶의 대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 잠겨 있다.' 그것은 분명 진실이었다. 우리는 살면서 죽음을 키워 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배워야 할 진리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나오코의 죽음이 나에게 그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어떤 진리로도 사랑하는 것을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 어떤 진리도, 어떤 성실함도, 어떤 강인함도, 어떤 상냥함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슬픔을 다 슬퍼한 다음 거기에서 뭔가를 배우는 것뿐이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또다시 다가올 예기치 못한 슬픔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p 529- 530

남아 있는 자에게만 죽음은 의미를 갖는다. 죽음은 삶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라는 사실, 어쩌면 우리는 죽음을 통해서 삶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안에 죽음을 잉태한 채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슬픔과 불안, 허무를 섹스로 채워보지만 자기 환멸만 남을 뿐, 방황하는 청춘에게 위로되지 않는다. 작가는 우울로 점철된 캐릭터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엉뚱하고 명랑한 미도리를 사랑이라는 가능성으로 남겨둔다.

타인의 죽음에 눈물을 흘려 본 적이 있었던가. 친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장례식에서 대성통곡하고, 다행히 아직까지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내 보내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겪어야만 하는 일이다. 어쩌면 죽음을 인식하는 삶이란, 허무하고 슬픈 일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와타나베는 미도리 아버지의 죽음을 추억한다.

“그가 오이를 씹을 때 내던 아작, 아작, 하는 작은 소리가 아직도 내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어. 사람의 죽음이란 아주 사소하고 묘한 추억을 남기는 것 같아, 하고” p389  

나오코가 힘을 내서 와타나베와 함께 기즈키를 추억하는 삶을 살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상실에 매몰된 청춘이 아깝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죽음을 살아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V 리딩투데이 선물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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