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 머리 앤과 함께하는 영어
조이스 박 지음 / 북하우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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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책, 요가, 커피, 여행 - 이 다섯 가지는 내 인생의 동반자다. 돌아가면서 잠깐씩 몰입하는 시간을 가진다. "빨간 머리 앤과 함께 하는 영어”를 읽으면서 "책"과 "영어"의 의미를 되짚어봤다.

일평생 목표했던 영어 실력에 도달하고 만족했던 기억이 없다. 나에게 관심은커녕 내 존재를 아는지 모르는지 확신조차 할 수 없는 대상을 짝사랑하는 기분-? 영어에게 느끼는 심정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요즘은 영어 원서를 읽으려고 노력 중이다. 세 권 정도 도전 중인데, 완독은 했지만 글자만 읽은 느낌, 중도 포기, 일시 정지 등 제각기 다양한 사연으로 지지부진하다. 이 책은 작품 전체를 원어로 읽어야 하는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시도하기에 딱이었다. 작가가 인상 깊게 느꼈던 영문 표현에 사유를 덧붙여 에세이 형식으로 풀어낸다. 빨간 머리 앤에 대한 향수와 문학적인 영어 표현, 작가의 섬세한 통찰이 어우러져서 밀키트처럼 편리(?) 하다. 간편하게 영어를 즐기는 감각도 제법 괜찮다.

초등학생 때는 "빨간 머리 앤"에 빠져 산 기억이다. 그때는 독서가 아닌 KBS에서 방영한 만화 영화와 외화 드라마를 시간 맞춰 시청했다. 당시 내 볼 가득 빽빽했던 주근깨가 자랑스럽고 좋아할 수 있었던 것도 앤 덕분이다. 지독하게도 앤이랑 동일시하면서 좋아했었다. 스치는 바람결에도 설레고, 춤추는 나뭇잎에도 상상을 더하고, 반짝이는 햇살 한 조각으로 한참을 조잘거리는 앤을 오랜만에 만났다. 너무 반가워서 레이저로 옅어진 양볼의 주근깨가 짙어져도 괜찮다고 생각할 뻔했다. 한때는 앤과 동일시했던 시절도 있었는데, 앤과 멀어진 세월 동안 불필요한 상상은 통제하고, 감정은 절제하는데 익숙한 어른이 되어버렸다.

감정에 서툴러져 버린 마릴라와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앤,
이제는 모두가 내 안에 존재하게 되었다.

"But If you call me Anne please call me Anne spelled with an E."
하지만 저를 앤이라고 부르실 거면 E 자로 끝나는 앤으로 불러주세요.

"What difference does it make how it's spelled?" asked Marilla with another rusty smile as she picked up the teapot."
철자를 어떻게 쓰든 그게 무슨 차이가 있니? 마릴라가 찻주전자를 집어 들면서 또 한 번 어색한 미소를 띠며 물었다.

“이 책에 묘사된 마릴라의 ‘rusty smile'은 평소에 미소를 잘 짓지 않아 미소 짓는 데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짓는 어색한 미소를 가리킨다. ’어색한 미소‘라고 번역하면서 'rusty'라는 단어를 통해 떠올릴 수 있는 뉘앙스들은 사라져버렸다. 한동안 쓰지 않아 녹슨 것같이 삐걱거리며 억지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상상하게 만드는 원문의 뉘앙스가 말이다. 원래 번역문을 읽는 것은 우비를 입고 샤워를 하는 것과 같다고 누군가가 말한 바 있다. ’어색한 미소‘라는 번역을 보면, 우비 입고 샤워한다는 것이 어떤 심적인지 이해가 된다.” p26-27

재기 발랄한 앤의 이야기에 한없이 빠져들던 어린 시절과는 달리 일부는 마릴라 아주머니처럼 어색한 마음과 미소로 읽기도 했다. 그만큼 세상을 살아내느라 바빠서 잃어버린 조각들을 깨달은 기분이다. 그래서인지 "rusty smile"이라는 표현이 유난히 잔상으로 남는다. 녹슬어 버린 감정들이 내 마음을 삐걱거리게 했던 건 아닌지, 작가의 친절한 설명으로 문학적인 영문 표현의 이해가 깊어졌다.


V 출판사 지원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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