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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과 허무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지음 / 빛과향기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사색은 임의로 불러낼 수 없다’는 쇼펜하우어의 말을 책장에서 읽기 전에 감히 이 책 제목인 <생존과 허무>에 대해 짧은 생각을 했다. ‘생존’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뉘앙스에서 어쩔 수 없이 사는 듯한.. 맹목적으로 살기 위해, 마지못해 사는 그렇게 아둥바둥 거리며 생존을 위한 생활을 영위하다 막상 삶의 끝자락에서 다가오는 ‘허무’한 짧은 인생의 시간이라는 제목에서 쇼펜하우어의 특유의 염세적인 색깔이 묻어남을 알 수 있었다.

70년의 인생을 산 쇼펜하우어의 인생론인 이 책의 키워드는 <고뇌><생존><허무><생물의 삶><죽음><생성><행복><재물><결혼><철학><사색><이론><학자><저술><예술><독서><법과정치><처세><명예><명성><인격>으로 인간의 근본적인 생사에서부터 쇼펜하우어가 겪었던 학자로서의 삶의 관점과 당시 사회구성원 중 고독한 역할로 쇼펜하우어의 주변관계의 사실을 통해 느낀 회고록이라는 느낌이다. 쇼펜하우어의 대표작 Die Welt 민 Wile und Vorstellung과 Parerga und Paralipomena에서 발췌해서 우리말로 옮긴 것으로 옮긴이가 말하고 싶은 바를 쇼펜하우어의 글을 재구성하여 쇼펜하우어의 말을 빌린 듯한 인상을 받았다.

어찌됐건 염세주의자로 대표되는 쇼펜하우어가 바라보는 세상과 인간의 삶에 대한 기록은 첫 장 <인간과 삶> 중심으로 하여 옮긴이의 구성대로 4가지의 부분[행복과 사랑][사색과 학문][자신과 처세][명예와 명성]으로 인간과 삶의 뼈대에 살을 붙여 전체를 이루고 있다.
고통과 고뇌의 연속인 인간과 삶에 대해서 이미 받아들인 삶으로써 행복과 연결시키려는 규범을 짜내어 제시하고 있다는 프롤로그를 시작으로 몇 백억년 전에도 존재하지 않고 몇 백억년 후에도 존재하지도 않는 인간과 삶의 중심에서 전체를 이루는 부분으로 행복과 사랑, 사색과 학문, 자신과 처세, 명예와 명성의 목차로 구성된 이 책에서 규범을 이끌어 삶을 받아들인 인간에 대한 생존방법과 어쩔 수 없이 사는 인간에 대한 연민을 느끼게 한다.

인생은 생존을 위한 괴로운 투쟁의 연속이며 인간이 그토록 이루고 싶은 개인의 목적에 도달하는 순간 향락은 사라진다는 허무함이 짙게 묻어난다. 인간이라는 존재와 인간의 모든 노력은 결국 없음(無)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며 채울 수 없는 목마름과도 같은 욕망. 욕망과 만족사이에 제한적으로 선택하는 인간의 우매함과 사악함. 세균이 우글거리는 치즈를 현미경으로 봤을 때 미세한 벌레들의 눈물겨운 활동과 싸움하는 모습처럼 인간도 하나의 티끌로써 아둥바둥하는 개체. 그저 존재를 움직이는 원동력으로 바로 생존을 갈구하는 마음이라 여기고 있다.

삶을 부정하며 허무주의가 짙은 쇼펜하우어이지만 200년 전의 고통과 고뇌속의 쇼펜하우어의 고민이 지금에서 더 강한의미로 다가오는 의미가 무엇일까. 이러한 물음에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한게 아닌 어떻게 사느냐의 질적인 문제를 살펴보게 한다. 강한 부정은 긍정의 효과로 나타나듯이 쇼펜하우어의 깊은 허무는 지금 생존하는 것 이상의 삶의 의미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삶의 가치를 찾게 하는 힘이 된다. 삶을 그저 선택된 자들의 향유로 보기에는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은 이면을 생각하게 하여 좀 더 현실에 가까운 면을 바라보게 한다.

기쁨을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슬픔이 있기 때문과 백(白)은 흑(黑)이 있어 더욱 희게 보이듯이 삶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아 앞면의 생존은 뒷면의 허무와 함께 늘 따라오는 하나이다. 동전자체가 삶이라는 양면성의 인정에서 허무를 받아드릴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단지 생존에서 시작해서 허무로써 끝나지 않는 삶.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강한부정에서 생겨나는 긍정의 힘을 가지게 하는 매력이 쇼펜하우어의 인생론이다.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 이해하고 인정하는데서 고뇌와 고통으로부터 조금은 벗어난 자유로운 해방감이 든다.

희노애락의 고만고만한 삶에서 삶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여유로움과 지금 고민하고 고뇌하고 고통이 있는 건 내가 현재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려준 200년 전의 자신의 불행을 후에 존재하는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기록한 쇼펜하우어의 존재에 대해 난 감사하다.

부정할 수 없는 삶을 긍정으로 이끄는 힘은 바로 ‘나’의 존재 이유에서 비롯된다는 쇼펜하우어가 그토록 말하고 싶던 깊은 허무 속에 숨겨진 축복의 인생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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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뇌의 힘 100% 끌어올리기 - 일도, 공부도, 머리가 한다
쓰키야마 다카시 지음, 이민영 옮김 / 케이펍(KPub)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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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두뇌능력이 경쟁력이다.

머리가 좋은 사람은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을 이기지 못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해석이야 어찌됐건 위 문장을 책의 메시지로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은 뇌에 체계가 생기도록 규칙과 습관을 만들려는 행동이고
<즐기는 사람>은 체계가 잡힌 틀에서 의식하지 않고도 능수능란하게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첫 문장과 달리 이 둘의 전제에는 머리가 좋아야 가능하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책의 부제에서 확인할 수 있듯 일도, 공부도 머리가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책은 두뇌능력을 향상시키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사람의 신체는 움직일수록 발달하기 때문에 두뇌 또한 마찬가지로 트레이닝을 통해 얼마든지 발달할 수 있다 전한다. 트레이닝의 시작은 15가지 습관으로 제시한다. 요약하면 전두엽은 두뇌의 지휘관으로서 사고력, 판단력, 표현력 등을 관장하는데 전두엽의 체력을 길러야 앞서 언급한 능력이 발달한다. 두뇌체력을 기르는 방법은 규칙적인 습관, 집중-휴식-워밍업의 사이클을 만들고 충분한 수면과 적절한 식습관, 표현력으로 대변되는 말하기 등으로 패턴을 두뇌에 인식시키는 것이다.

어쩌면 뻔한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규칙을 가지고 있고 사고 체계를 가지고 있는가’ 자문해서 ‘아니오’ 라고 말한다거나 이것조차 귀찮다면 책은 분명한 진단을 내린다. 게으름을 극복하는 전두엽의 체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진단 후 처방은 의외로 사소한 부분에서 시작한다. 작은 집안일부터 시작하여 정리정돈을 하고 몸을 움직이면서 전두엽의 기초체력을 기르고 행동 규칙을 만들어 자신을 관리하는 생활 매뉴얼을 작성하며 귀로 듣고, 눈으로 보며, 입으로 말하면서 전두엽의 기능을 서서히 올리는 일이다. 말 그대로 컴퓨터처럼 입력과 출력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는 말이다.

입력은 첫 부분에 언급했던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으로 표현할 수 있다. 뇌에 규칙과 습관을 인식시키기 위해 반복해서 체계를 만들어 나가는 행동이고,
출력은 <즐기는 사람>으로 체계를 활용해 언제든지 응용할 수 있는 능수능란한 행동으로 비유할 수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입력이 없으면 출력도 없다. 입력을 했는데도 출력이 되지 못하다면 입출력 방법이 잘못되었거나 체계가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책의 목적이 바로 체계를 잡기 위한 사고습관을 제시하는데 있다.

두뇌 발달을 위한 대단한 법칙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것이다. 하지만 기초체력을 기르지 못한 채 마라톤을 뛸 수 없듯 기본에 충실하면서 두뇌에 사소한 습관을 자연스럽게 새겨보는데 방향을 말해준다. 능수능란은 기본기가 갖춰진 상태에서 가능하기 때문에 열심히 노력하는 단계를 넘어 즐기는 사람이 되기까지 단계가 필요하다. 책은 의욕을 갖고 시작했지만 금새 지칠 수 밖에 없던 지난 생활을 되돌아보게 한다.

저자는 말한다.
일을 시작하고 공부하기 전 책상부터 깔끔히 정리정돈하고 시작해보자. 눈을 움직이고, 말을 하고, 손을 움직이고, 몸을 움직여라.
지휘관인 두뇌는 움직일수록 발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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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동행 - 인생의 가르침을 준 스승과의
오쇼 라즈니쉬 지음, 손민규 옮김 / 비전비엔피(비전코리아,애플북스)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 동상이몽(同床異夢)


오쇼가 누군지 나는 모른다. 책의 짧은 저자 소개를 보며 오쇼가 인도, 미국, 그리스, 영국 등 여러 나라들로부터 추방당하거나 입국을 거절당했다는 사실에 두 가지로 짐작해보았다. 하나는 테러분자나 사회체제를 반하며 선동하는 자로 또 하나는 사회를 움직일 만큼 영향력을 가질 정도로 대단한 인물일거라는 일말의 단서를 갖고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이유가 궁금해졌다. 인간의 역사 중 종교라는 신화를 바탕으로 지금까지 어떠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국난 극복에 대한 합일점을 갖으며 단합내지 왜곡된 분열의 토대가 된 것이 종교였다. 물론 미성숙한 인간을 바른길로 인도하고 교화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인간을 넘어선 완전한 존재에 대한 경외감과 그와 닮으려는 의지를 갖고 자신의 영혼을 정화하려는 목적과 현실을 넘어설 수 있는 위안이 종교이기도 하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지는 최대의 권리, 즉 자기 자신일 수 있는 권리를 방해하려 한다는 생각과 오쇼가 종교의 신화에 대해 인간들이 만들어낸 가십거리로 치부하며 종교의 근본을 흔들려한 존재이기 때문에 각국으로 부터 추방당하거나 입국을 거절당했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들어가는 말에서 짐작을 할 수 있었지만 그 생각은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서 어는 부분은 인정을 하되 부분, 부분이 이룬 전체에 대해서는 모순점이 많아 쉽게 수긍할 수 없었다.

첫 장의 ‘신은 죽었다’ 니체의 말을 인용하며 ‘신’이라는 단어를 버리고 그냥 실체 또는 존재라고 불러도 상관없다는 말과 함께 신앙이란 교활한 마음의 발명품이지 신앙을 통해 삶이 무엇인지 안다는 착각에 빠짐으로써 위안을 얻고 실제적인 문제들을 회피하지 말라는 내용과 설교, 신학, 사색하는 것보다 모순과 갈등의 삶 속에 직접 뛰어들어 체험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여기서 사람을 위해 종교가 존재하는 것이 아닌 종교를 위해 사람이 존재한다는 본질에 대한 현실에서의 주객전도 입장을 갖는 오쇼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철학 사조로 본다면 오쇼는 경험론자이며 보다 현실적인 입장에서 첨언을 한다면 A라는 것을 직접 부딪쳐 이루지 못한 것을 B라는 다른 것에서 위안을 받아 자기합리에 빠지지 말자는 말이다.
오쇼가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하시디즘(경건함과 순수함이라는 히브리어로 은총을 의미하는 hased 명사에서 유래)으로 삶의 경험이 균형을 일깨워주고 그 중간 지점에 초월할 수 있는 무엇이 있다며 치우침 없는 중심(금욕-탐욕사이, 세속에 물들음-세속을 등짐사이 등)을 가져야 한다는 마치 중용의 덕이 진리를 얻는 최선의 방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치우침 없는 중심 즉 어떤 면에서는 관조자, 또 다른 면에서는 방관자의 위치일 수 있는 위치에서 오쇼는 이도저도 아닌 자신의 논리에 자신이 빠지는 오류를 많은 부분에서 나타나내고 있다.

종교에 대한 오쇼의 관점

앞서 ‘신’이라는 단어를 버리고 ‘존재’ 또는 ‘실체’와 ‘내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신의 전체성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며 신을 부정하는 사람은 자기본위적인 사람이라는 생각, 그리고 종교가 사람들을 위선자로 전략시켰다는 주장으로서 종교를 부정하면서도 ‘신’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는다. 사원, 상(像), 의식으로 하여금 반복적인 광고에 최면이 걸린 듯 세상 종교는 모두 최면을 거는 방식으로 신자를 모으며 히틀러의 ‘거짓이 반복되면 진실’이라는 미명하에 종교를 부정하고 있다. ‘신’에 대해서 부정하지는 않지만 절대적인 존재로서 보지는 않는다. 신의 인내심을 인간이 태어나는 10개월에 대해서 신이 절대적이라면 인간을 10개월 동안 기다리게 할 필요가 있을까 라며 신에게 시간의 개념이 없다는 비아냥이 묻어난다. 하지만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사이의 시간적 구성이 다를 수 있다는 아직 입증되지 않은 사실에 대해 성급한 판단이 아닌가 생각한다.

종교를 넘어 궁극적인 진리를 얻기 위해 명상을 통해 개인적 성찰의 경험을 중요시하고 있다. 이는 곧 집단적 믿음이 아니라 철저한 개인적 경험에 대한 성찰로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설교자를 훈련시키는 것을 어리석은 일이며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예수에 대해 설교를 계속하며 그들은 단 하나의 의문도 제시하지 않는다고 비판을 하며, 이슬람교의 마호메트에 대해 코란의 노래는 다른데서 오는 것이 아니며 교육이나 지식에서 오는게 아니라 무심의 상태에서 온다고 여기고 있다. 하지만 그 말은 경험을 중시하는 오쇼의 전제와 앞뒤가 맞지 않다. 경험이 있기 때문에 무심으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풍파를 겪은 사람이 작은 것에 놀라지 않듯이 말이다. 경험을 두 가지로 나누어 볼 때 간접경험과 직접경험이 있다. 직접경험은 말 그대로 몸소 겪은 일을 말하며 간접경험은 지식이나 정보를 통해 체득하는 것을 말한다. 하여 훈련이 곧 시뮬레이션에 의한 간접경험이며 간접경험은 경험을 이루는 하나의 구성이기 때문에 교육이나 지식, 훈련을 부정하는 오쇼의 입장에서 모순이 발견된다.

또한 오쇼는 종교에 대해 논란을 불러올 수 있는 경중을 따지고 있는데 붓다와 마호메트가 가지고 있지 못하지만 ‘나는 예수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의 예수는 세상에 사랑을 전한다’가 그것이다. 종교의 경중정도를 따지는 오쇼는 갈등과 모순만 만들어 낼 뿐이다. 동시에 종교의 경중정도에 따라 ‘신’에 대한 수직적 위치를 가늠하고 있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말이다. 치우침 없는 중심에 서서 좋고 싫음을 판단하지 말라는 오쇼의 주장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보는 부분이다.

오쇼가 보는 인간의 전제

이미 깨달아 있지만 미처 자각하지 못했을 뿐, 깨달음을 갖고 있는 완전한 인간이지만 아직 미성숙한 인간으로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다는 오쇼의 인간에 대한 전제를 하고 있다.
깨달음을 방해하는 것으로 에고(ego: 이기심)로 보고 있다. 에고는 목적을 가짐으로써 긴장하게 되며 소유욕 등 구하고자 하는 욕구 모두를 에고로 여기고 있다.
생각이 에고를 낳고 에고는 의심만을 할 뿐 신뢰를 알지 못한다. 신뢰할 때 에고는 사라지고 모든 종교는 믿음과 신화, 사랑을 통해서만 신의 사원으로 들어 갈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에고를 버리는 것, 즉 아무것도 구하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며 미래를 꿈꾸지도 않고 과거를 집착하지도 않는 것이 해탈이자 순간의 깨달음이 된다는 오쇼의 주장이다.
또한 깨달음 방식의 하나인 돈오(頓悟)는 일정한 차례나 수행의 형식적인 단계를 거치지 않고 단번에 깨우치는 것을 말하는데 오쇼는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날, 마음을 더 이상 쥘 수 없게 되는 날 돈오는 일어나게 된다고 말하고 생각자체를 모두 잡스럽다하며 생각이 사라질 때 본질이 떠오른다고 하며 생각을 버릴 것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오쇼는 돈오자로써 목적 없이 그저 방관자적 입장으로 세상을 살아왔는지 되묻고 싶다. 스스로가 돈오를 기억하도록 자각할 수 있도록 돕는 위대한 스승이라 자처하면서 자신이 한말에 대한 변명을 찾고 있는 건 아닌지 말이다. 스승의 역할은 깨달음을 상기시키는 것일 뿐 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라는 말과 길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대를 깨우는 수행은 존재하며 수행은 인격을 닦는 것과 관련이 없지만 수행은 의식을 깨우는 것과 관련있다는 붓다의 말을 빌려 자신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수행방법을 명상으로 소개하며 명상은 순수의식이며 명상을 통해 내부의 눈을 뜨고 꿈 자체를 부정하며 꿈은 내면의 잠재되어 있는 외침의 표상이며 깨달은 사람은 꿈을 꾸지 않는다고 변명하고 있다. 깨달은 사람은 윤회하지 않으며 다시 육체를 가지고 태어날 필요가 없다며 자신이 태어난 이유에 대한 변명을 세상의 스승의 역할을 위해 태어났다 자부하고 있는 듯 했다. 위대한 스승이 중요하며 스승에 대한 믿음이 그토록 중요하다며 자신의 역할에 대한 정당성을 구하고자 하고 있다.
완전하지만 아직 미성숙한 인간을 전제로 깨우치는 역할을 하는 자가 스승이며, 방법은 명상이라 주장하는 오쇼는 개인의 성찰을 중요시하지만 집단의 스승으로 존재하기를 바라고 있다.

오쇼의 모순

오쇼가 쓰는 단어 대부분은 극히 세부적이고 단편적인 생각만 전해주고 있어 반감이 든다. 집중하지 말라는데 명상의 집중단계를 친절히 설명해주고 있으며 노력하려는 것 자체가 에고로 치부하며 에고하지 말라한다. 역설이지만 모순이다. 이도저도 아닌 치우침 없는 중심이 이런 것인가 아니면 이쪽으로 가서 보고, 다시 저쪽으로 가서 보고 온 것이 중심이란 것인가 라는 의문점이 든다.
궁극적인 진리로 가는 방법으로 자기수양의 길, 깨달음의 길로 설명하고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시간적 구분을 강하게 반대한다. 과거, 현재, 미래를 나누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으로 깨어난 사람은 과거와 미래로만 구분한다는 것이다. 현재는 시간의 영역이 아니고 초월의 영역이라 설명하고 있는데 현재는 ‘찰나’라 나는 주장하고 싶다.
위대한 스승들이 만든 진리를 사람들이 죽은 이론과 경전 속에 우겨 넣는다. 그러면 살아있는 진리는 종잇조각이 되고 만다. 진리를 말로 묶으려는 것을 경계하면서 단어의 미묘한 뉘앙스에 대해 자신의 주장을 단어에 묶고 설명하고 있다. ‘신뢰와 신봉’, ‘믿음과 희망’, ‘종교와 철학’, ‘모름과, 무지’, ‘지식과 앎’, ‘사랑과 집착’, ‘생각과 느낌’ 등이 그것인데 신뢰는 존재론적 경험에서 나오고 삶의 일인 반면 신봉은 관념과 사상, 경전, 철학이 가지고 오는 가짜요 거짓이다. 믿음은 교묘히 존재하는 것을 피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꿈꾸는 방법이고 희망은 내일을 미루는 길이다. 모름은 순수의 경지이고 무념의 경지인 반면 무지는 무엇을 무시하는 사람으로 종교는 집단으로 철학은 존재가 마비된 불구자로 허울 좋은 언어의 포장으로 끝난다고 주장한다. 또한 지식은 앎을 덮어버리는 존재로 과거로부터 축적된 것으로 보며 앎이란 현재에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철학을 실체의 세계를 망각하고 에고를 한껏 부풀려주기만 할뿐이라는 아무 도움도 안된다는 말과 머리에 온갖 생각과 사상들로 가득하고 언어의 층이 너무 두껍기 때문에 교수와 철학자, 신학자들은 들어도 듣지 못하는 이유를 언어의 속박성으로 들고 있다.
하지만 오쇼 스스로도 언어의 속박성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을 묶고 있으며 기존에 대한 일방적인 비판에 그치고 있다. 명상의 단어인 meditation을 약인 medicine의 어원과 같다고 설명하는데 이는 언어를 언어로 묶고서 명상에 대한 효과를 입증하기 위한 방법으로 어원을 따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지식이 앎을 방해한다하여 지식을 부정하는데 학습된 지식이 앎을 망각시키는 작용을 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제도화된 체제에서 지식이 앎을 방해한다는 부분에서 공감은 가지만 진리를 찾으려는 노력이 지식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과 1이라는 투입의 결과인 산출량 1이라는 전제하에 전환과정을 무시하고 있다. 즉 1이라는 투입이 전환과정(개인의 성찰)을 거쳐 2가 될 수 있고 3이 될 수 있으며 앎을 위한 근원을 이룰 수 있는데 말이다.

오쇼 자신에 대한 변명

사랑에 실패에 따른 여성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 그리고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사회에 대한 푸념의 또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다. 속세의 사랑에 관해 오쇼는 겉으로는 사랑에 대해 떠벌리고 노래를 부르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사랑을 두려워한다. 그대는 결코 사랑 속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으며 ‘나는 사랑하고 있다’고 느끼려는 대용품에 불과하다면서 사랑의 본질은 신뢰요, 에고(사랑에 있어서는 집착과 소유욕)가 녹아 없어지는 것인데 속세의 사랑은 상대에게 사로잡혀 집착이나 소유욕으로 왜곡된 사랑을 질시하고 있다. 또한 ‘남자는 여자를 무척 두려워 한다’고 주장하면서 온 세상이 사랑 천지인 것 같지만 그런데 세상은 왜 이토록 추하고, 왜 이토록 불행한 것인가 라며 한탄을 하고 있다. 오쇼가 아름다운 농담이자 보석중의 보석이라며 주의 깊게 듣기를 바란다는 내용이 수녀와 성폭행에 관한 것이었다. 여성 자신이 바라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으로 심리학자들로부터 검증을 받았다는 짧은 인용과 오쇼 자신도 적극 공감한다 주장과 함께 한 예로 여성과의 대화를 통해 확인했다고 자부하고 있다.
여성에 대해 불신과 함께 두려움이 묻어나는 오쇼의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듯싶다. 남자는 여자를 무척 두려워 한다는 말은 오쇼 스스로가 사랑의 실패에서 오는 불신이며, 동시에 성(性)에 관해서도 불신이 드러난다. 치우침 없는 중심에선 시각이 아닌 순진한 남성의 눈으로 여성에 대해 평가를 하고 있다.

또한 자신이 여러 나라들로부터 추방 또는 입국거절을 당하는 것에 대한 변명을 한다. 현재 사회를 부정하는 반사회적인 것은 정상이고, 지극히 사회적인 것은 비정상이라고 여기는 자신에 대한 합리화와 부모나 사회, 국가가 일정한 삶의 양식을 강요하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본성대로 살고 있을 것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개인성을 죽이고 순한양으로 만들고 싶다는 반감이 짙은 어조와 예수의 ‘의심하는 로마’, 붓다의 ‘공(空)’의 무한성을 설명할 때도 아무도 믿지 않았다며 오쇼가 주장하는 내용이 지금은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인정받을 것이라는 희망이자 갈망에 대한 불만과 푸념이 녹아 있다. 자신이 예수와 붓다, 마호메트 등과 같은 위치에 있는 위대한 스승의 역할로서 말이다.



나는 오쇼를 알지 못한다. 이는 어떤 선입견 없이 화려한 경력을 지닌 오쇼의 글 자체로 볼 수 있는 자세인 동시에 이 책 자체의 작은 부분으로 오쇼에 대해 이것이 전부인냥 여기는 일반화의 오류로 빠질 수는 자세이기도 하다. 역설의 방식을 취하지만 모순점이 많은 오쇼의 말 중 스승이 죽고 나면 곧장 달려가 사원을 짓고 사람들을 이용해 먹기 시작한다며 뭔가 집착할 대상을 사람들은 찾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벌써 제자(역자는 소요의 제자로 입문하여 스와미 쁘렘요잔(Swami Prem Yojan)이라는 이름을 받았다.)로부터 스승에 대한 어록을 남기는 작업인 언어로 묶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모순이 나타난다.
자신이 모신 스승에 대해 위대한 스승으로 한껏 높이며 수 십년 동안의 즉흥 강연회에서 오디오와 비디오 기록을 바탕으로 이 책을 만들었고 런던의 ‘선데이 타임즈(Sunday Times)'에서 20세기를 빛낸 위인 1000명 중 한명이 오쇼라는 소개와 미국의 작가 탐 로빈스는 “예수 이후 가장 위험한 인물”이라는 평까지 고스란히 책의 한 페이지를 할애하면서까지 소개하고 있다. 더욱이 마지막 페이지의 <오쇼 국제 명상 리조트(Osho International Meditation Resort)>를 홍보하면서 책의 가치를 반감시키고 있다. 진정한 제자의 모습보다는 자신이 모신 스승을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려는 세속적인 노력인 듯싶어 아쉬움이 든다. 위인 1000명 안의 오쇼와 리조트의 홍보페이지로 인해 지금까지 오쇼와 함께한 동행은 힘을 잃는 느낌이었다.
같은 내용이라도 어떻게 가공되느냐에 따라 설득력이 달라진다. 우리말로 옮김에 있어 왜곡된 부분을 감안하더라도 자신이 만든 허상 속에서 자라는 관념들을 기존의 높고 존경받는 존재의 신랄한 비판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높이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자 방법일지 모른다는 느낌을 자주 받곤 했다. 존경받는 인물에 대해 직접적인 비판을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싶은 욕망과 철학, 종교, 역사 서적을 다독하면서 나름대로의 논리를 정립한 사람의 세상에 관한 관념에 대한 글이 아니였나 싶다.
하지만 오쇼가 주장한 핵심인 치우침 없는 위치에서서 동행을 바라보려 노력했고 12가지의 우화를 토대로 인간과 사회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내용과 그에 대한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 역설과 모순에 대한 공감할 수 있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읽는 이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면에서 이 책은 권할만하다.

동행의 끝자락에서 난 오쇼(Osho)에게 되묻고 싶다.
진리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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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자이너 문화사 - 교양과 문화로 읽는 여성 성기의 모든 것
옐토 드렌스 지음, 김명남 옮김 / 동아시아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 거짓 없는 규칙 - The Origin of the World

먼저 말하지만 야하고 음란한 책이 아니다.
원색적인 가십거리로 이슈를 만들어 판매부수를 달성하는 책은 더더욱 아니다.

여성 자신에게 일어나는 몸의 변화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남성은 여성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이 책을 읽고 난 후
[여성은 여성 자신의 몸을 사랑하게 되고 남성은 여성을 존귀하게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 같다.

여성 스스로의 소중하고 예민한 존귀한 몸을 무지한 다른 사람에게 떠맡기기에는
너무 무책임하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동시에
남성에게 여성을 존귀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며
여성을 더욱 진정으로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책의 구성과 주제>

이 책의 주된 풀이는 여성 성기에 집중되어 있다.
성기의 명칭부터 시작하여, 성기 구조, 성기의 성적기능,
처녀성, 생식(임신과 출산)과 성의 문제, 성기구 등
1장부터 14장까지 예술과 문학적으로, 역사적으로, 지역마다의 관습,
여러 학자들의 논문 등을 집대성하여
상식을 넘어서 하나의 전문지식(생물학, 해부학 등)을 전해준다.
그렇다고 어려운 의학전공서적은 아니다.
때로는 문학의 부분을 인용하고 때로는 역사를 인용하며
그리고 오르가슴이라는 인간이 느끼는 최고의 감각이라 여기는 부분까지
인간의 본능에 대해 되짚어보고 본능을 좀 더 제대로 알고 이를 발전적 방향으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

남성보다 생식구조보다 복잡한 여성의 생식구조의 면밀한 관찰을 하게 하는데
생식구조의 형성부분부터 흥미롭다.
테스토스테론이라는 남성 호르몬이 없다면 모든 태아는 여성 생식을 지닌 육체로 발달한다는 사실이다.
아담의 갈비뼈에서 이브가 탄생한게 아닌 모든 아담이 한때는 이브였다는 사실.
그리고 성적욕구의 발생, 흥분기, 절정기에 대한 몸의 변화를 성기의 성적기능에 관하여 정리하고 있다.
성적욕구 발생과 만족이라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부분도
성기구를 이용한 또 다른 만족을 주는 방법도 외설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종교, 관습 등으로 왜곡된 판단의 기준이 된 처녀성에 대해 소설과 영화,
그리고 연구결과를 토대로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수정과 임신과정에 피임약과 불임과 건강한 아기를 낳을 수 있는 정자와 난자의 질적인 측면을 설명하며
실질적으로 인간의 생활에 필요한 성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거짓 없는 규칙>

코카콜라 병의 컨셉, CF의 섹시미 미학 등
여러 제품이나 마케팅으로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는 키워드는 바로 성(性)이다.
인간의 본능인 성적 욕구의 카타르시스라 할까? 성적인 연상 이미지를 전달하여
시각, 청각으로 받아들이는 자극에 대해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강렬한 인상을 받게 되고 이는 마케팅의 포지셔닝(positioning)기법 등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이렇듯 성(性)은 인간의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부분인 동시에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무수히 많은 감각 중
복잡하고 다양하여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감각이다.
또한 성적인 욕구이지만 단순한 쾌락에 집착한 행위로 취급하기에는
인간이라는 생명의 탄생과 또 다른 인간을 탄생시키는
숭고하고 신성한 근원적인 권리이자 의무이기도 한 것이
바로 성이자 성교이다.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소홀하며 쉬쉬했던 부분.
인간의 존립목적이자 존재형성 중 하나이기도 한 권리이자 의무에 대해
숨기기에 급급하고, 덮어버리는 역사가 대부분이었다.
성에 대한 무지가 종교적으로, 관습으로 이어져
왜곡된 성의 인식을 각인시킨 것이기에
이제 무지를 벗어나 자신의 몸을 알고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성을 안다는 건 자랑할 것도 과신할 것도 아닌
자신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게 하는
하나의 당연한 거짓 없는 규칙이라는 사실을 이 책을 보면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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