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
박유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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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용인과 경찰의 협조 아래 대대적으로 감행된 전대미문의 유괴 사업이자 인권유린 사태." 박혜진 평론가의 추천사에서 한 문장을 가져왔다.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해 잘 알지 못하던 내가 주관적인 해석으로 그 사건을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은희>는 형제복지원 사건을 중심으로 등장인물들의 행적을 조용히 따라간다. 소설은 태어나자마자 폴란드에 입양되어 자란 '준'이 생모에 대한 연락을 받은 직후부터 시작된다. 죽은 생모에 대해 알고 있는 여자가 아우슈비츠로 갈 거란 한 남자의 연락이었다. 준은 생모가 강간을 당해 자신을 낳았으며, 형제복지원이라는 곳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결국 한국으로 오게 된다. 이야기는 준, 그리고 다른 주인공인 '미연'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미연은 형제복지원의 생존자다. 다행히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형제복지원에서의 기억들이 그림자처럼 미연의 삶에 드리워져 있다. 미연을 찾아간 준은 자신의 생모인 '은희'에 대해 알려 달라고 부탁한다. 이 책은 준과 미연, 은희, 형제복지원 사건이 잊히지 않게 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병호, 그리고 형제복지원 사건의 가해자들의 기억들을 우리에게 펼쳐 보인다.

어떤 이야기들은 너무나 잔혹하기 때문에, 나는 가끔 거기에서 눈을 돌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은희>를 읽으면서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이 밤마다 끌려가 감옥이나 다름없는 수용소에 갇혔다. 굶주리며 일을 하고 폭행을 당하고 죽어갔다. 그렇게 죽은 사람들이 513명이라고 한다. 은희 역시 형제복지원에서 폭행을 당하고 사망했다. 미연이 은희의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는 말을 하는 장면이 있다. <은희>는 소설이다. 하지만 분명 우리가 살아온 현실에서도 어떤 사람들이 그렇게 죽어갔다. 누군가는 사람이 사람에게 해선 안 되는 일을 저질렀다. 이름을 빼앗고 이어 삶을 빼앗았다. 삶을 빼앗긴 사람들은 대개 무덤조차 갖지 못했다. 원장은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은희가 신부전증으로 죽었다고, 은희의 사인을 조작한 의사도 떵떵거리며 잘 살았다. 죽어간 사람들, 그리고 살아남았음에도 복지원에서 살았던 나날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과는 다르게. 위에 언급한 박혜진 평론가의 문장을 조금만 더 인용하고자 한다. 이 책의 띠지에 쓰인 문장이기도 하다. "<은희>는 우리에게 불행을 선사한다. 그러나 이 불행에 동참함으로써만 우리는 가까스로 30년 전과 다른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

<은희>는 읽으면서 즐겁거나 행복한 기분이 드는 책은 절대 아니다. 비극을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려낼 뿐이다. 자세한 내용이나 결말에 대해서는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다. 인물들이 걸어가는 길을 조금 뒤에서 따라가면서 읽는 게 가장 좋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며 한 번씩 긴 한숨을 쉬었다. 읽기 힘든 내용이 나올 때면 책을 잠시 덮어 두기도 했다. 그래도 결국 이 책을 끝까지 읽었고, 이 책을 읽은 걸 후회하지 않는다. 아니, 이 책을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책들은 우리가 절대 외면해서는 안 되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은희>를 읽음으로써 하나의 이야기를 외면하지 않을 기회를 얻었다는 사실이 기쁘다. 이 책은 기억되지 못한 수많은 삶을 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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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롱 사 먹는 데 이유 같은 게 어딨어요? - 90년대생이 말하는 90년대생 이야기
이묵돌 지음 / 메가스터디북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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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름이 낯설었다. '김리뷰'라고 하니까 그 사람이구나, 싶었다. 기성 세대의 입장에서 90년대생을 이해하고 분석하려고 했던 책 <90년생이 온다>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90년대생은 기성 세대와 다를까? 확실히 다를 것이다. 하지만 어떤 점에서 다른지, 왜 다른지, 기성 세대와 90년대생들이 그 차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마카롱 사 먹는 데 이유 같은 게 어딨어요?>는 90년대생 저자가 90년대생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기성 세대는 90년대생의 사고방식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궁금한 게 많다. 왜 그토록 목표하던 대학에 가자마자 온 몸에 힘이 빠진 것처럼 무기력해지는지, 왜 그렇게 들어가고 싶었던 회사를 금방 그만두려고 하는지, 왜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을 벌면서 한 개에 몇천 원이나 하는 마카롱을 사 먹는지. 왜 게임, 아이돌, 유튜브 방송 같은 데 시간과 감정을 그렇게 많이 쏟아 붓는지. 저자는 그런 현상을 깊이 분석하거나 자세히 파헤치지 않는다. 그냥 우리는 이렇다, 나는 이래서 이랬다, 같은 말투로 이야기할 뿐이다. 90년대생이라면 이 책을 읽으면서 당연히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성 세대에 속하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음으로써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못마땅한 감정을 누그러뜨릴 수 있을까?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다. 다행히 이 책에 대한 반응을 보니 저자의 이야기에 기성 세대마저 이해시킬 만한 힘이 있는 모양이다.

대학 가면 살 빠져. 대학 가면 예뻐져. 대학 가면 남자친구(여자친구) 생겨. 누구든 한국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더라면 이런 말을 안 듣는 게 더 어려웠을 것이다. 고등학생은 그렇다 치고, 초등학생에게도 좋은 대학에 가는 것만이 인생의 최종적인 목표이며 좋은 대학에 가기만 하면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것처럼 말하는 어른들이 있다는 건 정말 충격이었다. 누구나 나이를 먹으면서, 성장하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고민들이 있다. 내 얼굴이 너무 못 생긴 것 같다든가, 살이 너무 많이 찐 것 같아 걱정이라든가, 남자친구 여자친구를 만들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든가, 스스로가 문득 한심하게 느껴진다든가,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어른들이 그걸 인정해 주지 않는다든가. 이 사회가 '좋은 대학' 그리고 '좋은 회사'가 어린 세대의 그런 고민들을 한 방에 해결해 줄 치트키 같은 것인 양 말했던 게 사실이다. 그런 말을 듣고 자란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그런 말들을 정말 믿었다가 나중에 배신감을 느끼는 사람들, 그런 말들을 처음부터 믿지 않고 어른들에 대한 환멸과 실망을 느끼며 살아온 사람들. 그 배신감과 실망감, 환멸감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90년대생이 미래가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큰 이유 중 하나는 사회가, 어른들이 그들에게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식이다. 고작해야 마카롱쯤 되는 고급 간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 혹은 있었다는 것에서 퍽 대단한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런 게 우리의 밋밋하고 추레한 삶에 아주 작은 특별함이나마 부여해주는 것 같아서." 45페이지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우리는 왜 마카롱을 먹을까? 한 입에 사라져 버릴 수도 있는 간식은 어른들 눈에 낭비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가 말했듯 'SNS에 올린 사진은 사라지지 않는다'. 90년대생은 SNS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삶을 본다. 자신과는 처음부터 출발선이 다른 사람들, 내가 사 먹으려면 큰 맘 먹어야 할 만한 음식들을 아무렇지 않게 매일 먹는 사람들, 날이면 날마다 비행기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 말이다. 타인의 삶을 보며 내 삶이 초라해진다는 생각이 들 때면 그런 생각을 털어내려 하기 마련이다. 마카롱을 사 먹는 것 역시 그런 노력의 연장선일지도 모르겠다.

<마카롱 사 먹는 데 이유 같은 게 어딨어요?>는 긴 제목과는 상반되게 작고 얇은 책이다. 어려운 이야기를 하지도 않는다. 그 자리에서 한 번에 다 읽어 버린 다음에도 몇몇 페이지를 다시 뒤적여 보게 된다. 나만 이런 생각을 하며 사는 게 아니구나, 나만 이렇게 느낀 게 아니구나, 그렇게 공감하면서. 90년대생을 이해하고 싶은 어른들이라면 이 책을 읽어 보면 좋을 것 같다. 위로와 공감이 필요한 90년대생 당사자들에게도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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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될 줄 몰랐습니다
재수 지음 / 심플라이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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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의미로 이런 제목을 썼을까, 생각하게 되는 책이다. '이렇게 될 줄 몰랐다'라는 말은 부정적인 의미로도 많이 쓰이는데, 표지의 일러스트 속 가족의 모습은 행복해 보이니까. <이렇게 될 줄 몰랐습니다>는 저자인 '재수'와 저자의 아내인 '대장님', 두 사람과 세 고양이가 모여 만든 한 가족의 이야기다. SNS를 많이 하는 사람이라면 저자의 그림을 한 번 정도는 볼 일이 있었을 것이다(나도 본 적 있다). 저자 부부의 첫 만남부터, 서로를 사랑하며 더 좋은 사람이 되어 가는 두 사람의 모습, 고양이들과의 일상 이야기까지 빠뜨릴 내용 없이 재미있다. 에세이 형식의 글과 만화가 번갈아 가며 실려 있어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만화 장면을 찍어 올리지는 않을 생각이지만, 이 책의 주제를 관통하는 대사는 서평에 꼭 싣고 싶었다.

"이렇게 마냥 행복해도 되는 걸까?"

"그러려고 결혼했는데?"

혼자서 잘 살 수 있는 사람이 연애도 결혼생활도 잘 할 수 있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완벽하지 않은 개인들이 만나 서로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는 있지 않을까. 많은 이들이 내 삶을 행복으로 이끌어 줄 누군가를 찾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저자 부부는 그렇게 만났다. 서로의 다른 점을 알아가며 받아들이고, 상대방을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관계라니. 사랑하는 사람의 자존감을 올려 주기 위해 이유가 명확한 칭찬을 자주 함으로써 빛을 비춰 주었다는 '대장님'의 말이 마음 깊이 날아와 닿았다. 그런 가족이 있다면 일상의 시련들을 힘차게 이겨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대장님'은 꾸밈 없이 솔직하고 직설적인 성격이라고 한다. 처음에 저자는 그런 솔직함 때문에 상처를 받거나 마음앓이를 하기도 했다는 모양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내는 사람을 상대하는 태도가 건강하고 정직한 태도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내 거기에 익숙해졌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 부분을 읽으면서 조금 부러웠다. 있는 그대로를 꾸미지 않고 건강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상대방의 정직함을 믿기 때문에 상처 받지 않을 수 있는 사람도.

읽다 보면 왠지 마음이 찡해지는 이야기도, 웃음을 터뜨리며 볼 수 있는 이야기도 있다. 자리 잡고 앉아 한 번에 훌훌 읽어 버리기에도, 자투리 시간에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들어 몇 장 읽고 아껴 두기에도 좋은 책이다. 개인적으로 일상의 소중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들은 아무리 읽어도 질리지 않는다. 아마 그 책들을 만든 이들 각각의 일상이 비슷하면서도 조금씩은 다 다르기 때문이겠지. 이 책의 193페이지에는 '꽃밭을 일구는 사람'이라는 글이 있다. 누군가가 향유하는 모든 것들이 그 사람의 꽃밭이라는 말이 좋았다. 다른 사람의 '덕질'을 쓸모 없다거나 한심하다고 쉽게 말하는 이들을 자주 만난다. 무언가를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고 자신만의 꽃밭을 가꾸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는 내 꽃밭에 이 책 한 권을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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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소영 원장의 상처 주지 않고 우리 아이 마음 읽기
양소영 지음 / 믹스커피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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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부모는 부모로서 초보인 시기를 겪는다. 한 인간을 길러 내는 일은 반드시 고통을 수반한다. 부모로서는 최선을 다한다 하더라도 그 최선이 아이에게는 최선이 아닐 수 있다. 부모 또한 사람이기에 최선을 다하지 못할 때도 있다. 그렇다고 엄마도, 아빠도 처음이라는 말로 마냥 이해를 구하기에 아이는 너무 어리고 약한 존재다. <상처 주지 않고 우리 아이 마음 읽기>는 아이를 기르며 마주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며 아이의 문제는 사실 부모의 문제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행동을 일으키지 않는 아이는 없다. 그리고 그런 문제의 대부분은 부모가 아이의 마음을 제대로 알아 주지 못해서 일어난다. 아이가 지나치게 불안해 하거나, 감정을 제대로 표출하지 못하거나, 자신감이 없다면 부모는 아이가 왜 그런지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 책에 따르면 아이가 잘못된 행동을 한다고 해서 바로 질책하는 것은 별로 좋지 않다. 잘못된 행동을 하고 싶어하는 아이의 욕구 자체는 인정해 주고 나서 아이를 지도해야 한다. 예를 들어, 아이가 게임을 지나치게 오래 한다고 해서 아이에게 네가 게임 중독이라고 낙인을 찍는 건 아이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책에는 아이가 따돌림을 당하거나, 차별적인 혐오 발언을 하거나, 이성 교제를 시작했거나 할 때 부모가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은지 다양한 사례들이 나와 있다. 요즘 초등학교 교실에서는 혐오 발언이 아무렇지 않게 오가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자극적인 미디어에 노출되는 연령대가 낮아지면서 인터넷의 혐오 문화가 아이들에게 쉽게 물드는 것으로 보인다. 또래 아이들끼리는 물론이고, 선생님 등 어른들에게도 혐오 발언을 하는 아이들이 늘면서 아들을 둔 부모들 사이에서는 아이가 어떻게 여자를 차별하지 않도록 기를 수 있을지가 화두인 모양이다. 부모로서는 다소 당황스러울 수 있는, 유년기에 자위 행위를 하는 아이, 이상한 동영상에서 본 성적 지식을 남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아이의 사례들도 실려 있다. 아이들이 성에 호기심을 갖고 자신의 몸을 만지는 건 자연스러운 발달 과정이다. 아이들이 성에 관심을 갖고 성을 주제로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여기되, 사회적인 선을 지킬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다. 부모가 성에 대해 무작정 터부시하는 것은 오히려 좋지 않다고 한다. 바른 성교육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책에 대략적인 방향성이 제시되어 있어 참고하기 좋을 것 같다.

아이를 행복하고 건강하게 키우기 위해서 부모들이 지켜야 할 일들은 얼핏 보기에 간단한 것처럼 보인다. 아이의 감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기, 가족끼리 함께 식사하거나 대화하는 시간을 자주 갖기, 아이의 나이에 맞는 놀이를 하기 등 머리로는 우리가 대부분 알고 있는 일들이다. 하지만 아이는 부모가 정해진 행동을 하면 정해진 결과를 내는 컴퓨터가 아니라 한 명의 사람이다.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고,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며 뭘 원하는지 부모가 전부 알 수는 없다. <상처 주지 않고 우리 아이 마음 읽기>는 부모로서 최선을 다하기 위한 노력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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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희일비하는 그대에게
이정화 지음 / 달꽃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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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미술 시간에 서예를 잠깐 해 본 적이 있다. 벼루와 붓은 있었지만 먹을 직접 갈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쉽게 쓸 수 있도록 포장된 먹물 같은 걸 사서 썼는데, 책상이며 옷이 죄다 먹물 투성이가 되어서 집에 오면 한 소리를 듣곤 했다. 당연히 글씨를 잘 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떨리는 손으로 붓을 잡고 정해진 글자들을 써 내려가던 순간은 아직도 생생하다. 살면서 흔치 않았던 경험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일희일비하는 그대에게>는 서예가인 저자가 삶을 대하는 태도를 담담하게 써 내려간 에세이다. '서예 에세이'라는 조금 특별한 타이틀을 달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서예를 접할 일이 그리 많지는 않다. 현대인들에게 글씨를 쓰는 예술이라면 캘리그라피 쪽이 더 익숙할 것이다. 하지만 서예라는 단어가 가져다 주는 고유한 느낌이 있다. 고요하고 담담하고 잔잔할 것만 같은 느낌. 어릴 때 산만하고 집중력이 떨어지는 친구들은 바둑이나 서예를 배우곤 했다. 차분하게 글씨를 쓰다 보면 마음도 침착해질까. 저자의 글을 읽어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저자의 단정한 글을 읽는 순간에는 나 역시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저자는 꽃과 낙엽들을 모아 먹을 만들려고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 낙엽과 꽃들은 먹이 아닌 흙이 되어 버렸다. 먹 만들기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저자는 흙으로 글씨를 썼다. 흙으로 글씨를 쓸 생각을 했다는 점이 조금 신기하게 느껴졌다. 책을 읽다 보니 저자처럼 한 가지 일에 오랫동안 시간과 마음을 바칠 수 있었더라면, 싶은 마음에 저자가 조금 부럽기도 했다. 흔들리면서도 꿋꿋하게 붓을 잡는 저자의 모습이 멋져 보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저자가 행복하고 즐겁기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작품의 가치를 인정해 주지 않는 사람들, 힘든 현실을 마주하면서 지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아름다움을 갈구해야 하는 예술이 처절해야만 하다니, 처절하다." 라는 문장이 마음 아프게 다가왔다. 예술가는 인정받지 못하면서도 고고하게 살아가야만 할까? 많은 예술가들이 작품의 가치를 인정받으며 뿌듯하게 일할 수 있다면 좋겠다.

이 책을 읽기로 한 건 <일희일비하는 그대에게>라는 제목 때문이었다. 나는 하던 일이 잘 되지 않으면 기운이 빠지고, 하루가 조금 잘 풀리는 것 같으면 금방 또 붕붕 떠오른다. 그런 태도가 잘못된 건 아닌지 고민한 적도 있었다. 이제 사람들은 누구나 다 그러면서 산다는 사실을 안다. 저자 역시 내게 그 사실을 알려 준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다. <일희일비하는 그대에게>는 가벼운 마음으로 휘리릭 읽기 좋은 책이다. 군데군데 실린 사진들과 저자의 글씨들을 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일희일비하면서도 성실하게 붓을 잡고 오늘의 글씨를 써 내려갈 저자를, 그리고 다른 모든 이들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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