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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희일비하는 그대에게
이정화 지음 / 달꽃 / 2020년 5월
평점 :
초등학교 미술 시간에 서예를 잠깐 해 본 적이 있다. 벼루와 붓은 있었지만 먹을 직접 갈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쉽게 쓸 수 있도록 포장된 먹물 같은 걸 사서 썼는데, 책상이며 옷이 죄다 먹물 투성이가 되어서 집에 오면 한 소리를 듣곤 했다. 당연히 글씨를 잘 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떨리는 손으로 붓을 잡고 정해진 글자들을 써 내려가던 순간은 아직도 생생하다. 살면서 흔치 않았던 경험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일희일비하는 그대에게>는 서예가인 저자가 삶을 대하는 태도를 담담하게 써 내려간 에세이다. '서예 에세이'라는 조금 특별한 타이틀을 달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서예를 접할 일이 그리 많지는 않다. 현대인들에게 글씨를 쓰는 예술이라면 캘리그라피 쪽이 더 익숙할 것이다. 하지만 서예라는 단어가 가져다 주는 고유한 느낌이 있다. 고요하고 담담하고 잔잔할 것만 같은 느낌. 어릴 때 산만하고 집중력이 떨어지는 친구들은 바둑이나 서예를 배우곤 했다. 차분하게 글씨를 쓰다 보면 마음도 침착해질까. 저자의 글을 읽어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저자의 단정한 글을 읽는 순간에는 나 역시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저자는 꽃과 낙엽들을 모아 먹을 만들려고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 낙엽과 꽃들은 먹이 아닌 흙이 되어 버렸다. 먹 만들기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저자는 흙으로 글씨를 썼다. 흙으로 글씨를 쓸 생각을 했다는 점이 조금 신기하게 느껴졌다. 책을 읽다 보니 저자처럼 한 가지 일에 오랫동안 시간과 마음을 바칠 수 있었더라면, 싶은 마음에 저자가 조금 부럽기도 했다. 흔들리면서도 꿋꿋하게 붓을 잡는 저자의 모습이 멋져 보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저자가 행복하고 즐겁기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작품의 가치를 인정해 주지 않는 사람들, 힘든 현실을 마주하면서 지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아름다움을 갈구해야 하는 예술이 처절해야만 하다니, 처절하다." 라는 문장이 마음 아프게 다가왔다. 예술가는 인정받지 못하면서도 고고하게 살아가야만 할까? 많은 예술가들이 작품의 가치를 인정받으며 뿌듯하게 일할 수 있다면 좋겠다.
이 책을 읽기로 한 건 <일희일비하는 그대에게>라는 제목 때문이었다. 나는 하던 일이 잘 되지 않으면 기운이 빠지고, 하루가 조금 잘 풀리는 것 같으면 금방 또 붕붕 떠오른다. 그런 태도가 잘못된 건 아닌지 고민한 적도 있었다. 이제 사람들은 누구나 다 그러면서 산다는 사실을 안다. 저자 역시 내게 그 사실을 알려 준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다. <일희일비하는 그대에게>는 가벼운 마음으로 휘리릭 읽기 좋은 책이다. 군데군데 실린 사진들과 저자의 글씨들을 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일희일비하면서도 성실하게 붓을 잡고 오늘의 글씨를 써 내려갈 저자를, 그리고 다른 모든 이들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