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 헝거 게임 시리즈
수잔 콜린스 지음, 이원열 옮김 / 북폴리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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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거 게임>시리즈 영화를 올해 정주행했다. 강인하고 심지 굳은 주인공 캣니스 에버딘의 캐릭터는 참 매력적이었고, 캐피톨과 12구역 사이의 대립에 대해 묘사한 세계관 역시 보는 이를 흥미롭게 하는 탄탄함을 갖추고 있었다.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헝거 게임은 무고한 소년소녀들이 서로 죽이도록 만드는 잔혹한 시스템이다. 헝거 게임 시리즈를 보다 보면 그 잔혹한 시스템의 한 축을 떠받들고 있는 인물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 바로 판엠의 독재자인 코리올라누스 스노우다. 헝거 게임 시리즈에서 스노우는 잔혹하지만 거짓말은 절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는, 그리고 피와 장미를 동시에 떠올리게 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는 그 코리올라누스 스노우의 이야기다. 인정사정 없는 독재자인 스노우에게도 당연히 소년 시절이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치밀하고 잔인한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되겠는가.

헝거 게임 시리즈 프리퀄의 주인공이 스노우라는 건 좀 놀라웠다. 독자들이 좀 더 우호적으로 느낄 만한 다른 좋은 인물들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를 읽는 동안에는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에 대한 생각은 접어둘 수 있다. 스노우의 앞에 닥친 일들에 대해 생각하기에도 모자라니까. 코리올라누스 스노우는 한때 고귀했지만 지금은 완전히 몰락해 버린 스노우 가문의 마지막 남은 둘(나머지 하나는 그의 사촌 누이인 티그리스다)중 하나다. 나이가 들고 아무런 힘도 없는 그의 할머니, 가족을 위해 밤낮으로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 티그리스가 그의 가족이다. 스노우 일가의 세 명은 완전히 낡은 아파트에서, 그들이 몰락해 버렸다는 사실을 숨긴 채 살아간다. 그러던 와중 음식조차 풍족하게 먹지 못하며, 빈곤을 숨기는 게 급선무인 스노우의 삶을 바꿀 계기가 찾아온다. 바로 스노우가 제 10회 헝거 게임의 학생 멘토로 선정된 것이다. 헝거 게임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건 스노우 본인의 인생을 역전할 기회이자 가문을 재건하기 위한 시발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스노우와 짝을 짓게 된 조공인은 우승하는 데 가장 불리하다고 평가받는 12구역의 여자아이인 루시 그레이 베어드다. 스노우는 루시 그레이 베어드를 최대한 이용할 마음을 먹게 된다.

루시 그레이 베어드는 어딘가에서 구한 화장을 하고, 무지갯빛 알록달록한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다. 그녀는 스스로를 처음으로 보이는 자리에서 노래를 함으로써 모두의 주목을 끈다. 루시에게 음식을 구해다 주고, 루시의 삶에 대해 들으며 스노우는 점점 루시라는 인물에게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스노우 본인과 루시 모두를 위해 루시를 헝거 게임에서 우승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한편 학생 멘토들을 둘러싸고 이런저런 사고가 발생한다. 어떤 멘토는 헝거 게임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살해당하고, 어떤 멘토는 뱀에게 물려 끔찍한 독을 주입당하고 정신적으로 불안해진다. 구역에서 캐피톨로 이주했지만 여전히 자신을 구역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세자누스의 돌발 행동들 역시 헝거 게임의 분위기를 심상치 않게 만든다.

스노우는 루시 그레이 베어드가 헝거 게임에서 우승하게 만들 수 있을까? 헝거 게임이 끝난 뒤 스노우는 어떻게 될까? 이런 자세한 내용에 관해서는 서평에 쓰지 않는다. 하지만 독자는 스노우의 미래에 대해 확실히 알고 있다. 수십 년이 지난 후 그는 판엠의 독재자가 된다. <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의 재미있는 점은 바로 거기에 있다. 거의 대부분의 독자는 코리올라누스 스노우가 잔혹한 독재자가 되는 미래를 알고 있다. 그랬던 스노우에게도 누군가를 동정하고, 가족들과 사소한 행복을 맛보고, 사랑에 빠지고 달콤한 꿈을 꾸고, 갈팡질팡하고 초조해했던 과거가 있다. 소설을 읽다 보면 스노우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되는 부분이 적지 않다. 그럴 때마다 이런 소년이 나중에는 그 스노우가 된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씁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씁쓸함과는 별개로, 이 책은 헝거 게임 시리즈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훌륭한 선물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몰랐던 판엠, 캐피톨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 본편에는 나오지 않은 또 다른 매력적인 캐릭터들까지. <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는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좀처럼 놓을 수가 없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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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한 자매
카렌 디온느 지음, 심연희 옮김 / 북폴리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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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기억이란 우리가 믿는 것보다 훨씬 불완전하다. 기억의 불완전성에 다룬 유명한 작품으로 영화 <라쇼몽>이 있다. 같은 사건을 사람에 따라 다르게 기억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의 선후관계를 뒤죽박죽으로 기억하기도 한다. <사악한 자매>의 도입부는 그런 기억의 불완전성에 관한 내용이다. 주인공인 레이첼은 어머니를 죽인 기억을 가지고 있다. 레이첼은 어머니의 삶을 빼앗았다는 죄책감 때문에 15년 동안이나 스스로를 정신병원에 감금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어머니를 죽였다는 자신의 기억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사건의 진상을 찾아 정신병원을 떠난다. 소설은 현재 레이첼의 시점, 그리고 레이첼의 어머니인 제니의 과거 시점으로 번갈아가며 진행된다. 진실을 알기 위해 분투하는 레이첼의 현재와 서서히 진상을 드러내는 제니의 과거가 교차되며 독자의 마음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이렇게 시점을 교차하는 방식이 재미를 더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라고 느꼈다. 흥미가 고조되는 부분에서 내용이 다른 시점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뒷 내용을 알고 싶어서 책을 빨리 읽게 된다. 레이첼은 동물이나 곤충과 이야기할 줄 안다. 레이첼은 그런 자신이 잘못된 것이고, 사실은 병 때문에 동물과 대화할 줄 안다고 착각하는 건 아닌지 계속해서 고민한다. 독자의 고민도 이어진다. 레이첼은 정신적 병증이 있는 인물로 보인다. 레이첼이 진짜 자기 부모를 죽인 건 아닐까? 아니면 정말 다른 진범이 있는 것일까?

과거의 제니와 현재의 레이첼의 이야기가 각각 전개되면서 드러나는 한 인물이 있다. 바로 레이첼의 언니이자 제니의 큰딸인 다이애나다. 레이첼과는 9살 터울인 다이애나는 아름답지만 위험한 여성이다. 내용 누설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자세히 쓰지는 않겠지만, 제니가 다이애나의 어린 시절에 대해 서술한 부분을 읽고 있으면 가슴이 서늘해지고 손발이 차가워지는 느낌이 든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어린아이의 태연한 악의, 그리고 그 악의를 감당할 수 없지만 아이를 지켜야 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무서우면서도 안타깝다. 결국 레이첼은 어렸을 때 가족들과 함께 살던 숲 속의 집으로 향한다. 그 숲 속의 집은 분명 레이첼이 아름답고 행복한 기억들을 잔뜩 만들었던 공간이지만, 현재의 레이첼에게는 거대한 악의와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 곳일 뿐이다.

<사악한 자매>는 여름에 읽기 딱 좋은 스릴러 소설이다. 섬뜩한 분위기, 과거와 현재가 세련되게 교차하는 장면들을 보면 영화로 만들어져도 재미있을 것 같다. 수많은 야생동물들이 살아가는 숲,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고 뭐든 배울 수 있는 큰 별장. 제니는 그 숲속에서 하얀 곰 새끼를 목격하기까지 한다. 말로만 들으면 아이들을 키우기에 아주 이상적인 환경일 것만 같다.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는 제니 부부의 마음이 이해가 가서 그들이 맞은 결말이 더 안타까웠다. 살아남은 레이첼이 마주한 진실은 무엇인지, 숲 속의 집으로 돌아간 레이첼이 어떤 결말을 맞는지에 대해서는 당연히 적지 않는다. 누군가가 인터넷에 써 놓은 줄거리를 읽는 것보다 직접 읽는 게 몇 배는 더 재미있을 소설이다. 한 번에 훌훌 읽어버릴 수 있는 스릴러 소설을 찾는다면 <사악한 자매>를 읽는 건 꽤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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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차별주의자 - 보통 사람들의 욕망에 숨어든 차별적 시선
라우라 비스뵈크 지음, 장혜경 옮김 / 심플라이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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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들이 뭘 몰라서 저러는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결단코 단 한 번도 없는가?' 이 책의 표지에 쓰여 있는 문장이다. 양심적으로 고백하자면 당연하게도 한 번도 없지 않다. 나와 다른 의견을 갖고 있는 사람을 보고 그가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거라고 생각한 적도 많다. 물론 나만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가진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드물지 않을까? <내 안의 차별주의자>라는 제목은 그런 의미에서 참 적절하다. 차별주의적인 면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나를 포함해 거의 모든 사람들은(이하는 편의상 '사람들'이라고 줄여 쓴다) 자신과 다른 존재들과 자신 사이에 선을 긋는다. 나와 성별이 다른 사람, 나보다 나이가 많거나 적은 사람, 나와 사회적 계급이 다른 사람, 나와 다른 종교를 믿거나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을 그 선 바깥으로 밀어낸다. 그 바깥에 있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배척하거나 박해하지 않는다고 해도, 선을 긋는다는 행위 자체가 그런 차별의 시작이 될 수 있다. <내 안의 차별주의자>는 사람들이 어떻게 내 편과 네 편을 나누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책의 목차를 훑어보면 일, 성, 이주, 빈부 격차, 범죄, 소비, 관심, 정치라는 키워드로 내용이 분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일' 파트는 노동에 대한 내용이다. 저자는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말, 열정을 가지라는 말이 보여주지 않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많은 이들의 멘토가 되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이들은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건 그들이 좋아하는 일을 해서 성공을 거뒀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려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열정을 착취당한다. '열정 페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또, 육체적 노동과 정신적 노동이 분리되면서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종류의 노동을 하는 이들을 타자화하게 되었다. '성' 파트에서는 말 그대로 성차별에 대해 다룬다. 이 책은 노동 시장과 가족 관계 안에서의 성차별부터 시작해서, 남성과 여성이 차지하는 공간의 차이, 여성의 목소리 높낮이가 변화한다는 사실, 피임과 성행위에서의 불평등에 대해서도 짚는다. 사회가 남성에게 남성다움을 강요함으로써 남성과 여성 모두를 좋지 않은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중요한 사실에 대해서도 빠뜨리지 않는다. 다른 주제들에 관해서도 '소속 범주로서의 '우리'가 노동, 성별, 이민, 빈곤, 재산, 범죄, 소비, 관심, 정치의 영역에서 어떤 구조를 띠는지, 또 그 안에서 '남들'을 바라보는 독선적 시선이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살핀다'(서문,14p).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게 읽은 건 '소비'파트였다. 모든 사람들은 무언가를 소비하며 살아간다. 내가 소비하는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낸다. 하다못해 그냥 닭고기를 먹을지, 동물복지 닭고기를 먹을지, 닭고기를 먹지 않을지 선택할 수 있는 사람과 선택할 수 없는 여건에 놓여 있는 사람이 있다. 저자는 유기농, 동물복지, 공정무역, 친환경과 같은 의식이 담긴 소비가 사회적 신분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스와로브스키의 상속인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테라스에 채소를 심어 먹으면 된다'라는 조언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테라스에 채소를 심어 먹을 수 있는 시간적, 공간적, 경제적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존재하리라는 생각은 할 수 없었던 걸까? 덧붙이자면 나는 지속 가능한 소비에 분명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의식적 소비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소비하는 것을, 어떤 제품을 사는 것을 아예 포기하는 게 지속 가능한 세상을 만드는 길이라는 저자의 의견은 분명 생각해 볼 만하다. 친환경 기업에서 화장품을 열두 개 사는 쪽보다는 화장품을 사지 않는 쪽이 더 친환경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다른 기업에서 화장품을 열두 개 사는 쪽보다는 친환경 기업에서 사는 쪽이 더 낫겠지만. 어떤 기업들은 분명 자신들이 더 윤리적이라는 이유로, 더 친환경적이라는 이유로 소비를 부추긴다. 그런 소비를 하는 사람들이 '도덕적인 주체로서 돈이 없고 시간이 없으며 소비 문제에 무지한 사람들'(189p)을 무시하게 된다는 점은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독선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는 문장으로 이 책을 마무리한다. 다른 사람들이 나와는 달리 별 생각 없이 살아간다고 단정짓는 건 매우 쉬운 일이다. 그렇게 단정짓고 나면 타인에 대해 이해할 필요도 없고, 타인이 무슨 행동을 하든 한심하게 여기면 끝이다. 하지만 사람이란 그렇게 별 생각 없지도 납작하지도 않은 존재다. 내가 하는 행동에 이유가 있다면 다른 사람이 하는 행동에도 이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게 옳다. <내 안의 차별주의자>는 타인에게 조금 더 관대해지고 싶은, 그리고 자신에게는 조금 더 엄격해지고 싶은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되어 줄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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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로 나간 일기도둑 - 미취업 어른이의 세계 사람들 만난 이야기
박모카 지음 / 새벽감성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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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고 싶어도 마음처럼 잘 되지 않는 시기다. 평소에도 여행에 관한 책을 좋아하는 편인데, 요즘은 정말 여행 책을 읽는 게 삶의 낙 중 하나가 되었다. <세계로 나간 일기도둑>은 '프로 백수'를 꿈꾸는 저자가 세계를 돌아다니며 겪은 일들과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는 미국, 브라질, 모로코와 몰타, 러시아, 리가, 에스토니아 등 수많은 나라들을 여행했다. 즐거운 일을 겪기도 했고 별로 좋지 않은 일을 겪기도 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고 그 중에서는 친절하고 유쾌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잘 이해가 가지 않고 불쾌한 사람들도 있었다. 여행이 즐거운 일이라고 해도 여행의 모든 순간이 행복하기만 할 수는 없다. 이 책에는 여행 중에 겪을 수 있는 즐거운 이야기도 힘든 이야기도 있다. 혼자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는 저자의 모습은 용감하고 거침없지만, 때로는 그냥 평범한 청년 같기도 하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 저자가 조금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 책은 여행 정보 책이라기보다는 여행 에세이다. 하지만 저자가 여행을 다니며 얻은 소소한 팁이나 정보에 대해서도 잘 나와 있다. 크루즈 여행에 대해 설명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유럽 내에서는 크루즈 여행을 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이동하는 동안에도 배 안에서 즐길 거리가 많다는 게 장점이다. 크루즈 여행에 사용되는 배는 보통 17층 높이의 초대형 선박이라고 하는데 상상이 잘 가지 않는다. 그 정도로 큰 배라면 배멀미에 대한 고민도 좀 덜 수 있을 테니, 나중에 여행을 다닐 수 있는 시기가 된다면 큰 배를 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를 잡는 방법에 대해서도 여행지에 사는 누군가의 집에서 무료로 잘 수 있는 카우치 서핑, 다른 사람과 집을 교환해 숙박하는 홈 익스체인지, 단기간 동안 일을 하고 그 대가로 숙박을 하는 워크어웨이와 같은 방법들을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거의 모든 방법들을 적극적으로 시도해 본 모양이었다. 

 저자는 위에 말한 것처럼 다양한 나라를 여행했고 다양한 경험을 했다. 도중에는 브라질의 아마존 정글에서 7박 8일 동안 머물기도 했다. 여행사를 통해 아마존에서 생활하는 프로그램을 예약했는데, 요즘에는 온수도 에어컨도 잘 나오고 저자가 방문했을 때 벼락 때문에 인터넷이 끊겨 있었지만 원래는 인터넷 선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아마존에서 며칠 동안 지내게 된다면 인터넷 같은 건 되든 안 되든 그만이 아닐까. 처음에야 조금 불편하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자연 경관은 아름답고, 사람들은 느긋하고, 요리는 자연에서 구한 재료로 만들어진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도 있다. 투어 가이드가 지도나 시계, 나침반을 쓰지 않고 나무나 강의 흐름을 보고 길을 찾아간다는 것이다. 낚시를 하고 싶으면 어장이 아니라 그 물고기가 사는 곳으로 간다. 동물이 보고 싶으면 그 동물을 가두어 둔 곳이 아니라 그 동물을 부를 수 있는 곳으로 간다. '투어의 대부분이 환경은 내버려두고 이를 관찰하는 것'이라는 저자의 말이 재미있었다. 브라질에서의 경험들은 저자에게 천천히 즐기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항상 무언가에 쫓기며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 사람들이 깨닫기 어려운 즐거움이다. 

 <세계로 나간 일기도둑>은 정말 저자의 일기장을 읽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 주는 책이다. 가끔은 말하는 주제가 다른 곳으로 튀기도 하고, 누군가의 불평을 하거나 흉을 보기도 하고, 별로였던 도시나 별로였던 사람에 대해서는 별로였다고 말한다. 저자 자신의 버킷리스트나 저자가 해 봤던 다른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런 점이 조금 산만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나는 다른 사람의 시시콜콜한 이야기 듣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서 재미있게 읽었다. 여행을 떠날 수 없는 요즘 답답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시원하게 만들어 줄 만한 소탈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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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두 번
김멜라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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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섹스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소설을 읽은 건 처음이었다. 혹시나 오해를 살까 봐 첨언하자면 그런 소설이 지금까지 없었다는 게 아니라, 내가 그런 소설을 읽는 게 처음이라는 뜻이다. 인터섹스란 생식기나 염색체, 성 호르몬 등 신체적 특징이 남성 혹은 여성의 성별이분법적 구조에 정확히 들어맞지 않는 사람을 의미한다. 인터섹스에 대해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런 게 어디 있냐'와 같은 반응을 보이곤 한다. 거의 대부분의 인터섹스는 출생 이후 또는 성장 과정에서 남성 혹은 여성으로 정정당한다. 부모나 의료인이 외모 혹은 외부 생식기의 모양을 바탕으로 인터섹스 당사자를 남성이나 여성으로 편입시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인터섹스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남성이나 여성으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하여튼 인터섹스는 사회적으로 매우 소수이고 또한 약자이다. 소설집 <적어도 두 번>의 첫 번째 단편인 <호르몬을 춰줘요>의 주인공인 도림은 인터섹스다. 도림은 자신이 남성으로 살아가기를 결정하든 여성으로 살아가기를 결정하든 그 과정에서 매우 많은 돈이 들어갈 거란 사실을 알고, 그에 대한 대비책으로 몰래몰래 로또를 산다. 그(성별중립적인 표현으로 사용한다)는 자신이 여중에 가야 할지 남녀공학에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이 사회에서 인터섹스 당사자들은 그 자신으로 살지 못하고 다른 어떤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 저자가 도림의 고민을 아주 비참하고 처절하게만 그려 놓지 않았다고 한들 우리는 그 고민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간접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다.

 소설집 <적어도 두 번>에는 인터섹스뿐 아니라 장애인(단편 '적어도 두 번')이나 레즈비언(단편 '물질계') 역시 비중 있게 다뤄진다. 소수자들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소수자들은 자신들이 소수자임을 어디에서나 마음껏 드러낼 수 없기 때문에, 얼핏 보기에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약한 사람들은 그들에게 굳이 신경을 쓰지 않는 이들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단편 <홍이>에는 한 노인이 지하의 작은 방에서 고독사한 뒤 무려 7개월 가량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단편 <에콜>의 화자는 몇 년째 공시 준비에 매달려 있는 공시생이다. '좁고 가파른 땅 위에 최대한 많은 사람이 살 수 있게 만들어놓은 시멘트 무더기 같은 집'에 살면서 매일같이 옆집 여자가 전화하는 목소리를 듣는다. 옆집 여자는 손님에게 여자들을 보내고, 늙고 병든 부모를 부양한다. 단편을 읽다 보면 에콜의 사장이라는 옆집 여자가 어떤 일을 하는지, 그 여자의 삶이 얼마나 피로할지에 대해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얇은 벽 너머로 옆집 여자의 일상을 하나하나 들을 수밖에 없는 화자 역시 적잖이 힘들고 피로한 삶을 살고 있으리라 짐작 가능하다. 

 소설가 구병모는 이 소설집에 대해 '당신은 이 소설들을 가볍고 즐거운 마음으로는 읽을 수 없다. 이 책과의 만남이 편안하고 유쾌한 경험을 보장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전적으로 이 말에 동의한다. 이 소설집에 실린 거의 모든 단편을 읽는 내내 조마조마하거나, 불쾌하거나, 찝찝하거나 씁쓸했다. 하지만 누군가 내게 이 책이 싫었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 같다. 나는 이 소설을 읽고 싶었다. 정확히는 이런 소설을 읽고 싶었다. 이 책은 약하고, 불안하고,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성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이야기다. 나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어쩌면 우리가 상상조차 해본 적 없을 누군가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게 읽은 단편은 <모여 있는 녹색 점>이었다. 이 소설은 사전 정보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 호흡으로 읽어내려가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용에 대해서는 굳이 쓰지 않는다. 책을 읽는 데 걸린 시간보다 책을 읽은 뒤 이 책에 대해 생각한 시간이 더 길었다. 이 작가의 차기작이 나온다면 그 책도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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