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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두 번
김멜라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7월
평점 :
인터섹스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소설을 읽은 건 처음이었다. 혹시나 오해를 살까 봐 첨언하자면 그런 소설이 지금까지 없었다는 게 아니라, 내가 그런 소설을 읽는 게 처음이라는 뜻이다. 인터섹스란 생식기나 염색체, 성 호르몬 등 신체적 특징이 남성 혹은 여성의 성별이분법적 구조에 정확히 들어맞지 않는 사람을 의미한다. 인터섹스에 대해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런 게 어디 있냐'와 같은 반응을 보이곤 한다. 거의 대부분의 인터섹스는 출생 이후 또는 성장 과정에서 남성 혹은 여성으로 정정당한다. 부모나 의료인이 외모 혹은 외부 생식기의 모양을 바탕으로 인터섹스 당사자를 남성이나 여성으로 편입시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인터섹스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남성이나 여성으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하여튼 인터섹스는 사회적으로 매우 소수이고 또한 약자이다. 소설집 <적어도 두 번>의 첫 번째 단편인 <호르몬을 춰줘요>의 주인공인 도림은 인터섹스다. 도림은 자신이 남성으로 살아가기를 결정하든 여성으로 살아가기를 결정하든 그 과정에서 매우 많은 돈이 들어갈 거란 사실을 알고, 그에 대한 대비책으로 몰래몰래 로또를 산다. 그(성별중립적인 표현으로 사용한다)는 자신이 여중에 가야 할지 남녀공학에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이 사회에서 인터섹스 당사자들은 그 자신으로 살지 못하고 다른 어떤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 저자가 도림의 고민을 아주 비참하고 처절하게만 그려 놓지 않았다고 한들 우리는 그 고민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간접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다.
소설집 <적어도 두 번>에는 인터섹스뿐 아니라 장애인(단편 '적어도 두 번')이나 레즈비언(단편 '물질계') 역시 비중 있게 다뤄진다. 소수자들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소수자들은 자신들이 소수자임을 어디에서나 마음껏 드러낼 수 없기 때문에, 얼핏 보기에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약한 사람들은 그들에게 굳이 신경을 쓰지 않는 이들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단편 <홍이>에는 한 노인이 지하의 작은 방에서 고독사한 뒤 무려 7개월 가량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단편 <에콜>의 화자는 몇 년째 공시 준비에 매달려 있는 공시생이다. '좁고 가파른 땅 위에 최대한 많은 사람이 살 수 있게 만들어놓은 시멘트 무더기 같은 집'에 살면서 매일같이 옆집 여자가 전화하는 목소리를 듣는다. 옆집 여자는 손님에게 여자들을 보내고, 늙고 병든 부모를 부양한다. 단편을 읽다 보면 에콜의 사장이라는 옆집 여자가 어떤 일을 하는지, 그 여자의 삶이 얼마나 피로할지에 대해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얇은 벽 너머로 옆집 여자의 일상을 하나하나 들을 수밖에 없는 화자 역시 적잖이 힘들고 피로한 삶을 살고 있으리라 짐작 가능하다.
소설가 구병모는 이 소설집에 대해 '당신은 이 소설들을 가볍고 즐거운 마음으로는 읽을 수 없다. 이 책과의 만남이 편안하고 유쾌한 경험을 보장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전적으로 이 말에 동의한다. 이 소설집에 실린 거의 모든 단편을 읽는 내내 조마조마하거나, 불쾌하거나, 찝찝하거나 씁쓸했다. 하지만 누군가 내게 이 책이 싫었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 같다. 나는 이 소설을 읽고 싶었다. 정확히는 이런 소설을 읽고 싶었다. 이 책은 약하고, 불안하고,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성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이야기다. 나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어쩌면 우리가 상상조차 해본 적 없을 누군가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게 읽은 단편은 <모여 있는 녹색 점>이었다. 이 소설은 사전 정보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 호흡으로 읽어내려가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용에 대해서는 굳이 쓰지 않는다. 책을 읽는 데 걸린 시간보다 책을 읽은 뒤 이 책에 대해 생각한 시간이 더 길었다. 이 작가의 차기작이 나온다면 그 책도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