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일본이라는 사회는 늙었다고 흔히 이야기한다. 한국인으로서, 기자로서 바라본 일본은 더욱 그렇게 느껴질 만 하다.  객관적인 사실로 일본의 노년 인구 비율이 세계적으로 최고치라는 점에서도 늙었다고 할 수 있지만, 일본에서 성행하는 '업'들을 분석하는 시점에서 보기에도 일본은 늙었다. 정확히 말하면 늙은 자의 여유 같은 사업이
역설적으로 '뜨는' 비즈니스라고 한다. 도시재개발, 거울 없는 헬스장, 츠타야 서점, 전통시장 즉석 미팅, 잘 죽기 사업까지  늙음은 젊은 사람이 쓰면 부정적인 말이지만 글쎄 일본은 자신들이 늙었다는 걸 마냥 인정하기보단 오히려 즐기는 쪽인 것 같은데..

이 책의 주 요점은  한국보다 상대적으로 '늙은 사회'를 키워드로 잡은 일본 훑어보기 인 것으로 보인다.  표면적으로는 일본의 단단한 소비자층, 가장 경제적 기반이
있는 소비층이 (한국과 다르게) 50대 이상의 연장자층이다. 모든 비즈니스는 이 소비자층을 고려하지 않고는 성행할 수 없다. 집에 금고를 놓는다거나 자식들에게 퍼주지 않는 까다로운 장년층의 마음을 적시려면 보통의 감수성과 찌르기가 없이는 안된다,

손자를 키우는 할아버지를 타게팅으로 한 (이쿠지이) 마케팅 같은 예도 부록으로 나올 정도로 일본의 마케팅들은 한국의 눈으로 보기엔  지나치게 디테일하고 감수성 넘쳐 보이지만, 그 점은 일본에서 성공한 비즈니스들의 주된 공통점이다. 세분화되고 정확한 타게팅. 명확하게 타깃에게 그것을  보이지 않으면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다. 매우 쉬운 말인듯하지만 무엇보다도 어렵다. 일본의 다양한 제품군들, 이게 어떻게 다 팔릴
수 있을까 이렇게나 많은 푸딩과 맥주 종류가 있는데 ..이온 몰에 갔을 때 여러 제품들의 시장점유율을 걱정하는 나였지만, 이 책을 읽고 보니 얼핏 이해가 되었다.
시장이 그 디테일을 감당할 만큼 전부 세분화되어 있는 것이다. 디테일을 넘어선 디테일이라 할만하다. 각 푸딩과 맥주들이 그 자리에 진열되어 있을 수 있는 이유는
그 각각의 마니아층이 있기 때문에 그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라면 언제든 이익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모 애니나 십 년 넘은 아이돌 악수회 한정반도 매번 다 팔리는 거랑 비슷하다. 정말이지 다품종이 나올 수 있는 이유다.  소비자의 선택도 자유로워진다. 자본주의 시각에서 보면 삶이 풍요로워진다. 좋네. 마니아 사회가 일본을 살린다. 새로운 책 제목으로 하자..
 
이 책에서 나온 또 다른 성공 비즈니스들은 정신이나 몸이나 모두  건강한 삶에 대한 인간의 열망을 제대로 이해한 사례들이다. 사회 자체가 건강하기, 웰빙 하기, 곱게 늙기에 포커스라는 것, 이런 성향은 단발적인 한국의 웰빙 열풍과는 매우 다르다. 한국의 경우 아직 웰빙은 오히려 소수의 부유층 여성이 소비할 수 있는 일종의 과시로 보인다. 하지만 일본 사회는 웰빙이 의미하는 자체가 다르다. 살고 있는 목표 자체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잘 살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하지만, 아직 한국은  그것을 넘어선 열정적인 젊은 사람들이 많다. 한국의 젊은 세대가 '88만 원 세대'라며 슬퍼하고 좀 더 나은 직장과 직업을 호소하는 현재진행형인 반면,  일본의 젊은이들은 그런 거 아예 포기하고 그냥 가진 거에서 적당히 잘 먹고 잘 살자는 경향으로, 극단적으로 예로는 아르바이트하면서 적당히 벌고 유니클로 정도로 멋부리고 살수 있으면 된다는, 젊은이들의 마인드 자체도 '늙음 - 성장 종료'로 흘러가는 성향이 짙어지기 때문이다. 설날 때마다 한자와 나오키를 트는 건 어떨까..  즉 일본 사회가 '늙었다'라는 것은 단순히 늙은 '인구'가 많다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내용은 작년에 핫했던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에 상세하게 분석되어있다.

 

                                                                             
확실히 백 년 이백 년 뒤의 일본이라는 '국가' 의 미래는 확실히 장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국가 자체는 위기 일지라도, 다르게 분석하면 모든 국민이 '제너럴 리스트'가 된다는 의미 아닐까. 특히 뛰어남은 없지만 사회 구성원의 삶의 질, 만족도 개개별은 매우 상향 평준화할지도 모른다. 비즈니스 사례집의 사례에서도 결국 작은 공동체, 장년층의 움직임이 행정의 참여를 이끌어 낸다. 이것은 새로운 차원에서  '발전'적인 움직임이다. 모든 국가의 젊은층이 반드시 장년층을 걱정하거나 그들의 연금을 위해 헌신하는 마음가짐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젊은층이 세금을 내고 노후를 준비하는 게 힘들다고 하지만 일본 사회는 이미 충분히 그것에 대비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 자체를힘들게 느끼지 않는 것,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것대로 사는 것이 사회 풍조가 되는 것이다.

한국처럼 모든 국민이 대학교육을 받을 필요도 없으며, 대학교육을 받지 않아도 사실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만으로도 이미 우월성이 있다. 이미 세상은 발전할 만큼 발전했다.  내가 할 일은 알파고 같은 애들이 전부 대체할 수도 있다.(주르륵)  특히 일본처럼 먹고살기 이미 평준화된 국가에선 개인이 직업을 초월하는 다른 삶의 목적을 갖는 게 너무나 당연한 미래가 올 것이다. 지금의 모습은 그것의 일부에 불과하다.

개인의 삶에만 포커스 하는 것이 국가입장에서 경제성장에 좋지 못한 일이라고는 하지만 ,다르게보면  어차피 세상은 점점 국가 따위 어떻게 되던지라는 식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점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유럽이나 어느 지역의 육체적 젊은 사람들의 대부분 사상일 것이다. 매우 위험하다고 보는 혹자도 있겠지만, 이것이 뭐 우리나라가 식민지가 된다 해서 나라를 판다는  상놈의 짓을 이야기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것은 일종의 국경을 초월한다는 이야기이다.

스마트폰만 키면 어느 나라이던지 접할 수 있다. 어느 국가를 가도 명확한 문화적 진정성은느낄 수 없다. 다 이도 저도 짬뽕인듯하다. 이런 세상 속에서 대체 '국가','집단'의 소속으로 무얼 할 수 있나. 이 세상 속에 '나'에 집중하지 않으면 먹혀 버릴 것 같은데 말이다. 혼자 살기론, 개인주의, 외로워야 행복하다 등등 이미 한국에서도 이런 담론은 차고 넘친다. 이런 의미에선 확실히 일본과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다. 국경과 공동체의 진정성은 이미 뿌옇다. 희석되어 있다. 이런 시대의 모습을 가장 빨리 보여주고 있는 일본의 모습을 이제까지의 수직선에서 오른쪽으로 나아간다고 늙는다기 보다는 아예 차원 자체가 바뀌고 있는 것은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독의 매뉴얼 - 라깡, 바디우, 일상의 윤리학
백상현 지음 / 위고 / 201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라캉등 아직 낯설지만 그럼에도 제가 철학하기를 할수있다면 바로 이런책을 읽을때 가능한거같아요 .황홀한 경험이었습니다 다른책도 구입하려구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보고 난 뒤 이 책이 생각나서 다시 들춰 보았다. 사실 이 글은 책에관한 리뷰이기보다 본 영화를 보며 절묘하게 기억나는 무라카미 류의 발언을 생각한 글이다.  

 사랑에서 희생하는 쪽의 근원은 무엇일까. 그만의 해답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일본적인 것일까? 보편적인걸까?

 

 

 

 

이성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는 어떤 여자일까. 무라카미 류의 책중 < 자살보다 sex>에서 기억나는 구절이 있다. 

처음으로 돌아가보면 자신의 가정, 자신의 기원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그것을 마구 어필하는 여자들이다.

남자에게 있어서 자신의 '아버지'를 높게 어필하지 않는 여성만큼 쉬운 여자가 없다. 그 여자를 장악하기 위한 어떤 돌파해야 할 큰 벽 하나가 없는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에라는 논리이다. 그런데 소름돋을만큼 비슷하게 이 영화속에서도  나타나있다. 극중에서 마츠코는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다 스스로 튕겨져 나오고, 그 이후 수많은 남성들에게서  아버지의 부재를 채우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니 어떤 행동이든 과잉되고 표정마저, 그렇게 남자를 지치게 하며 스스로 '버려지는 삶'을 만들어 간다. 그 버려짐은 처음에는 자기연민에 의해 중독적이다. '버려졌다'는것은 이런 여인들에게 사랑에 의해 어떤 정점이 없었던 여성들에게 '나도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았었다'는 특별한 '삶의 사건- 이력'이 되고 누군가에게 '동정'받을 수 있는 자기파괴적인 성질이 된다. 점점 그것이 반복되며 자기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슬픔에 취해 그 안에 포류하며 우울해진다. 결국 내면 안에만 살아서 히키코모리가 되거나 자살한다. 어쩔수 없는 슬픈 결말.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사랑에 있어서 더 중요한것은 뭘까


과연 이런 여성들의 삶이 혐오일까? 남자의 시각에서 혐오?인것일까. 왠지 인정하기 싫은 부분이었다. 일본영화속에서

왕자님에 대한 판타지는 많이 있다. 가장 현실적이고 빼어난 영화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정도일까. 다른점이 있다면 이영화속의 여자는 이별 후 폐인이 되지 않는다. '버려짐'이 자기밖에서 살아갈 원동력이 된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을 것 같다. 아마 더 많을 것이다. 정말 알고 싶다 어느 쪽이 더 할지. 더한 자기연민에 빠지다가 더욱더 큰 보상을 바라며 자기안으로 갇히는 여자들말이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그런여자의 이야기이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마츠코의 일생을 혐오스럽다 하고 싶지 않다. 누군가에게 '주는게' 사랑인것. 여자는 사랑을 받아야만 하는 존재일까. 여자가 주는 사랑은 왜 구린 결말을 낳을까. 여자는 어차피 언젠가는 결합을 통해 희생할 존재이기 때문에 미리 희생할 필요가 없어서 일까?  진짜 목소리를 내고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은 보통 사랑을 '받는'이들일 확률이 크다. 그만큼 자신의 자존감의 크기와 확신이 그득그득 하기 때문에. 아마도 나카시마테츠야도 이런 여성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아본' 사람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런의미에서 이영화의제목은 여전히 마음에 안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알라딘 서재 개설 첫글로 한병철의 '투명사회'를 읽은 갑상을 적어본다.

 

인터넷윤리'라는 교양과목의 마무리과제로 쓴 글.

뚫어질듯 보이는 긍정적인 투명함이 사실 가장 잔인하고 강압적인 강제를 낳는다는 역설.

그안으로 들어가는것에 아무런 거리낌 없는 모습들을 생각하며 ( 블로그 ) ,.를 한다니

 

 

 

 

오늘날 우리는 무엇이든 쉽게 찾고, 알며 대가만 치룬다면 얼마든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고도화된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디지털이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인간적 경험, 위기, 부정 - 정반합의 순리가 제거되었으며 그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고 경계한다. 그것은 인간들에게 무기력함으로 나타나 투명성’ ,‘긍정성’ ‘비거리성의 양상을 띈다. 아무런 서사, 감정이 없는 지식은 한없이 투명하며 통제되어 있다. 사람들은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지나치게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하게 되어 거리가 존재하였을 때 있었던 은밀한 가치와 개인의 사생활은 사라진지 오래다. 결국 편리한 디지털화에 짓눌려 무기력함에 익숙해진 개인들은 더 이상 사회, 세계, 시대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에의 의지를 갖지 않게 된다. 그저 스스로를 전시하며 극단적으로 나르시시즘에 빠져 허우적대는 개인들만 남는 것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발달은 그저 디지털 소프트-하드웨어의 정교화에 한정되게 되며 그것은 더욱더 무기력함을 부추기는 것으로 반복된다. 이러한 무기력함은 인터넷을 그저 방대한 정보, 가산과 계산으로 얽혀있는 인간에게 주입되는 어떤 거대한 지대 - 빅데이터, 권력-로 더욱더 크게 확장해 낼 뿐 , 무기력과 편리함에 젖은 인간들은 그것을 점점 의식하지 않게 된다. 저자는 책의 마지막으로 나아갈수록 결국 경계해야하는 것은 인간들 스스로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판옵티콘에 무의식에 들어가 있음을 안도하며 그 안에서 스스로 자유가 전혀 아닌 자유를 느끼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우리사회는 어느 시대보다 더 거대한 통제사회로 역행한 것이다. 결국 인간이 수백년 역사를 통해 성취했던 민주사회 - 투표라는 정치적 영역마저도 무의미하고 좋아요를 누를수 있는 어떤 수많은 것들 중 하나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언제나 페이스북을 염탐하고 블로그포스팅의 반응을 살피며 트위터를 리트윗하며 하루의 많은 시간을 작은 테블릿 안에 집어넣는 나로서는 이 책이 염려하는 과도한 긍정에 대한 부정을 염두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나는 무엇을 하거나 부딫히기 이전에 인터넷을 이용해 정보를 알아보지 않으면 하면 안되고 섣부른 행동으로 생각하는 게 당연한 세상에 살고 있다. 눈앞에 보이고 클릭하고 모든게 투명한, 긍정적인 방향을 추구하는 수많은 인터넷 속 매체들. 그 안의 내용들은 분명 이면이 있을 것임을 의식하면서도 우리는 그저 방대한 정보들을 매일매일 흡입하기에도 바쁘다. 이면마저 생각할 여유나 카테고리 따위가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이런 역설과 이면에 대해 돌아보게 되었으니 디지털 세대에서 저자가 언급한 무수한 개인으로서 너무나 다행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