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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서재 개설 첫글로 한병철의 '투명사회'를 읽은 갑상을 적어본다.
인터넷윤리'라는 교양과목의 마무리과제로 쓴 글.
뚫어질듯 보이는 긍정적인 투명함이 사실 가장 잔인하고 강압적인 강제를 낳는다는 역설.
그안으로 들어가는것에 아무런 거리낌 없는 모습들을 생각하며 ( 블로그 ) ,.를 한다니
오늘날 우리는 무엇이든 쉽게 찾고, 알며 대가만 치룬다면 얼마든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고도화된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디지털이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인간적 경험, 위기, 부정 - 정반합의 순리가 제거되었으며 그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고 경계한다. 그것은 인간들에게 무기력함으로 나타나 ‘투명성’ ,‘긍정성’ ‘비거리성’의 양상을 띈다. 아무런 서사, 감정이 없는 ‘지식’은 한없이 투명하며 통제되어 있다. 사람들은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지나치게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하게 되어 거리가 존재하였을 때 있었던 은밀한 가치와 개인의 사생활은 사라진지 오래다. 결국 편리한 디지털화에 짓눌려 무기력함에 익숙해진 개인들은 더 이상 사회, 세계, 시대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에의 의지를 갖지 않게 된다. 그저 스스로를 전시하며 극단적으로 나르시시즘에 빠져 허우적대는 개인들만 남는 것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발달은 그저 디지털 소프트-하드웨어의 정교화에 한정되게 되며 그것은 더욱더 무기력함을 부추기는 것으로 반복된다. 이러한 무기력함은 인터넷을 그저 방대한 정보, 가산과 계산으로 얽혀있는 인간에게 주입되는 어떤 거대한 지대 - 빅데이터, 권력-로 더욱더 크게 확장해 낼 뿐 , 무기력과 편리함에 젖은 인간들은 그것을 점점 의식하지 않게 된다. 저자는 책의 마지막으로 나아갈수록 결국 경계해야하는 것은 인간들 스스로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판옵티콘에 무의식에 들어가 있음을 안도하며 그 안에서 스스로 자유가 전혀 아닌 자유를 느끼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우리사회는 어느 시대보다 더 거대한 통제사회로 역행한 것이다. 결국 인간이 수백년 역사를 통해 성취했던 민주사회 - 투표라는 정치적 영역마저도 ‘무의미’하고 ‘좋아요’를 누를수 있는 어떤 수많은 것들 중 하나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언제나 ‘페이스북’을 염탐하고 ‘블로그‘ 포스팅의 반응을 살피며 ‘트위터’를 리트윗하며 하루의 많은 시간을 작은 테블릿 안에 집어넣는 나로서는 이 책이 염려하는 과도한 긍정에 대한 ‘부정’을 염두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나는 무엇을 하거나 부딫히기 이전에 인터넷을 이용해 정보를 알아보지 않으면 ‘하면 안되고 섣부른 행동’으로 생각하는 게 당연한 세상에 살고 있다. 눈앞에 보이고 클릭하고 모든게 투명한, 긍정적인 방향을 추구하는 수많은 인터넷 속 매체들. 그 안의 내용들은 분명 이면이 있을 것임을 의식하면서도 우리는 그저 방대한 정보들을 매일매일 흡입하기에도 바쁘다. 이면마저 생각할 여유나 카테고리 따위가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이런 역설과 이면에 대해 돌아보게 되었으니 디지털 세대에서 저자가 언급한 무수한 개인으로서 너무나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