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보고 난 뒤 이 책이 생각나서 다시 들춰 보았다. 사실 이 글은 책에관한 리뷰이기보다 본 영화를 보며 절묘하게 기억나는 무라카미 류의 발언을 생각한 글이다.  

 사랑에서 희생하는 쪽의 근원은 무엇일까. 그만의 해답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일본적인 것일까? 보편적인걸까?

 

 

 

 

이성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는 어떤 여자일까. 무라카미 류의 책중 < 자살보다 sex>에서 기억나는 구절이 있다. 

처음으로 돌아가보면 자신의 가정, 자신의 기원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그것을 마구 어필하는 여자들이다.

남자에게 있어서 자신의 '아버지'를 높게 어필하지 않는 여성만큼 쉬운 여자가 없다. 그 여자를 장악하기 위한 어떤 돌파해야 할 큰 벽 하나가 없는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에라는 논리이다. 그런데 소름돋을만큼 비슷하게 이 영화속에서도  나타나있다. 극중에서 마츠코는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다 스스로 튕겨져 나오고, 그 이후 수많은 남성들에게서  아버지의 부재를 채우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니 어떤 행동이든 과잉되고 표정마저, 그렇게 남자를 지치게 하며 스스로 '버려지는 삶'을 만들어 간다. 그 버려짐은 처음에는 자기연민에 의해 중독적이다. '버려졌다'는것은 이런 여인들에게 사랑에 의해 어떤 정점이 없었던 여성들에게 '나도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았었다'는 특별한 '삶의 사건- 이력'이 되고 누군가에게 '동정'받을 수 있는 자기파괴적인 성질이 된다. 점점 그것이 반복되며 자기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슬픔에 취해 그 안에 포류하며 우울해진다. 결국 내면 안에만 살아서 히키코모리가 되거나 자살한다. 어쩔수 없는 슬픈 결말.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사랑에 있어서 더 중요한것은 뭘까


과연 이런 여성들의 삶이 혐오일까? 남자의 시각에서 혐오?인것일까. 왠지 인정하기 싫은 부분이었다. 일본영화속에서

왕자님에 대한 판타지는 많이 있다. 가장 현실적이고 빼어난 영화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정도일까. 다른점이 있다면 이영화속의 여자는 이별 후 폐인이 되지 않는다. '버려짐'이 자기밖에서 살아갈 원동력이 된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을 것 같다. 아마 더 많을 것이다. 정말 알고 싶다 어느 쪽이 더 할지. 더한 자기연민에 빠지다가 더욱더 큰 보상을 바라며 자기안으로 갇히는 여자들말이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그런여자의 이야기이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마츠코의 일생을 혐오스럽다 하고 싶지 않다. 누군가에게 '주는게' 사랑인것. 여자는 사랑을 받아야만 하는 존재일까. 여자가 주는 사랑은 왜 구린 결말을 낳을까. 여자는 어차피 언젠가는 결합을 통해 희생할 존재이기 때문에 미리 희생할 필요가 없어서 일까?  진짜 목소리를 내고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은 보통 사랑을 '받는'이들일 확률이 크다. 그만큼 자신의 자존감의 크기와 확신이 그득그득 하기 때문에. 아마도 나카시마테츠야도 이런 여성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아본' 사람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런의미에서 이영화의제목은 여전히 마음에 안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