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점심 먹는 사람을 위한 시집
강혜빈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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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은 읽지도 않으면서 시를 열심히 쓰던 때가 있었는데, 막상 시집을 읽어보니 내가 쓰던 건 시가 아니었다. 그 뒤론 시가 너무 어려워서 읽지도 쓰지도 않게 됐다.



시와 아주 아주 멀어진 후에야 조금씩 시를 읽고 있다.




혼밥과 시가 어떻게 어울릴 수 있을까 생각하며 이 책을 골랐는데 혼자 점심을 먹으며 꺼내보기 좋은 책이다. 어떤 시는 김밥 같고 어떤 시는 샐러드 같고, 또 어떤 시는 잼을 바른 식빵 같다.



시 전체를 적는 것도, 일부만 찍거나 옮겨 적는 것도 내키지 않지만 그래도 셋 중엔 일부를 옮겨 적는 게 가장 나은 것 같다.






말하는 사람의 의중을 파악하는 일은

물맛의 차이점을 느끼는 일과 비슷해서



점심이라는,

어떤 장르를 만드는 일과 같아서



그러나 여자에게

가벼운 친밀감을 느끼기 시작할 때

오늘분의 점심시간은 끝이 나고



사람들은 문득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서둘러 바깥으로 나선다


「다가오는 점심」 中, 강혜빈



점심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시도 있고, 전혀 점심과 관련 없는 이야기를 하는 시도 있다. 시를 읽는 동안 우리가 점심을 먹으며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의 주제를 떠올려 봤는데 그 폭의 넓이 만큼이나 시가 다루는 소재도 다양하다.



오은 시인이 쓴「그」는 사실 조금 웃겼다. '김성진'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가 성 씨 성을 가진 친구와 진 씨 성을 가진 친구를 가진 바람에 셋이 모여 다시 김성진이 된다.



점심 시간에는 , 특히 일을 같이 하는 사람과 먹는 점심에는 나도 너도 아닌 제 3자의 비극이 희극으로 둔갑해 반찬이 되곤 하는데 김성진의 이야기가 딱 그랬다.



다시 생각해보니 이 시집은 정갈한 반찬 같기도 하고, 도시락 속에서 뒤섞인 반찬 같기도 하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다른 맛의 찬이 등장해서 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식당에서 밥을 기다리는 동안 한 두 페이지씩 읽다보면 혼자 먹는 점심도 제법 왁자지껄한 기분이 들 것 같다.





날마다 조금씩 다르게 걷는 일은

왜 너에게 중요한지


알지 못하면서도 너는 다르게 걷는다


「오늘의 산」 中, 주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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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점심 먹는 사람을 위한 산문
강지희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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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점심 먹는 사람을 위한 산문>. 다양한 직업의 10명의 사람이 함께 글을 썼는데, 그중 <경찰관속으로>와 <아무튼 언니>를 쓴 원도 작가님도 있다.


혼밥이라는 단어가 없던 시절부터 혼자 먹는 밥을 즐겼다. 아는 분은 이런 나를 두고 1인 가구에 최적화된 사람이라고 칭하기도 했는데, 맞다. 1인 가구에 최적화된 사람, 삶.


매일 뭔가를 먹어야만 하루가 건너가니까, 누가 무엇을 어떻게 먹는 지는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혼자 먹는 점심에서 출발한 열 개의 삶에서 나와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는 재미가 쏠쏠했다.

읽으면 내 얘기가 쏟아지는 글들이 있는데, 이 산문들이 내겐 그랬다.



나는 오늘도 점심을 먹었고 내일도 먹을 것이며 모레도 먹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먹어야만 하는 밥은 싫다. 진정으로 마음이 동해서 숟가락과 젓가락을 바삐 놀리고 싶다. 식사가 즐거워지고 음식을 감사히 여겼으면 좋겠다. 끼니를 때우는 게 아니라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포만감을 진심으로 만끽했으면 좋겠다. 내가, 우리 모두가.


191-192p


한때 금요일 저녁은 늘 치킨까스였다. 매일이 야근이었지만 새벽 1시가 넘어야 퇴근할 수 있던 금요일은 유일하게 회사에서 저녁을 사주는 날이었다. 치킨과 맥주를 파는 허름한 호프집에서는 돈까스와 치킨까스를 팔았다. 가끔 대표님의 의견을 따라 순댓국을 먹기도 했다. (이때 살면서 처음으로 순댓국을 먹어봤다. 물에 잠긴 순대라니...) 소주나 맥주를 곁들이고도 누구하나 붉어지지 않은 얼굴로 사무실로 돌아가 마감을 끝냈다.



점심과 저녁은 시간이 따로 정해지지 않았다. 열두 시가 넘으면, 일곱 시가 넘으면 대충 밥을 먹으러 갔다가 자리로 돌아오는 데까지 삼십분이 채 안 걸렸다. 몸이 빠르게 망가졌다. 이렇게 살면 마흔에 죽겠다 싶었는데 그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관두었지만 옮긴 직장도 야근이 잦긴 마찬가지였다. 사먹는 밥은 소화되지 않고 위장에 쌓였고 자주 체했다. 체기는 사나흘씩 이어졌고 날이 추워지면 체기에 몸살이 겹쳐 링거를 맞으러 가기도 했다. 링거를 맞고 택시를 타고 회사로 돌아가는 길이 가까워서 기운이 빠졌다. 그 와중에 8년을 같이 살던 새가 죽었고 많이 울었다. 사실 그 무렵의 기억이 별로 없다. 해소되지 못한 감정의 덩어리만 남았다.



몸이 아픈 걸 이상하게 생각한 적은 없었다. 일을 그만두고 집을 쓸고 닦고, 매일 끼니를 차리면서 다음 일터를 어렴풋이 상상했다. 음식을 연료로 쓰지 않고, 식사를 할 수 있는 삶. 食事는 단어 그대로 ‘먹는 일’이다. 일과 일 사이에 끼어있는 윤활제가 아니라. 나는 먹는 일이 하나의 행위로 존재할 수 있는 삶이 살고 싶었고, 채식을 시작하면서 먹는다는 행위는 행위 그 이상이 되었다. 직접 챙겨먹는 게 귀찮지 않느냐는 질문을 들을 때마다 먹는 일엔 전혀 손을 댈 수 없었던 시간을 떠올린다. 그러면 이 귀찮음이 얼마나 호사스러운지도 깨닫게 된다.



매일 비슷한 푸성귀에 버섯 반찬이라도 눈앞에 놓인 음식을 볼 때마다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이는 투명함이 좋다. 이 호사가 사는 동안 계속 이어지기를.






수해가 발생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애호박이 5000원을 찍은 그날 본 뉴스는 더욱 충격적이었다. 범람한 강물 위에 비죽이 튀어나온 철근콘크리트 건물들은 그 모습만으로 문명이란 단어에 조소를 보냈다. 내가 야채값과 외출할 때 젖는 신발 때문에 고민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들은 삶의 터전이 사라지고 있었다.


71p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존재를 마주할 때마다 내 거처는 더 작아도 된다는 생각을 한다. 큰 집에 살고 싶은 욕망과 안분지족해야한다는 가치관이 충돌할 때 모서리에 놓인 냉장고 속에는 숨길 수 없는 욕망이 뒹굴고 있다. 예를 들면 미국에서 온 레몬과 아무튼 한국 출신은 아닌 아보카도 같은.



코로나19인지 코비드19인지 우한코로나인지 이름도 불분명하던 2020년 초입에는 외출을 최소화했다. 하루 확진자가 50명도 나오지 않던 때였다. 작은 방에 앉아 죽기 위해 태어난 동물을 거처를 생각했다. 삶의 터전은커녕, 삶도 터전도 없는 어떤 생.



내가 채소가게에서 푸성귀 값을 보면 투덜거릴 때, 맞은편 정육점에는 피부가 벗겨진 채 반으로 잘린 소나 돼지의 몸이 걸려있다. 가끔은 눈알이 없는 머리가 놓여있기도 하다. 나는 그것의 맛을 잘 알고 있다는 게 마음이 무거워서 가끔은 부러 빤히 보기도 하고, 또 가끔은 아예 고개를 돌리기도 한다. 마주하거나 모른 척 하거나 어느 쪽도 쉽지는 않다.




모두가 경계를 잃어버리는 비행기라는 공간은 그래서 어딘가 뭉클한 구석이 있다. 불이 모두 꺼졌을 때 특히 그렇다. 피부색이나 표정이나 다른 정보 없이 앞에 놓인 화면만이 우리를 대변한다. 그런 광경은 좀 공평하지 않나. 서로를 모르고도 괜찮을 때. 누구도 구분 짓지 않아도 될 때 왜인지 조금 안도한다.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을 우리는 가끔 원하지 않나.


213-214p


‘경계를 잃어버리는 공간’이라는 말이 좋다. 점심은 내게 경계를 잃어버리기 좋은 시간이다. 회사라는 공적인 시간과 시간 사이에 적당히 일탈을 누리는 시간. 직장인처럼 보이지 않는 차림으로, 누가 봐도 백수청년인 듯 동네 개를 데리고 산책하고 돌아오는 시간. 비행기 안에서도 우리는 서로를 모르고도 괜찮지만, 개를 데리고 있을 때도 그렇다. 나는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에게 쉽게 말을 건네고, 다른 사람들도 개를 데리고 있는 내게 쉽게 말을 건넨다. 사람은 개에 가려 보이지 않는 시간. 점심시간에 개와의 산책은 그야말로 훌륭한 디저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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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수업 - 불교철학자가 들려주는 인도 20년 내면 여행
신상환 지음 / 휴(休)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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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는 너무 가보고 싶은 여행지였는데, 괴담이 많아서 선뜻 도전하지 못했다. 유럽 여행을 같이 다녀온 친구와 인도도 같이 떠나자고 했지만 그것도 벌써 10년 전 일이다.


이안 감독의 <파이 이야기>를 보며 인도에 대한 환상은 더 커져 갔다. 무교지만 불교(의 교리)를 좋아하는데, 아마 절에 다녀본 적이 없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초등부부터 고등부까지 꽤 오래 교회를 다녔는데 교리처럼 살 생각이 1도 없어 보이는 인간들에 환멸이 나서 멀어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인도에서 20년 간 살다 온 불교철학자가 소개하는 인도의 모습이 궁금했는데 작가가 선배에게 들은 얘기라며 적어 놓은 문구가 책을 읽는 내내 맴돌았다.



인도를 일주일만 다녀오면 매 순간을 기억하고, 한 달을 다녀오면 중요한 모습만 기억하고, 1년을 다녀오면 인도를 다녀왔는지도 잊어버린다.



책을 덮을 즈음에는 주어를 어느 곳으로 바꾸어도 상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낯선 곳에 가면 익숙하지 않은 것에만 집중하게 되는데, 기실 사람 사는 것이 다 비슷하니 내가 그곳을 타자화하지 않으면 인도라고 다를 것이 있겠냐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래도 여행은 가고 싶어. 인도, 티벳, 쿤밍 갈 거야!)



그래서 이 책은 인도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작가가 인도라고 생각한 것, 즉 인도에서 경험한 불교 이야기에 가깝다. 그래서 책을 읽는동안 인도와 불교에 해박한 가이드와 함께 인도 구경을 하는 것 같았다. 팬데믹 이후로 이런 감각은 정말 소중하다. 그 전에는 책이 안전한 모험이고, 세상을 간접경험하게 해준다는 말을 들어도 ‘직접 가보면 되지 굳이?’라며 별 감흥이 없었는데 이제는 갓 나온 새책에서 흙먼지 냄새를 맡을 정도로 다른 세계를 궁금해 하다니.



책은 인도, 티벳, 무스탕, 투르크로 섹션을 나누는데, 이방인들이 발음을 잘못 표기한 지명 소개도 있어서 해당 지역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게 지도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불교용어나 역사 이야기도 자주 나오는데, 사실 불교 교리를 좋아할 뿐이지 불교를 잘 알지 못하는 나에게는 조금 어려운 내용도 있었다.





티벳 불교에서는 1) 작-행-요가-무극상요가라는 4종의 딴뜨라, 즉 4종의 밀교의 구분법을 쓰는데 이것은 일상의 생활을 관통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작행요가-무극상요가’로 줄일 수 있는 이것의 작은 산스끄리뜨어 어원 ‘끄르kr’에서 온 것으로 무언가를 하는 일반적인 행위를 뜻하고 2)행은 산스끄리뜨어 어원 ‘짜르car’에서 온 것으로 예식 행위를 뜻한다. 95p


그렇다고 모든 불교용어에 주석을 달 수도 없으니 그냥 찬찬히 읽으면서 어렴풋이 의미만 짐작해 봤다. 딴뜨라 같은 낯선 용어 앞에서는 한글도 외국어처럼 보인다.






티벳은 곡물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 육식을 할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한 티벳 스님은 달걀을 먹지 않는다고 했다. 티벳 속담에 ‘잡으려면 야크를 잡아라’라는 게 있다는데, 살생할 수밖에 없다면 작은 것 여러개보다는 큰 것 하나를 잡아 불필요한 살생은 줄인다는 의미라고 한다. 비건지향 페스코테리언이 되어 채식을 하면서 나는 그저 고기 안 먹기 챌린지를 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는데, 다른 동물이 들어간 고양이 사료를 구매하고 가족이나 친구들을 위해 고기를 사서 직접 요리하는 때도 있기 때문이다. 내 눈 앞에서만 죽(이)지 않으면 되고 고기가 내 입에만 안 들어오면 되는 건가 싶어서 이게 내가 바라는 채식의 삶인가, 생각하다가 현타가 올 때가 있었다. 그래서 불필요한 살생을 줄인다는 말이 크게 공감이 되었다.



이미 완벽한 채식을 하긴 글렀지만 다시 한번 휘뚜루마뚜루 채식을 결심하고! 나는 나의 길을 간다! 아좌좌! ㅋㅋㅋ




물론 재밌는 이야기도 많다. ‘자신을 등불로 삼고 의지하며, 진리를 등불로 삼고 의지하라’는 뜻의 ‘자등명 법등명(自燈明法燈明)’은 석가의 유언으로 유명한데 석가가 죽기 전의 일화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시주를 받는 수행자는 주는 음식을 가려 먹을 수 없는데, 석가는 어느 날 음식을 받고서 자신을 20년 간 따른 아난 존자에게 그 음식을 먹지 못하게 한다. 그럼 아난 존자는 굶어야하는데요? 너무 쪼잔한 일화라 다들 쉬쉬하는 건가 했더니, 그 음식이 상했을 거란 해석이 있다. 상한 줄 알지만 받은 음식은 먹어야 하기에 석가 혼자 음식을 처리하고 몸이 상해 결국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죽기 전에 남긴 말이라니 또 새롭게 들린다. 나를 등불로 삼으라는 말이 좋았는데, 누구의 말에도 흔들리지 않고 나를 믿고 가라며 등을 두드려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일화를 듣고 나니 음식을 준 이를 원망하지 않고, 자신의 선택에 후회가 없다는 말로도 들린다.



불교철학자의 눈으로 본 인도가 꽤 재미났다. 챕터마다 글도 짧아서 읽기도 편하고 모르는 내용은 이해 못한 채로 넘어가도 나쁘지 않다. 직접 본다고 다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오히려 이런 게 더 생생한 여행 같은 느낌이 든다.



그나저나 읽고 나니까 정말 여행이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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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동 이야기
조남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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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주 작가의 신작 <서영동 이야기>를 가제본으로 먼저 받아보았다.

‘봄날아빠(새싹멤버)’, ‘경고맨’, ‘샐리 엄마 은주’까지 총 세 편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모두 가상의 공간 서영동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따스해 보이는 표지와 달리 영 마음이 불편하다. (맞다. 이분 <82년생 김지영> 쓰셨지…) 분명 가상의 공간이지만 너무 이곳의 이야기이고, 또 내가 외면하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해서다. 서영동과 이웃한 은라동의 아파트와 가격차이로 발끈하는 주민들이나 유치원 엄마들의 브런치 모임에서 오가는 대화, 정년퇴직 후 경비원이 된 아빠의 일터 가까이 사는 k-도터 등 듣기만 해도 머릿속에 그려지는 불편한 상황들이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유독 이런 이야기에 취약해서 이 짧은 가제본을 읽는 것도 조금 버거웠는데, 가장 마지막에 실린 ‘샐리 엄마 은주’의 이야기를 읽고 나서야 이 책을 끝까지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불편하고 말 이야기는 아니라는 확신을 주었다.


1.
유정은 사실 아파트 얘기가 싫다. 이 비싼 집을 세훈이 혼자 마련했다는 사실이 부담스럽다. 회사 동료들도, 오랜 친구들도, 유정의 부모님마저 좋겠다, 부럽다, 세훈에게 잘해라, 했다.
지금 세훈은 거의 1년째 구직 중이다. 외삼촌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총괄 매니저를 했었는데 레스토랑은 몇년 사이 매출이 계속 떨어지다 지난해 결국 폐업했다. 세훈은 개업 준비를 하다가 프랜차이즈 상담도 받다가 아예 상관없는 회사에 이력서를 넣기도 했는데 어느 것도 쉽지 않았다. 지금 생활비는 유정의 수입으로 충당한다. 그런데도 왜 자꾸 움츠러드는지 모르겠다. 이깟 아파트가 뭐라고.
-봄날아빠(새싹멤버)-


2.
대답할 수가 없었다. 말한다고 네가 이해할 수 있을까. 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서울의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 소유주가 된 네가, 작은 아버지의 레스토랑에서 일하다가 큰 아버지의 회사로 이직한 네가, 가족 단톡방의 부모님 해외 여행 사진에 무심히 이모티콘을 보내는 네가, 그 모든 일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네가 이해할 수 있을까?
-경고맨-



3.
지긋지긋하기는 은주도 마찬가지였다. 샐리 엄마도, 새봄 엄마도, 그런 여자들 중 하나로 보이지 않으려 애쓰는 생활도, 그런 여자들을 둘러싼 말들도, 오해도, 적의도, 정말 지긋지긋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대체 그런 여자는 어떤 여자고 그렇지 않은 여자는 또 어떤 여자인데.
-샐리 엄마 은주-





현실의 어두운 면을 굳이 작품으로 보고 싶지 않다. 존재하는 자체로도 끔찍하기 때문에 그걸 다시 가상의 이야기로 재구성 해서 볼 필요가 있나? 생각하는 편인데, 대게 대책 없이 현실 고증으로 끝나는데 그친 작품을 많이 봐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서영동 이야기>는 가제본이라 전체 내용을 다 아는 건 아니지만 그다지 밝은 내용도 아닌데다 대책이 없다. 치솟는 아파트 가격으로 분열이 일어나는 주민들의 불만을 잠재울 대책을 알고 있다면 그건 소설이 아니라 부동산 대책 비법서가 되겠지. 그래서 또 잔뜩 한탄하다 끝날까봐 괴로워하며 읽었는데 샐리 엄마의 독백이 너무 좋았다. 나와 같이 괴로워하는 줄 알았는데, 괴로워하는 지점이 조금 달랐고, 괴로움을 들여다보고 감정과 현실을 분별하려고 노력하는 부분에서 나만 부끄러워졌다.


위로가 되었던 건 작가의 말에서 작가님이 소설을 쓰는 내내 괴롭고 부끄러웠다고 하셨던 부분이다. 그래도, 적어도 나만 멋쩍었던 게 아니었나보다.


괴롭지만 이상하게 따뜻한 이야기다.


#하니포터
#한겨레출판
#조남주
#서영동이야기
#하니포터2기_서영동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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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것도 부른다면 - 박보나 미술 에세이
박보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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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도가 작품이 될 때>의 박보나 작가의 미술 에세이.

읽지는 않았지만 전작이 워낙 유명해서 <이름 없는 것도 부른다면>이 퍽 궁금했다.

미술 에세이가 생소하기는 한데, 기억에 남는 그림 에세이가 있다. 우지현 작가의 <나를 위로하는 그림>인데, 그림을 하나 소개하고 그 그림에서 연상되는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반면, 박보나 작가는 생존을 중심으로 유기적으로 뻗어나가는 이야기에 어울리는 예술 작품을 덧붙여 소개한다.



책 디자인은 이기준 디자이너가 맡았다. 예전에 친구와 서점에서 민음사 쏜살 문고 시리즈를 보고 마음에 드는 표지를 쭉 꺼내 디자이너를 확인해봤더니 전부 이기준 디자이너가 작업이라 그 뒤로 이름이 각인돼서 볼 때마다 반갑다. (이번 디자인도 취향 저격... 서체 뭘까, 궁금해...)

얇은 책이라 목욕하며 읽기 좋을 것 같아 욕조에 물을 한가득 받아놓고 들어가 읽었다. 시간을 확인하지 않아 금세 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손에서 놓지 않고 읽었다.



내용이 하나의 키워드로 묶이고, 한 장의 내용 말미에 나오는 키워드가 다음 장의 시작 키워드가 된다.

그렇게 쭉 돌아서 다시 시작할 때 나왔던 '나무' 키워드로 돌아오는 구조.

구조도 너무 흥미롭고 흥미로운 구조를 원형 목차로 디자인한 것도 너무 좋았다.

마음에 와닿았던 구절은 너무 많았지만, 내가 새로운 한해를 마주하는 마음가짐으로 삼을 문장들을 소개해 본다.



작은 생명의 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때, 주변을 더 넓게 이해할 수 있고, 함께 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한껏 당겨 읽어본다. 다른 생명과도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세상은 파괴와 멸망의 나락 반대편에 선다. 그곳에서는 누구도 외로울 리 없다.

33-34p 새의 소리를 이어간다면



거대한 포춘쿠키 더미는 당시 목숨을 잃은 노동자들의 거대한 무덤을 상징한다고 하겠다. 작업에 쓰인 포춘쿠키는 중국 이주민을 상징하기에 더없이 적절하다. 중국식당에서 음식을 먹으면 공짜로 얻을 수 있는 이 과자는 정작 중국에는 없다. 쿠키를 처음 만든 사람도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일본인 사업가였다. 하찮게 부숴 맥락 없는 운세를 읽고 잊어버리고 마는 포춘쿠키는, 미국의 중국 이민자들처럼 미국에만 있다.

38p 상상의 맹수 호랑이를 키우고 있지 않은지


통계청에 따르면 2021년 대한민국에 사는 외국인의 수는 133만 명이고, 그중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 수는 공식적으로만 84만 명 이상에 달한다고 한다. 다양한 사회 구성원이 만드는 혼종 문화와 변화하는 정체성은 이미, 지금, 여기의 실제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차이와 낯섦을 구실로 이방인들을 여전히 멀리 밀어내곤 한다. (중략) 폭력의 목소리를 듣는 것도 끔찍하지만, 혐오의 언어들이 그저 가볍게 받아들여지고 일상적으로 자리 잡아간다는 사실은 더 소름끼친다. 오해와 증오는 가짜 맹수를 살찌운다.

43p 상상의 맹수 호랑이를 키우고 있지 않은지



현대인은 동물을 가공되고 포장된 선홍색의 식자재로 슈퍼마켓에서나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애완동물'로 선택된 동물들은 동물성을 철저히 제거당하고 우리에게 복종하도록 훈련받으며 인간화된다. 동물보호구역이나 동물원의 동물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인간의 감시와 통제 아래, 동물들은 무대 위의 구경거리로 무기력하게 존재할 뿐이다.

90-91p 원숭이의 눈에 신성(神聖)이



나는 당신이 사는 집의 브랜드와 가격이 궁금하지 않다. 나는 당신이 같이 사는 세상에 대해 얼마나 깊이 생각하고 있고, 외로운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는지가 궁금하다. 부동산을 팔아 얼마의 시세차익을 남겼는지가 아니라, 무엇에 따뜻함과 위로를 느끼는지 알고 싶다. 당신의 공간을 욕심과 이기심이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한 시간과 추억들로 채울 수 있으면 좋겠다.

134-135p 도시와 아파트에도 사람이





사람이 따뜻함과 위로를 느끼는 지점을 아는 건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지점들은 내가 무기력해지거나 바닥이라고 생각될 때 다시 기력을 찾을 때까지 버티는 힘이 되어주고, 또 내가 버틸 수 있어야 타인의 괴로운 시간을 함께 견딜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사람들을 만나고 소소한 수다를 떨 때 따뜻함과 위안을 느끼고, 그 온기로 일주일, 한 달, 수 개월을 사는 것 같다. 그동안은 빵빵했는데 코로나로 곳간이 빵꾸나서 요즘 열심히 메우다가 다시 위드코로나 끝나서 빠른 속도로 온기가 사라지고 있다. 부스터샷 맞기 전에 만나지 말자고 해서 생일에도 친구들을 못 만났다. (왈칵) 애두라, 나 몰래 질병관리청으로 직장을 옮긴거니? 크리스마스에 겨우 친구 만나기로 했는데, 그때까지 존버해야 한다. 슬퍼... 저에게 사교와 우정을 허락해주세요. 몹쓸 전염병아...

'지구별의 다른 미래를 그려본다'는 작가의 말처럼 살생, 도시의 삶, 불안 조장하는 사회, 장애 차별 등 다양한 주제를 키워드 하나에서 시작해 이야기로 확산해가는 구조가 좋았다.

각 챕터가 길지 않고 비관도 낙관도 아니지만 희망을 담고 있는 점도 좋고.


상반기에 읽은 책이 뭐가 있는지 잘 떠오르지 않아서 일단 2021 하반기의 책으로 꼽았다.



*한겨레출판, 서평단 하니포터 1기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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