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건 이 단어들과 제 삶이 톱니처럼 맞물린 적 있다는 사실이에요. 어떤 단어는 시간의 역할을 대신했고 어떤 단어는 공간의 역할을 대신했어요.
프롤로그에 써진 작가의 말. 각각의 단어와 그 단어를 만나거나 떠올리는 순간의 이야기가 모여있다. 라페나 버저비트처럼 내게도 익숙한 단어가 작가의 눈으로 새롭게 쓰일 때는 흥미로웠고, 밀코메다 같은 단어를 보면 먹먹해졌다.
그런 의미에서 '밀코메다(Milkomeda)'는 내가 아는 가장 아름다운 상상적 현실이다. 미 항공우주국에 따르면 현재 우리 은하의 이름은 '밀키웨이(Milky Way)'인데, 약 40억 년 뒤엔 안드로메다와 충돌해 새로운 은하가 탄생할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탄생한 새 은하의 이름이 (밀키웨이와 안드로메다의 합성어인) 밀코메다라고. (...) 그러나 그 먼 시간에도 이름이 있다. 내일, 한 달 뒤, 1년 뒤, 10년 뒤에게도 없는 이름이.
(...) 그러니 오늘의 나는 오늘 쓸 수 있는 문장을 쓰면서 이곳의 나를 찾아올 밀코메다의 시간을 기쁘게 맞이하고 싶다. 와야 할 시간은 기필코 오게 되어 있다. 그럴 때 나의 인사는 "왜 왔어?"가 아니라 "왜 이제야 왔어"이기를 바라며.
196p 밀코메다
명사를 잘 못 외우는 병이 있다. 한번 헷갈린 단어는 아주 오래 헷갈리는데, 머릿속에서 엉킨 정의를 딱히 바로 잡고 싶지는 않다. 어차피 모든 걸 제대로 아는 건 불가능하니 내 삶에 오해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걸 인지한 채로 사는 것도 나쁘진 않다. 시력이 나빴을 때(지금은 수술을 해서 좌우시력 1.5의 인간이 되고 말았다) 종종 안경을 쓰지 않고 다녔던 것과 비슷한 감각으로.
시인의 세상에서 단어를 오해하는 건 어떤 의미이려나. 안희연 작가는 낯설고 새로운 단어를 발견할 때마다 골동품을 발견한 것처럼 조심스럽게 손으로 받쳐들고 먼지를 후후 불고 부드러운 천으로 닦아서 단어마다 제자리를 찾아주는 사람 같다. 글을 읽을 때마다 그 조심스러움이 종이 너머로 따뜻하게 전해져서 뭉클했다.
한때 친구와 밀코메다의 시간을 상상한 적이 있다. 모두가 야간 자율학습을 하던 시간에 우리는 몰래 나와 건물 중앙계단에 앉아 있었다. 커다란 통창 너머를 마주보고 어둡고 찬 계단에 앉아 있었다. 운동장을 비추는 희부연 불빛에 의지해 베이지색 우주와 문명의 끝과 신인류에 대해 소근거렸다. 우린 더 이상 그 주제로 이야기하진 않지만 종종 그애를 만날 때마다 같이 듣던 노래와 나눈 이야기를 떠올린다. '밀코메다'라는 단어를 마주친 순간 그 모든 것들이 쏟아졌다.
반면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한 적산온도는 경직된 의미에 갇히지 않고 여러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온도를 저금한다는 말. 모든 존재가 꽃이라면, 나의 피어남에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할까.
(...)
왜 항상 스스로를 벌하는 방식으로만 살아온 걸까. 임계점은 한계가 아니라 꽃망울이 터지는 환희의 순간일 수도 있는데. 피려는 마음을 모른 척한 건 세상이 아니라 나였을지도 모르겠다.
27-29p 적산온도
결핍은 결핍대로 아름답다는 거, 아니 결핍이 도리어 빛나는 무늬를 만든다는 거, 평생 모르고 사는 일도 허다하겠지. 알아도 부정하느라 애먼 시간만 허비하겠지. 노란 나비, 골목마다 놓인 전봇대와 가로수, 베란다의 화분들... 아주 가까이에서, 숱한 메신저들을 통해 알려주고 있는데도 못 보겠지. 나타남과 드러남의 의미, 안 믿겠지.
39p 삽수
우리 집에도 있다. 결핍으로 무늬가 아름다운 식물이. 지금은 동면 중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흰색과 분홍빛의 얼룩이 점점이 묻은 연둣빛 잎을 피웠다. 잘 키우고 싶어서 생육법을 찾아봤더니 물을 줄 때는 미지근하게 데워줘야하고, 비료는 금물이었다. 부족한 성분 때문에 색이 화려한 거라 비료를 주게 되면 색이 변한다는 게 이유였다. 인간이 스스로 결핍을 만들어 놓고 사랑하는 게 기괴했지만 그런 기괴함이 프랑켄슈타인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끔찍하게 아름다웠다. 내년에도 칼라디움의 아름다운 결핍을 만끽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대목은 같은 작가의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시가 떠오르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오래된 이름 하나를 가리키며
나는 그에게 세번의 어둠과 수천번의 알록달록한 기억을 주었노라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겨우 첫번째 어둠 앞에서 허물어졌다고 했습니다
(...)
삶과 죽음을 가르는 건 단 한걸음 차이였다고 했습니다
설탕이 물에 녹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라고도 했습니다
-내가 달의 아이였을 때,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너무 좋아서 우는 중)
인간이 제아무리 약하다 해도 인간은 저절로 강한 면이 있다. (...)
우리는 모두 찢기기 쉬운 피막을 가지고 있다. 어느 누구도 다른 이의 피막에 함부로 막대기를 꽂아 휘저을 수 없다. 대단한 무엇이 파괴되어서가 아니다. 한 인간을 둘러싼 피막이 손상될 때 인간은 죽는다. 아주 작은 찢김으로도 상한다. 그러니 겪고 뒤척이면서 두터워지는 수밖엔 없다.
78-79p 피막
나는 그 애의 울음을 참는 얼굴을 알고, 우리가 눈 마주친 순간 반으로 쪼개진 커다란 슬픔을 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집이라면 그 집을 짓기 위해 설계된 내력벽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공평히 나누어 가진 부재의 기억같은. 신의 입장에선 당연한 설계일지 몰라도 인간의 관점에선 피하고 싶은 불운이다. 그런데 또 달리 생각해보면 내력벽이라는 건 모든 걸 부숴도 부서지지 않는 최후의 보루, 영혼의 핵심인 셈이니 그 자체로 의미 있고 아름다운 것이겠다.
100-101p 내력벽
마법이라는 단어를 여기에 쓰면 안될 것 같지만 슬픔의 마법에 걸린 것처럼 한 도시의 사람들이 모두 울음을 견디던 4월이 있었다. 그 봄을 함께 기억하는 사람들은 조금 특별하다.
세상 어떤 것도 당연한 것은 없다는 생각만으로도 제자리를 찾는 것들이 있다. 마음이 펄펄 끓을 땐 너는 왜 내게 심장을 꺼내 주지 않느냐고 따져 묻기 전에 이런 주문을 외워보는 건 어떨까. 일일시호일. 일일시생일. 날마다 좋은 날, 날마다 생일이라는 마음으로.
131p 구득
왜 당신은 인간에게 죽음을 가르치나요? 왜 당신은 시간의 손바닥 위에 우리를 올려두고 주사위 놀이를 하나요? 이 세계가 하나의 얼굴이라면, 왜 당신은 한결같이 슬픈 표정만 짓고 있나요?
166p 꼭두
꼭두는 상여를 장식하는 나무 조각상을 이르는 말로, 이승과 저승, 꿈과 현실을 잇는 존재다. 망자에게 길을 안내하고,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 영혼을 위로하는 역할을 한다. 꼭두는 언제나 선두에 있다. 꼭두새벽이 아주 이른 새벽을 부르는 말이듯이 꼭두는 언제나 맨 앞에서 길을 내고 불가능한 물을 열며 나아간다.
167p 꼭두
존재가 깃털 같아지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온다.
168p 꼭두
당신은 무엇을 믿고 무엇을 의심합니까. 가장 깊이 찔린 기억과 가장 높이 뛰어올랐던 순간은 언제입니까. 어떨 때 흩어지거나 맺힙니까. 그러니까 당신의 온도, 색깔, 질감, 경도는 어떠합니다.
172p 안료
이거 완전 고백 아닌가요. 저런 게 궁금하면 사랑이지. (이마 짚)
이주영 배우님이 저 문장 낭독해주시면 좋겠다. 모닝콜로 해놓고(할 줄 모름) 매일 아침 나무아미타불할렐루야갓뎀 외치면서 일어날래.
중국어 버전은 주동우가... (혼절) 저 주동우 너무 좋아해서 중국판 우결도 꾹 참고 봤다요. 우결이 주동우 마지막 헤테로 역할이면 좋겠다. (아님)
갑자기 주동우 생각에 정신이 혼미하네.
안료는 염료와 다르다. 안료와 염료는 물질에 색을 발현시키는 색소라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염료는 물에 녹아 스며드는 반면 안료는 물이나 기름에 녹지 않는 성질을 지녔다. 안료는 다른 무엇과 섞이더라도 자신의 색을 잃지 않고 오히려 더 분명하게 자신임을 증명한다. 그런 안료를 재료 삼아 빚는 시는 빛에도 열에도 추위에도 강할 것이다.
174p 안료
내가 쓴 문장들이 징검다리가 될 때가 있다. 과거의 문장을 딛고 현재의 문장을 내려놓는다. 현재의 문장을 딛고 미래의 문장을 내려놓는다. 그렇게 간신히 한 걸음씩 나아간다. 망망대해 같은 바다를. 말과 사람이 함께, 느리더라도 함께.
179p 탁성
가끔 예전에 쓴 글을 보면서 위로 받을 때가 있다. 며칠 전에도 4년 전 일기에 쓴 문장에 기댔다. 내일을 위해서 오늘도 무언가 써놓아야 겠다. 느리더라도 멈추지 않고 걷기 위해 써야지.
연말에 아껴둔 카드처럼 꺼내 읽기 좋은 책이라 많이 추천하고 싶다.
*한겨레출판 서평단 하니포터1기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