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세계를 위한 공부 - 이기적인 세상에서 행복한 이타주의자로 사는 법
니콜 칼리스 지음, 유라영 옮김 / 유노책주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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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세계를 위한 공부: 다정함과 자연선택



인류의 진화는 종종 경쟁과 적자생존의 틀 속에서 이해되어 왔지만, 최근의 과학적 연구와 사유는 이 관점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특히, 2018년 학술지 "감정(Emotion)"에 발표된 연구와 브라이언 헤어, 버네사 우즈의 저서에서 제기된 ‘다정함이 생존의 핵심’이라는 주장은 기존의 생물학적 패러다임에 새로운 전환점을 제시한다. 이 평론에서는 이러한 과학적 발견과 사회적 현상, 그리고 철학적 사유를 통합하여 ‘다정함이 진화의 승자’라는 논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과학적 관점: 친화력과 도덕적 고양감의 생물학적 근거

과학적 연구는 타인의 친절과 돌봄을 목격할 때 느끼는 ‘도덕적 고양감’이 뇌의 보상체계를 활성화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협력적 본성을 갖고 있으며, 이러한 감정적 반응이 사회적 연대와 공동체 유지에 필수적임을 시사한다. 인류 진화의 핵심 동인으로서 타인에 대한 공감과 친화력은 생존 경쟁을 넘어 상호 의존적 협력의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기여하였다. 일찍이 헤어와 우즈는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라는 책을 통해, 신체적 힘보다도 사회적 연결망이 생존과 번식에 유리했음을 과학적 데이터를 통해 뒷받침했다.



이들은 ‘적자생존’이라는 개념이 단순한 경쟁적 생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협력과 친화력을 통해 더 강력한 집단이 형성되고, 그것이 생존 경쟁에서 우위를 점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호모 사피엔스의 성공은 바로 이러한 복합적 친화력에 기반한 집단적 연대와 협력에 있었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시기적으로 이 책은 같은 주장을 나열하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주었다.

사회적 관점: 혐오와 혐오의 극복, 그리고 연대의 중요성

현대 사회는 혐오와 분열, 혐오를 조장하는 혐오스러운 ‘외집단’ 개념이 만연한 상황이다. 이러한 현상은 뇌의 ‘타인 읽기’ 능력이 위축되고, 내집단과 외집단 간의 경계가 강화됨에 따른 자연스러운 생물학적 반응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는 결국 다정함과 연대를 저해하는 장애물로 작용한다.



반면, 사회적 움직임은 ‘연대’와 ‘공감’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자원봉사, 웰니스 산업, 그리고 ‘나이스 뉴스’와 같은 긍정적 플랫폼들은 공동체적 유대감을 회복하고, 혐오와 혐오의 블랙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이러한 변화는 ‘다정함’이 단순한 개인적 덕목을 넘어, 사회적 생존 전략임을 보여준다. 즉, 집단 내 신뢰와 연대는 혐오를 극복하는 핵심 수단임이 드러난다.

철학적 관점: 도덕성과 생존의 재해석

철학적으로, 이 논의는 ‘적자생존’의 의미를 재구성하는 데 중요한 성찰을 제공한다. 기존의 생물학적 유물론은 힘과 경쟁을 강조했지만, 현대적 관점은 ‘도덕적 진화’와 ‘친화력’이 인류의 근본적 특성임을 드러낸다. 이는 ‘윤리적 본성’이 생존의 핵심 동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인간 존재의 의미와 도덕적 책임에 대한 사유로 확장된다.



헤어와 우즈의 주장에 따르면, 자연선택은 더 이상 ‘적자생존’이 아니라 ‘적합한 자’, 즉 친화력과 협력 능력을 갖춘 자가 승리하는 과정이다. 이는 ‘다정한 것만이 살아남는다’는 명제와 일치하며, 인간이 본질적으로 ‘연대와 배려’의 존재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이 책의 결론:

다정함이 인류 진화의 열쇠

과학적 연구와 사회적 변화, 그리고 철학적 사유는 하나의 공통된 결론에 도달한다. 바로 ‘다정함이 인류 진화의 핵심’이라는 사실이다. 경쟁과 혐오, 분열의 시대 속에서도, 인간은 본래의 친화력과 도덕적 감수성을 통해 더 강한 공동체를 이루고, 궁극적으로 생존과 번영을 이룰 수 있다. 그렇다고 다윈의 이론이 틀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전체 사회적 메카니즘 속에서 인간무리는 '다정함'이라는 형질이 선택 되었고, 네트워크화된 인간 사회에서 더욱 이 형질은 공감과 협력이 강화되는 세상에서 각광을 받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러한 통합적 관점은, 우리가 직면한 사회적 도전들을 극복하는 실마리이기도 하다. ‘다정한 것만이 살아남는다’는 믿음은, 단순히 생물학적 생존 전략을 넘어, 인간 존재의 본질과 미래 지향적 삶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강력한 메시지는 어쩌면 또 다른 이데올로기일 수 있지는 않을까 의심이 들기도 한다.



작가는 저널리스트로 돈 되는 책을, 독자들이 흥미 있어 하는 방향의 냄새를 잘 맡는다는 인상을 많이 주었다. 다만, 깊이는 없이 피상적인 주제만 따라다닌다는 점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학자가 아니기에 더 깊이 이해하기보다는 무거운 생존경쟁과 적자생존보다는 일찌감치 유행했던 '다정함이 살아남는다'는 주제에 너무 감각적으로 이끌려 다닌다. 그래도 의미있는 논문을 소개한 점에서는 흥미롭고 쉽게 읽히는 문장으로 자연선택의 보다 다양한 관점을 넓힐 수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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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쇠꽃
이도은 지음 / 문암출판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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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의식된 시간을 통해 진정한 자아를 회복하고, 예술로 삶의 무의미함을 정복하려는 시도"라는 핵심적 사유를 탐구한다. 그 방대한 서사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시간성과 예술적 각성의 관점에서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철학적 실험이라 할 수 있다.

누구라도 향기를 통해 추억을 소환시킨 경험이 있듯이, 프루스트는 마들렌 케이크를 적신 차 향이 과거의 콩브레 시절을 생생히 소환하는 에피소드를 통해, 의지적 노력으로 재구성된 기억이 아닌 무의식적 기억의 각성이 진정한 과거를 복원함을 보여줌으로써 시간의 속박으로부터의 탈출을 감행한다.
공자의 논어에서 먼 옛날 요나라 순나라의 과거를 태평성대라고 회상하고 성경이나 쿠란은 창세기를 되돌아보라고 충고한다. 과거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를 한강작가도 그랬듯, 이도은 작가도 '치유'와 '정체성 재구성'이라고 답한다.

'무쇠 꽃'의 이 도은 작가는 아궁이에 걸린 무쇠솥뚜껑을 여닫는 소리를 통해 '가난'의 냄새와 '엄마'의 그리움을 상대적 시간성 안에서 끄집어 낸다.

작가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솥 뚜껑', '장롱', '슴베', '그랭이질', '뒤안', '쇠시리', '손수건', '명태', '능', '메꽃'이라는 랑그(langue)는 1970년대 한국적 가부장제 아래서 자란 세대의 집단적 무의식을 적시는 눈물과 애환이 스며든 파롤(parole)이다.

그녀의 의식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파롤을 통한 글쓰기는 상처받은 기억을 언어화(객체화)하며 시간의 굴레를 벗고 새로운 주체로 재탄생하려는 여정으로, 리쾨르가 말한 '서사적 정체성' 구축 과정을 완성한다.

무능하고 가부장적 아버지의 그림자와 실질적 세대주로서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마치, 구멍 난 문풍지 사이로 스미는 겨울바람의 기억 마냥 '아픈' 회상만이 아니다. 신경과학자 반 데어 콜크의 <몸은 기억한다>가 증명하듯, 신체화된 트라우마들을 종이 위에 옮기는 행위 자체가 뇌의 편도체와 전전두엽을 재연결하는 신경학적 치유 과정인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나지막이 얘기한다.
'나 아팠어'라고. 친구한테 부끄러워 말 못 했어. 근데 이제 나아져가고 있는 것 같아라고 말한다. 아니, 내게는 그렇게 들렸다. 매일 몰래 적어내린 원고지 더미는 그녀가 과거의 '피학적 증인'에서 현재 '서술 주체'로 거듭나는 의식 변환의 증거라고 추론해 본다.

1970년대 빈민촌 사람들의 삶을 기록한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처럼, 그녀의 글은 침묵의 계보학을 넘어서, 개인사를 관통하는 사회적 폭력의 단면을 드러낸다. 책을 출간한 순간부터 그녀는 '가족의 부끄러움'에서 '세대의 기록자'로 역할을 전환하며, 한나 아렌트가 말한 '공적 영역에서의 용기'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난쏘공'이나 '천변풍경'에서 그랬던 것처럼 상처의 알레고리에서 희망의 서사로 나아감은 정신분석가 융이 말한 '그림자 통합'의 현장이다. 아버지에 대한 아픔과 어머니에 대한 사랑에 대한 부채의식은 '사회적 가난과 개인적 트라우마에 짓눌린 한 소녀의 무기력증'으로 재해석하며, 점진적 글쓰기로 인해 비로소 상처는 나만의 예술로 변주된다.

가난했던 동네 골목길과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남겨진 장롱이 주는 파롤은 문학적 공간으로 재탄생하고, 빈곤의 수치심이 인간적 연대의 자양분으로 전환되는 이 기적은, 그리스 비극의 카타르시스가 글쓰기 의식으로 구현된다.


낮고 자그마한 목소리로 절제하며 고백한 소녀의 상흔으로 수놓은 자전적 지도를 읽으며,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엄마', '아빠'와 다시 만나 서로의 손을 잡고 시간의 강을 건너는 교차점에서 울려 퍼지는 합창소리를 듣는 듯하였다.

아비투스적 글쓰기가 주는 문학적 자아성찰은 가장 정치적인 치유 행위이자 자신의 정체성을 재해석하는 실천적 성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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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H.에 따른 수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배수아 옮김 / 봄날의책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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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문명에서 여성은 아름다움과 미, 곡선, 포용, 생명 탄생, 항상성 유지, 원죄, 무지, 죽음, 풍요, 대지, 바다, 유혹, 변덕 등으로, 남성은 직선과 이것이 함의하는 대립과 폭력, 발전과 파괴, 이성, 하늘, 바람, 떠남, 회귀 등에 자주 비유되어 왔다. 또한 서구에서의 여성은 풍요와 궁핍, 창조와 파괴, 현묘함과 어리석음의 상징하기도 하다.



특히, 인류의 원죄를 잉태시키고 질투 어린 판도라 상자에서 솟아난 악의 원흉이며 매혹과 유혹으로 남성 파괴적 기원을 가졌다고 상징한다. 그들의 토템과 신화는 이런 여성상을 적나라하게 표출하고 있다.



구약성경 또한 여성에 대한 이해는 팜므파탈적 파멸이자, 유혹의 대상으로 그려지고 있다.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한 헤로디아의 딸로 살로메가 그랬고,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내 이세벨, 블레셋 사람들의 유혹에 넘어가 삼손의 힘의 비밀을 알아내어 그를 배신한 삼손의 연인 데릴라, 요셉을 유혹하려고 했으나 거절당하자 그를 모함하여 감옥에 가게 만든 요셉의 주인인 포티발의 아내가 그러했다.



수메르 문명에서 이집트, 그리스, 로마, 중세를 거친 서양 문명은 여성을 선악과와 처녀 잉태, 뱀과 달, 메두사와 팜므 파탈적 치명적 악으로 인식했으며 사회적 신분 또한 노예와 같거나 그보다 미천한 존재로 간주하였다.



그것이 성경을 포함한 문학을 통해서 서구적 상상력에 녹아들게 되었다. 즉, 여자의 실존은 처음부터 악과 무지 그리고 원죄적 존재자에 지나지 않았다.



19세기에 들어 여류 작가들이 등장하면서 이런 팜므파탈적 악으로서 여성상에 저항하기 시작하며 탈-여성상을 추구하는 사조가 문학과 예술작품들을 통해서 출현한다.



여기 한 여자가 있다.

아파트 맨 위층 펜트하우스에 사는 부유한 한 여자가. 그녀는 가정부가 떠난 집에 혼자 있다가 처음으로 가 본 가정부가 쓰던 뒷방 장롱 안에서 나체 벽화와 바퀴벌레를 발견한다. 나체 그림 속 인물은 바로 자신이었고 곧이어 출현한 바퀴벌레, 그녀는 바퀴벌레를 옷장 문짝 사이에 끼워 죽이려 한다. 내장이 튀어나온 바퀴벌레는 죽지 않고 삶과 죽음 사이 경계에 위치한다.

그리고 창문 밖으로 담배꽁초를 몰래 버렸다.

이 소설의 줄거리다.



사탄을 숭배하는 마녀가 된 여자는 무녀로 빙의하여 양심과 도덕을 말하고 바퀴벌레의 죽음과 내장을 삼키는 토템적 의식을 행하고, 종교와 타자, 사랑, 뱃속에서 죽어간 자신의 태아, 낯선 자신의 이름 G.H, 원죄와 지옥과 우로보로스적 삶과 죽음의 영원회귀와 무의식적 외침 즉, 인류가 여성을 학대한 그 모든 악과 추함에 대한 제의를 행한다. 희생 번제로 바쳐진 바퀴벌레의 내장을 삼키는 의식으로.​



"그래서 나는 바퀴벌레를 넘어설 더 고약한 무언가를 삼키고 고약한 무엇이 된 다음, 나에게 말을 걸어와도 내가 들을 수 없을 누군가가 듣게 될 무엇인가를 끄적이게 될 것이다. 아니면 나만 듣게 될 말들을."​​



늙은 무녀가 신의 제의 단상에 올라 희생 번재물인 내장을 삼키고 읊조리는 예언처럼 삶과 죽음, 그리고 고통과 죽음으로부터 구원시키는 여성 부족의 구원자처럼 그녀는 인간의 죽음 너머의 언어에 대해 예언자적 묵시를 말한다.

그리고 할 말이 한마디도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할 말이 한마디도 없다. 그렇다면 왜 침묵하지 않는 건지? 그러나 내가 억지로라도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면, 침묵이 나를 영원히 덮쳐버릴 것이다. 말과 형식이란 지푸라기에 매달린 채 나는 침묵의 파도 위를 떠돌게 된다.

24p

그런데 그때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힘이 내게 있음을 불현듯 깨달은 것이다. 내면에서 고동치는 위대함이 나를 압도했다. 용기의 위대함이었다. 나를 사로잡고 있던 공포가 결국 내게 용기를 심어준 것이다.

71p

이건 미친 거야, 하고 나는 눈을 감은 채 생각했다. 그러나 한낱 먼지에서 태어났다는 느낌은 도저히 부인할 수 없어서, 내가 정확히 알고 있는 생각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건 미친 게 아니라, 세상에, 미친 것보다 훨씬 더 나쁜, 즉 소름 끼치는 진실이라는 사실을. 그런데 왜 소름 끼치는가? 진실은 말 한마디 없이 이전의 내가 마찬가지로 말 한마디 없이 익숙하게만 여기던 것 모두를 전복해버린다.

78p

아르테미스의 분노로 아가멤논이 예언자인 칼카스가 그리스 군의 총사령관 아가멤논의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말했을 때, 아가멤논은 딸을 희생시켜야 하는 아비의 마음과 그리스 군의 총사령관의 의무 사이에서 극심한 내적 갈등을 겪다 결국 아가멤논은 공적인 의무감으로 그의 딸 이피게네이아를 희생 제물로 던지듯이 주인공 G.H는 2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묵시록을 내뱉고서 결국 번제물인 내장을 입안에 넣으므로 죽음을 삼킨다.​​



신은 모든 모순을 포괄하므로, 그 무엇도 신에게 모순되지 않는다.

....(중략)....

삶의 본질적인 오류는 바퀴벌레를 보고 역겨워하는 것이다. 나병 환자에게 입 맞추기를 역겨워하는 일, 그것은 내 안의 원초적인 삶을 놓치는 것을 의미한다. 역겨움이란 나 자신에 대한 부정, 내가 만들어진 원료에 대한 부정이기 때문이다.

220~225p

지옥은 살아 있는 피투성이 고기를 물어뜯고 먹는 입이며, 먹히는 자는 즐거운 눈으로 울부짖는다. 지옥은 물질의 환락인 고통이다. (중략) 고통의 잔인한 수용, 자기 연민의 엄숙한 결핍, 자신보다 삶의 의례를 더 많이 사랑하기, 이것이 지옥이었다. 그곳은 타인의 살아 있는 얼굴을 먹는 자가 고통의 환락에 몸부림치는 곳이었다.

160p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논리를 해체시킨 그녀의 무의식적 중얼거림은 계시적 묵시록처럼 어느 문장 하나 버릴 것이 없다. 지각한 것이 내 세계의 전부라면 그녀는 지각할 수 없는 죽음 이후에 발현될 생명에 대한 우로보로스적 사유를 보여준다.

나는 내게 일어난 사건을 창조해낼 것이다. 삶은 다시 말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을 살기란 불가능하다. 나는 삶을 창조해 내야 하리라. 거짓 없이. 창조해 내기, 맞다.

(중략)

이해하는 것은 창조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 유일한 방식이다. 나는 무선 신호를 번역하게 될 것이다. 미지의 신호를 내가 알지 못하는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다. 이 신호들의 의미가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면서. 나는 몽유병의 언어로 말하게 될 것이다. 내가 잠에서 깨어나면, 더 이상 언어가 아니게 될 언어로.

25p

위대한 공포는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내면을 향해 주의를 돌리고 자기 자신의 조심스러움을 더듬거리는 눈먼 자가 되어, 나는 처음으로 온전히 오직 본능에 의해 인도되는 느낌을 가졌다. 그리하여 마침내 저열하고 총체적이며 한없이 달콤한 본능의 위대함을 처음으로 알아버린 사람처럼, 나는 쾌감에 전율했다. 마침내, 스스로의 내부에서, 나 자신보다 더욱 위대한 위대함을 발견한 것처럼. 나는 생애 처음으로 샘물처럼 순결한 증오에 흠씬 취했다. 나는 처음으로, 정당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죽이고 싶은 욕구에 흠씬 취했다.

72p

또, 인류의 원죄적 오명을 가진 이브가 삶과 언어, 죽음, 섹스, 관계, 어머니, 이해, 관용, 모성, 도덕, 사회, 윤회적 사고의 울타리를 걷어내고 날것의 벌거벗은 도덕으로 우리 앞에 서서 예언자적 음성으로 중성적 죽음을 얘기한다.

여성이라는 것, 그 또한 내게 부여된 천부적인 자질이다. 나는 천부적 자질의 용이한 면만을 누렸지, 소명의 두려움 따위는 알지 못한다. 그게 두려운 것인가?

38p

나는 내 존재가 무엇인지 몰랐으므로, '아님'이야말로 진실에 가장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나는 최소한 뒷면을 가졌으니까. 나는 최소한 '아닌 것'을 가졌으니까. 나는 최소한 나의 반대를 가졌으니까."

41p

우리는 탈인간이 될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획득할 수 있는 최고의 성취이다. 존재는 인간을 초월한다. 인간으로 존재함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것은 항상 억지로 만들어졌다.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를 기다린다. 그러나 나는 이 알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총체이며, 우리가 갈망하는 진실된 인간화 일 것이라고 느낀다. 그러니까 나는, 죽음을 말하고 있는가? 아니다, 나는 삶을 말하고 있다. 삶은 행복의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닿음의 상태이다.

238p

그녀는 낮인 동시에 밤이며 삶인 동시에 죽음이며, 여자인 동시에 남성으로, 선인 동시에 악으로, 미인 동시에 추함으로 빙의한다. 모든 무녀들의 입에서 나오는 언어가 그러하듯이, 바퀴벌레의 내장을 삼킨 무녀의 입에서 늑대의 침처럼 흘러내리는 언어들, 육식과 살육, 피로 얼룩진 제단 위에서 신의 계시를 받은 육신의 입에서는 인간 삶의 고단했을 문제들 - 타자, 고독, 사랑, 낙태, 존재 등-에 대한 예언적 위로를 건넨다.

고독은, 구하지 않는 것이다. 구하지 않음은 한 인간을 매우 매우 외롭게 만든다. 아, 구함을 통해서 사람은 고립되지 않는다.

225p

그리하여 나는, 산다는 것은 -어떤 형태든지 간에- 타인에게 선한 행위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사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사는 것 자체가 위대한 자비이다. 누구든 자신의 삶을 온전히 완전하게 살아내는 것이 곧 타인을 위하는 길이다. 자기 자신의 위대함을 산다면, 그 삶이 타인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독방에서 홀로 이루어질지라도, 그는 제물을 봉헌하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봉헌이다. 개인이 살아낸 모든 삶은 수천수만의 사람들을 위한 선행이다.

234p

이 소설은 너무나 매혹적이고 유혹적이다. 책을 펼치고 중간에 책장을 덮을 수가 없었다. 사우나탕에 앉아서 2시간 동안 넋을 놓고 읽었다. 뜨거운 물에 표피가 익어서 장딴지 살이 아팠다.



문학에 대한 이해를 망치로 깨부순 책이었다. 문학을 안다는 지인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이 작품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한결같이 모르겠다는 답변과 어렵다는 얘기만 했다. 어느 나이 많으신 시인분께서 답해주셨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의식의 흐름으로 쓴 작가라고.



왜 좋으신가요? 느낌이 음악적이고 시적이고 운율이 있잖아. 그런 멋진 상상력이 그냥 좋아. 달무리는 왜 좋은데? 전 어떤 미친년의 묵시적 언어가 마치 고행자가 제 몸을 부수어 샘솟는 동맥혈관 속 피가 심장 박동에 맞추어 뿜어져 나오는 듯하였습니다. 이게 소설인가요?

나도 모르지. 그건 자네가 더 잘 분석하잖아. 분석하고 내게도 알려주게나. ​



카프카의 변신은 인간존재의 실존에 대한 무한한 불안과 권태를 이야기했다. 또 변신에서 바퀴벌레로 변한 그레고르 잠자를 통해서 물질 추구적 인간에 대한 실존을 비판했다. 리스펙토르는 물질 추구적 세상뿐만 아니라 현대에 내재하는 토템과 신화적 여성상을 해체시키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즉, 미친놈들로 가득 찬 세상에 미친년으로 매우 멋지게 응대해 준다. 이게 그녀의 통쾌한 실존적 삶이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강은 분만과 동시에 죽은 언니의 '흰 ' 죽음을 여성의 숙명으로 인식하였다.

리스펙토르는 뱃속 태아의 죽음을 숙명으로부터 환원시켜 생명으로 탈바꿈 시켰다. 죽음이 곧 삶이고 삶이 곧 죽음이라는, 여성은 결단코 원죄를 자행한 적이 없으며 지옥을 창조하지 않았다고, 그녀는 지옥을 예찬한다. 왜냐하면, 현실이 지옥이기에.



저주받은 무녀로서 여성과 남성들에게 외친다. 그 종교적 제의의 환상에서 깨어나라고, 제단을 내려와 너의 삶을 죽어가라고. 현존의 지옥에서 벗어나 서구적 이데올로기가 빗어낸 그 지옥(천국)으로 가라고.



그녀의 묵시록에서 따뜻한 지성적 휴머니즘이 흘러나온다.

아, 내 사랑, 당신은 궁핍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우리의 더 위대한 운명이므로. 사랑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치명적이다. 사랑은 사랑의 궁핍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고유한 속성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지속적인 욕망의 쇄신이 보장된다. 사랑은 이미 있다. 사랑은 변함없이 늘 있어왔다. 필요한 것은 은총의 일격뿐이다. 그것은 수난이라고 불린다.

236p


그녀의 이 책이 오랜만에 망치가 되어 주었다. 번역된 그녀의 책들을 모두 소장하고 싶어서 주문했다. 출판사에 감사드린다. 번역하신 작가님도 이 책이 어려워서 당최 뭔 말 하는지 모르지만 좋았다고만 하셨다.

모든 분들께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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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3
잉에보르크 바흐만 지음, 남정애 옮김 / 민음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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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말리나


바슐라르는 그의 책 공기와 꿈에서 문학 이미지는 독자가 자신의 경험과 결합하여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상상력을 더욱 활성화시키며 독서 경험을 풍요롭고 다채롭게 한다고 말한다. 또한, 문학은 현실을 반영하는 단계를 넘어, 우리들을 다른 세계로 이끄는 역할을 하며, 문학이 제공하는 상상적 여정이 우리들의 정신적 성장을 돕는다고 얘기한다.



스토리텔링 위주의 소설적 플롯에 익숙하던 내게 요즘은 읽는 책들이 대부분 의식의 흐름적 기법에 입각한 책들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 마르셀 프루스트부터 제임스 조이스, 토니 모리슨, 윌리엄 포크너, 버지니아 울프, 사무엘 베케트,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그리고 잉에보르크 바흐만의 이 소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심리소설과 의식의 흐름적 형식이 혼재된 형식을 따르고 있다고 본다. 나는 이 소설을 매우 고도의 정신 심리적 소설로 여성의 내면세계와 혼돈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일종의 연구 보고서로 읽혔다.



과연 이 어마어마한 철학과 심리학과 정신 분석학적 요소들을 담아 놓은 지하벙커에서 끄집어 낼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가진 독자들이 얼마나 될까가 궁금해졌다. 나는 이 책을 지난달에 이어 두 번을 읽고서야 간신히 바흐만의 의도를 찾아낼 수 있었다.





바흐만의 문체는 서정적이면서도 강렬하며, 깊은 감정의 바닥을 자극하며,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시도하고, 의식 흐름을 통해 내면의 세계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이 과정에서 바흐만은 여성의 정체성과 사회적 억압과 폭력에 대한 비판적 시각, 정신 분석학자인 칼 융의 ‘아니무스’개념을 도입시키면서 반전적 매력과 깊은 여운을 남긴다.



이 책 '말리나'는 단순한 스토리텔링을 넘어 인간 상호 간의 복잡한 감정과 내면의 고통을 깊이 사유하며 철학적·심리학적 문제들을 정교하게 짜인 구조적 장치 속에 녹여낸 문학적으로 매우 완성도 높게 표현한 작품이다. 이런 문학적 실험과 혁신을 통해 문학이 어떻게 개인의 심리적 경험과 내면적 성찰을 깊이 있게 탐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의식의 흐름적 기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더불어 ‘타자‘에 대한 이해와 사랑의 존재적 가능성을 고민한 매우 독특하면서도 너무나 멋진 작품이었다. 조금 난해하기는 하지만 저자가 설정해 놓은 복선을 캐치해 내면 매우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으며 바흐만의 독창적인 문체와 서사 기법이 참으로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등장인물 분석과 스토리 해석 ​



소설은 주인공인 여성 '나'와 그녀의 연인 말리나, 그리고 이반이라는 또 다른 남성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통해 이야기는 전개되는데 '말리나'는 단순한 삼각관계를 넘어 인간 존재의 불안과 내면의 갈등을 드러내며, 주인공의 심리적 혼란을 일종의 몽환적이고 초현실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읽기가 매우 난해하고 해석하는데 높은 집중력이 필요하다.



우선, 주인공 ‘나’는 비엔나에 사는 여성 작가로 매우 가부장적이고 고전적 여인상에 입각한 연애관을 가지고 있으며 이반이라는 두 자녀를 둔 돌싱남 이반을 사랑한다. 또한, 그녀는 자신의 일에 대한 고뇌, 창작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 차 있으며 자신의 정체성과 여성으로서의 존재성에 대한 끊임없는 갈등으로 늘 두통에 시달린다.

비록 이반이 나를 위해 창조된 것이 틀림없다 하더라도, 나 혼자서만 그를 독차지하겠다고 요구할 수는 없다.

36p

그와 함께 있으면 나는 조용해진다. 그를 상대로 말할 때면 응, 곧, 그렇게, 그리고, 그러나, 그럼, 아! 같은 별것 아닌 말들이 어떤 재미있는 소설이나 우화보다도 백배나 더 많은 의미를 지닌 채 내 마음속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친구들이나 동료들이라면 내가 겉으로만 그런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말싸움, 몸짓이나 변덕, 남들 눈에 띄어 보려는 유별난 행동 같은 것들보다 이 별것 아닌 말 한마디가 천 배나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이반에게 일부러 꾸미거나 그런 척하는 행동은 하나도 하지 않는다. 그가 먹고 마실 것을 준비할 때나 가끔씩 몰래 그의 신발을 닦아 놓을 때, 얼룩 제거제로 그의 윗도리를 손질할 때면 나는 오히려 그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46p

말리나는 주인공과 함께 사는 남성으로 이성적이고 안정적인 인물이다. 그는 주인공의 일상적인 삶의 일부이며 그녀의 내면세계와 늘 연결된 존재로 그려지는 등 매우 이상적인 남성상을 보여준다.​



보편적 남성성을 대표하는 이반은 주인공이 사랑에 빠진 인물로 열정적이고 감정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그는 연인에 대한 사랑이나 이해보다는 피상적 만남을 선호하는 듯하며 자신의 내면을 연인에게 절대 내어 보이려 하지 않고 가부장적 체계에 순응해서 살아가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반에게 물어본다. 사랑에 대해서 한 번쯤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 전에는 어떻게 생각했고,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담배를 피우던 이반은 재를 그냥 바닥에 털고는 아무 말도 없이 자기 신발을 찾는다. 두 짝을 다 찾아낸 후 나를 돌아다본다.

뭐라고 말하기 힘든 모양이다.



"그게 사람들의 깊이 생각해야 하는 거야? 도대체 내가 사랑에 관해 무슨 생각을 해야 하지? 그걸 표현할 말이 너한테 필요해? 날 함정에 빠뜨리려는 거지. 아가씨?"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하지만 만약 네가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면……. 그럼 넌 아무것도 못 느껴? 경멸이나 혐오 같은 것도? 만약 나도 아무 느낌이 없다면?"

나는 애가 타서 묻는다. 이반의 목에 매달리고 싶다. 그렇게 해서 그가 나한테서 그렇게 멀리, 단 1미터도 떨어지지 않도록. 겨우 처음 꺼내 물어본 이 말 때문에 그가 내게서 멀어지지 않도록

183p



빈에 살고 있는 작가인 '나'는 헝가리 출신의 자녀 둘을 가진 돌싱남 이반을 사랑한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나'에게 이 사랑은 삶의 모든 것이지만, 이반은 이 사랑을 한낱 즐거움으로 간주하고 '나'에게도 그냥 ‘유희’에 머물기를 유구한다. 그런 이반을 더 깊고 낭만적인 연인으로 만들기 위해 '나'는 자신의 감정을 포장한 체 그가 원하는 대로 따른다. 이반에게 더 다가갈수록 그는 그만큼 멀어지고 결코 타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절망을 깨닫는다.



다른 남자들과 달리 이반은 내가 전화 한 통화에 목을 매거나, 그를 위해 시간을 내거나, 그의 여가 시간에 맞춰 짬을 내는 것을 참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몰래 그런 일들을 하고, 그

에게 나를 맞추고, 그의 가르침들을 생각한다. 그가 가르쳐 주는 것들 중에는 내가 생전 처음 듣는 것들이 많다.

48p

이반은 나에 대한 경고를 받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누구와 사귀고 있는지도 모르고, 자신이 보고 있는 현상들이 허상일 수 있다는 것도 모른다. 이반을 헷갈리게 하고 싶지는 않지만,

내가 이중적인 존재라는 사실, 그러니까 내가 말리나의 피조물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그는 결코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



134p



그러면서 그녀가 왜 그토록 평범한 가정을 꿈꾸었는지를 폭력적이고 가부장적 아버지에 대한 과거와 망상을 조우하면서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악몽에 시달린다. 그리고 악몽의 끝자락에 이르러 '제3의 남자'인 아버지가 자신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니라, 그보다도 더 크고 원형적 존재로서 종교적·구조적 억압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도 나는 "이번에는 장소가 빈이 아냐"라고 말해준다. 이 장소는 어디에나 다 있는 곳이면서 동시에 그 어디에도 없는 곳이다. 시간도 오늘이 아니다. 시간이란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제였을 수도 있고, 그보다 더 오래되었을 수도 있으며, 다시 반복될 수도 있고, 항상 그럴 수도 있으며, 어쩌면 아예 없었던 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서로 뒤섞여 있는 시간들에 대한 척도는 존재하지 않으며, 시간 속에 존재한 적이 없는 일이 벌어지는 비시간(時間)에 대한 척도도 존재하지

231p

핸들 위에 머리를 박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머리채를 잡아당긴다. 아버지다. 어떤 여자가 나를 차 밖으로 끌어내서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는데, 그 얼굴에서 천이 그만 흘러내린다. 그녀의 얼굴을 봤다. 내가 그녀를 알아보고 울부짖자 그녀는 황급히 천으로 다시 얼굴을 가린다. 저 둘이서 나를 죽일 것이다.

269P

이번에도 아버지는 어머니의 얼굴을 하고 있다. 언제가 아버지고, 언제가 어머니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점점 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둘 중 누구도 아닌 제심자라는 의심이 든다.

309p

"당신이 누군지 알아요."

나는 이제 모든 것을 다 이해했다.

....(중략)....

나: 그건 내 아버지가 아냐 나의 살인자야. 말리나는 대답이 없다.

309P

이 모든 것을 알게 된 ‘나’는 내 안의 남성으로서 존재하는 또 다른 ‘나’인 ‘아니무스‘인 말리나와 많은 대화를 통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게 된다. 그러면서 쇤베르크의 ”달에 홀린 피에로“의 일부분, '내 모든 불만을 내던지고, 저 먼 축복의 땅을 꿈꾸네........ 오, 동화 시절의 옛 향기!'를 들으며 내면의 벽 속으로 숨어버린다. ’나‘는 이반을 내 안에서 죽이지 못하지만 나의 또 다른 자아인 말리나를 통해서 이반을 죽이면서 소설은 끝을 맺는다.



결국, 이 소설은 주인공 ’나’와 이반과의 관계에 대한 내적 독백과 심리적 갈등을 ‘나’와 내면에 잠재된 남성적 ‘나’인 말리나와의 고백을 통한 자신의 정체성을 추구해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내 안에서 말리나가 속삭인다. “그들을 죽여, 그들을 죽여."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속삭임이 내 안에서 울린다. 이반과 그 애들은 절대로 안 돼. 그들은 서로 함께 하나를 이루고 있어. 난 그들을 죽일 수 없다고." 정해진 운명대로라면, 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이반은 더 이상 이반이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 누구의 마음도 움직이게 하지 않았다.

416p

말리나가 자기 주변을 찬찬히 둘러본다. 그의 눈에는 모든 것이 보이지만, 그의 귀에는 이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녹색 테두리가 둘러진 그의 작은 찻잔만이 그대로 놓여 있다. 그 찻잔 하나만이. 그가 혼자라는 증거다. 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말리나는 망설이다가 전화기 쪽으로 간다. 이반이라는 것을 그도 안다. 말리나가 말한다.

"여보세요?" 그러고는 다시 잠시 동안 아무 말도 않는다.

뭐라고요?

아니라고요?

그렇다면 제가 제대로 말하지 않았나 봅니다.

착각하신 게 틀림없습니다.

여기 번호는 723144입니다.

네, 웅가르 가 6번지.

아뇨, 없습니다.

여기 여자는 없습니다.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여기 살았던 적이 전혀 없단 말입니다.

저 외엔 여기 아무도 없습니다.

제 번호는 723144입니다.

제 이름이요?

말리나.

발소리. 계속되는 말리나의 발소리. 점점 낮아지다 거의 들리지 않는 발소리. 마침내 정적, 경보도, 사이렌도 울리지 않는다. 아무도 도와주러 오지 않는다. 구급차도, 경찰도 오지 않는다. 이건 아주 오래된, 아주 두꺼운 벽이다. 그 누구도 이 벽 밖으로 빠져나갈 수 없고, 그 누구도 이 벽을 부숴 열 수 없으며, 이 벽으로부터는 이제 더 이상 그 어떤 소리도 새어 나갈 수 없다.

그건 살인이었다.

444~445p

★★★★★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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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H.에 따른 수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배수아 옮김 / 봄날의책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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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문명에서 여성은 아름다움과 미, 곡선, 포용, 생명 탄생, 항상성 유지, 원죄, 무지, 죽음, 풍요, 대지, 바다, 유혹, 변덕 등으로, 남성은 직선과 이것이 함의하는 대립과 폭력, 발전과 파괴, 이성, 하늘, 바람, 떠남, 회귀 등에 자주 비유되어 왔다. 또한 서구에서의 여성은 풍요와 궁핍, 창조와 파괴, 현묘함과 어리석음의 상징하기도 하다.



특히, 인류의 원죄를 잉태시키고 질투 어린 판도라 상자에서 솟아난 악의 원흉이며 매혹과 유혹으로 남성 파괴적 기원을 가졌다고 상징한다. 그들의 토템과 신화는 이런 여성상을 적나라하게 표출하고 있다.



구약성경 또한 여성에 대한 이해는 팜므파탈적 파멸이자, 유혹의 대상으로 그려지고 있다.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한 헤로디아의 딸로 살로메가 그랬고,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내 이세벨, 블레셋 사람들의 유혹에 넘어가 삼손의 힘의 비밀을 알아내어 그를 배신한 삼손의 연인 데릴라, 요셉을 유혹하려고 했으나 거절당하자 그를 모함하여 감옥에 가게 만든 요셉의 주인인 포티발의 아내가 그러했다.



수메르 문명에서 이집트, 그리스, 로마, 중세를 거친 서양 문명은 여성을 선악과와 처녀 잉태, 뱀과 달, 메두사와 팜므 파탈적 치명적 악으로 인식했으며 사회적 신분 또한 노예와 같거나 그보다 미천한 존재로 간주하였다.



그것이 성경을 포함한 문학을 통해서 서구적 상상력에 녹아들게 되었다. 즉, 여자의 실존은 처음부터 악과 무지 그리고 원죄적 존재자에 지나지 않았다.



19세기에 들어 여류 작가들이 등장하면서 이런 팜므파탈적 악으로서 여성상에 저항하기 시작하며 탈-여성상을 추구하는 사조가 문학과 예술작품들을 통해서 출현한다.



여기 한 여자가 있다.

아파트 맨 위층 펜트하우스에 사는 부유한 한 여자가. 그녀는 가정부가 떠난 집에 혼자 있다가 처음으로 가 본 가정부가 쓰던 뒷방 장롱 안에서 나체 벽화와 바퀴벌레를 발견한다. 나체 그림 속 인물은 바로 자신이었고 곧이어 출현한 바퀴벌레, 그녀는 바퀴벌레를 옷장 문짝 사이에 끼워 죽이려 한다. 내장이 튀어나온 바퀴벌레는 죽지 않고 삶과 죽음 사이 경계에 위치한다.

그리고 창문 밖으로 담배꽁초를 몰래 버렸다.

이 소설의 줄거리다.



사탄을 숭배하는 마녀가 된 여자는 무녀로 빙의하여 양심과 도덕을 말하고 바퀴벌레의 죽음과 내장을 삼키는 토템적 의식을 행하고, 종교와 타자, 사랑, 뱃속에서 죽어간 자신의 태아, 낯선 자신의 이름 G.H, 원죄와 지옥과 우로보로스적 삶과 죽음의 영원회귀와 무의식적 외침 즉, 인류가 여성을 학대한 그 모든 악과 추함에 대한 제의를 행한다. 희생 번제로 바쳐진 바퀴벌레의 내장을 삼키는 의식으로.​​



"그래서 나는 바퀴벌레를 넘어설 더 고약한 무언가를 삼키고 고약한 무엇이 된 다음, 나에게 말을 걸어와도 내가 들을 수 없을 누군가가 듣게 될 무엇인가를 끄적이게 될 것이다. 아니면 나만 듣게 될 말들을."​​



늙은 무녀가 신의 제의 단상에 올라 희생 번재물인 내장을 삼키고 읊조리는 예언처럼 삶과 죽음, 그리고 고통과 죽음으로부터 구원시키는 여성 부족의 구원자처럼 그녀는 인간의 죽음 너머의 언어에 대해 예언자적 묵시를 말한다.

그리고 할 말이 한마디도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할 말이 한마디도 없다. 그렇다면 왜 침묵하지 않는 건지? 그러나 내가 억지로라도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면, 침묵이 나를 영원히 덮쳐버릴 것이다. 말과 형식이란 지푸라기에 매달린 채 나는 침묵의 파도 위를 떠돌게 된다.

24p

그런데 그때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힘이 내게 있음을 불현듯 깨달은 것이다. 내면에서 고동치는 위대함이 나를 압도했다. 용기의 위대함이었다. 나를 사로잡고 있던 공포가 결국 내게 용기를 심어준 것이다.

71p

이건 미친 거야, 하고 나는 눈을 감은 채 생각했다. 그러나 한낱 먼지에서 태어났다는 느낌은 도저히 부인할 수 없어서, 내가 정확히 알고 있는 생각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건 미친 게 아니라, 세상에, 미친 것보다 훨씬 더 나쁜, 즉 소름 끼치는 진실이라는 사실을. 그런데 왜 소름 끼치는가? 진실은 말 한마디 없이 이전의 내가 마찬가지로 말 한마디 없이 익숙하게만 여기던 것 모두를 전복해버린다.

78p

아르테미스의 분노로 아가멤논이 예언자인 칼카스가 그리스 군의 총사령관 아가멤논의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말했을 때, 아가멤논은 딸을 희생시켜야 하는 아비의 마음과 그리스 군의 총사령관의 의무 사이에서 극심한 내적 갈등을 겪다 결국 아가멤논은 공적인 의무감으로 그의 딸 이피게네이아를 희생 제물로 던지듯이 주인공 G.H는 2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묵시록을 내뱉고서 결국 번제물인 내장을 입안에 넣으므로 죽음을 삼킨다.​​



신은 모든 모순을 포괄하므로, 그 무엇도 신에게 모순되지 않는다.

....(중략)....

삶의 본질적인 오류는 바퀴벌레를 보고 역겨워하는 것이다. 나병 환자에게 입 맞추기를 역겨워하는 일, 그것은 내 안의 원초적인 삶을 놓치는 것을 의미한다. 역겨움이란 나 자신에 대한 부정, 내가 만들어진 원료에 대한 부정이기 때문이다.

220~225p

지옥은 살아 있는 피투성이 고기를 물어뜯고 먹는 입이며, 먹히는 자는 즐거운 눈으로 울부짖는다. 지옥은 물질의 환락인 고통이다. (중략) 고통의 잔인한 수용, 자기 연민의 엄숙한 결핍, 자신보다 삶의 의례를 더 많이 사랑하기, 이것이 지옥이었다. 그곳은 타인의 살아 있는 얼굴을 먹는 자가 고통의 환락에 몸부림치는 곳이었다.

160p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논리를 해체시킨 그녀의 무의식적 중얼거림은 계시적 묵시록처럼 어느 문장 하나 버릴 것이 없다. 지각한 것이 내 세계의 전부라면 그녀는 지각할 수 없는 죽음 이후에 발현될 생명에 대한 우로보로스적 사유를 보여준다.

나는 내게 일어난 사건을 창조해낼 것이다. 삶은 다시 말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을 살기란 불가능하다. 나는 삶을 창조해 내야 하리라. 거짓 없이. 창조해 내기, 맞다.

(중략)

이해하는 것은 창조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 유일한 방식이다. 나는 무선 신호를 번역하게 될 것이다. 미지의 신호를 내가 알지 못하는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다. 이 신호들의 의미가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면서. 나는 몽유병의 언어로 말하게 될 것이다. 내가 잠에서 깨어나면, 더 이상 언어가 아니게 될 언어로.

25p

위대한 공포는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내면을 향해 주의를 돌리고 자기 자신의 조심스러움을 더듬거리는 눈먼 자가 되어, 나는 처음으로 온전히 오직 본능에 의해 인도되는 느낌을 가졌다. 그리하여 마침내 저열하고 총체적이며 한없이 달콤한 본능의 위대함을 처음으로 알아버린 사람처럼, 나는 쾌감에 전율했다. 마침내, 스스로의 내부에서, 나 자신보다 더욱 위대한 위대함을 발견한 것처럼. 나는 생애 처음으로 샘물처럼 순결한 증오에 흠씬 취했다. 나는 처음으로, 정당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죽이고 싶은 욕구에 흠씬 취했다.

72p

또, 인류의 원죄적 오명을 가진 이브가 삶과 언어, 죽음, 섹스, 관계, 어머니, 이해, 관용, 모성, 도덕, 사회, 윤회적 사고의 울타리를 걷어내고 날것의 벌거벗은 도덕으로 우리 앞에 서서 예언자적 음성으로 중성적 죽음을 얘기한다.

여성이라는 것, 그 또한 내게 부여된 천부적인 자질이다. 나는 천부적 자질의 용이한 면만을 누렸지, 소명의 두려움 따위는 알지 못한다. 그게 두려운 것인가?

38p

나는 내 존재가 무엇인지 몰랐으므로, '아님'이야말로 진실에 가장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나는 최소한 뒷면을 가졌으니까. 나는 최소한 '아닌 것'을 가졌으니까. 나는 최소한 나의 반대를 가졌으니까."

41p

우리는 탈인간이 될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획득할 수 있는 최고의 성취이다. 존재는 인간을 초월한다. 인간으로 존재함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것은 항상 억지로 만들어졌다.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를 기다린다. 그러나 나는 이 알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총체이며, 우리가 갈망하는 진실된 인간화 일 것이라고 느낀다. 그러니까 나는, 죽음을 말하고 있는가? 아니다, 나는 삶을 말하고 있다. 삶은 행복의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닿음의 상태이다.

238p

그녀는 낮인 동시에 밤이며 삶인 동시에 죽음이며, 여자인 동시에 남성으로, 선인 동시에 악으로, 미인 동시에 추함으로 빙의한다. 모든 무녀들의 입에서 나오는 언어가 그러하듯이, 바퀴벌레의 내장을 삼킨 무녀의 입에서 늑대의 침처럼 흘러내리는 언어들, 육식과 살육, 피로 얼룩진 제단 위에서 신의 계시를 받은 육신의 입에서는 인간 삶의 고단했을 문제들 - 타자, 고독, 사랑, 낙태, 존재 등-에 대한 예언적 위로를 건넨다.

고독은, 구하지 않는 것이다. 구하지 않음은 한 인간을 매우 매우 외롭게 만든다. 아, 구함을 통해서 사람은 고립되지 않는다.

225p

그리하여 나는, 산다는 것은 -어떤 형태든지 간에- 타인에게 선한 행위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사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사는 것 자체가 위대한 자비이다. 누구든 자신의 삶을 온전히 완전하게 살아내는 것이 곧 타인을 위하는 길이다. 자기 자신의 위대함을 산다면, 그 삶이 타인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독방에서 홀로 이루어질지라도, 그는 제물을 봉헌하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봉헌이다. 개인이 살아낸 모든 삶은 수천수만의 사람들을 위한 선행이다.

234p

이 소설은 너무나 매혹적이고 유혹적이다. 책을 펼치고 중간에 책장을 덮을 수가 없었다. 사우나탕에 앉아서 2시간 동안 넋을 놓고 읽었다. 뜨거운 물에 표피가 익어서 장딴지 살이 아팠다.



문학에 대한 이해를 망치로 깨부순 책이었다. 문학을 안다는 지인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이 작품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한결같이 모르겠다는 답변과 어렵다는 얘기만 했다. 어느 나이 많으신 시인분께서 답해주셨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의식의 흐름으로 쓴 작가라고.



왜 좋으신가요? 느낌이 음악적이고 시적이고 운율이 있잖아. 그런 멋진 상상력이 그냥 좋아. 달무리는 왜 좋은데? 전 어떤 미친년의 묵시적 언어가 마치 고행자가 제 몸을 부수어 샘솟는 동맥혈관 속 피가 심장 박동에 맞추어 뿜어져 나오는 듯하였습니다. 이게 소설인가요?

나도 모르지. 그건 자네가 더 잘 분석하잖아. 분석하고 내게도 알려주게나. ​



카프카의 변신은 인간존재의 실존에 대한 무한한 불안과 권태를 이야기했다. 또 변신에서 바퀴벌레로 변한 그레고르 잠자를 통해서 물질 추구적 인간에 대한 실존을 비판했다. 리스펙토르는 물질 추구적 세상뿐만 아니라 현대에 내재하는 토템과 신화적 여성상을 해체시키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즉, 미친놈들로 가득 찬 세상에 미친년으로 매우 멋지게 응대해 준다. 이게 그녀의 통쾌한 실존적 삶이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강은 분만과 동시에 죽은 언니의 '흰 ' 죽음을 여성의 숙명으로 인식하였다.

리스펙토르는 뱃속 태아의 죽음을 숙명으로부터 환원시켜 생명으로 탈바꿈 시켰다. 죽음이 곧 삶이고 삶이 곧 죽음이라는, 여성은 결단코 원죄를 자행한 적이 없으며 지옥을 창조하지 않았다고, 그녀는 지옥을 예찬한다. 왜냐하면, 현실이 지옥이기에.



저주받은 무녀로서 여성과 남성들에게 외친다. 그 종교적 제의의 환상에서 깨어나라고, 제단을 내려와 너의 삶을 죽어가라고. 현존의 지옥에서 벗어나 서구적 이데올로기가 빗어낸 그 지옥(천국)으로 가라고.



그녀의 묵시록에서 따뜻한 지성적 휴머니즘이 흘러나온다.

아, 내 사랑, 당신은 궁핍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우리의 더 위대한 운명이므로. 사랑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치명적이다. 사랑은 사랑의 궁핍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고유한 속성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지속적인 욕망의 쇄신이 보장된다. 사랑은 이미 있다. 사랑은 변함없이 늘 있어왔다. 필요한 것은 은총의 일격뿐이다. 그것은 수난이라고 불린다.

236p


그녀의 이 책이 오랜만에 망치가 되어 주었다. 번역된 그녀의 책들을 모두 소장하고 싶어서 주문했다. 출판사에 감사드린다. 번역하신 작가님도 이 책이 어려워서 당최 뭔 말 하는지 모르지만 좋았다고만 하셨다.

모든 분들께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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