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리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3
잉에보르크 바흐만 지음, 남정애 옮김 / 민음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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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말리나


바슐라르는 그의 책 공기와 꿈에서 문학 이미지는 독자가 자신의 경험과 결합하여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상상력을 더욱 활성화시키며 독서 경험을 풍요롭고 다채롭게 한다고 말한다. 또한, 문학은 현실을 반영하는 단계를 넘어, 우리들을 다른 세계로 이끄는 역할을 하며, 문학이 제공하는 상상적 여정이 우리들의 정신적 성장을 돕는다고 얘기한다.



스토리텔링 위주의 소설적 플롯에 익숙하던 내게 요즘은 읽는 책들이 대부분 의식의 흐름적 기법에 입각한 책들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 마르셀 프루스트부터 제임스 조이스, 토니 모리슨, 윌리엄 포크너, 버지니아 울프, 사무엘 베케트,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그리고 잉에보르크 바흐만의 이 소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심리소설과 의식의 흐름적 형식이 혼재된 형식을 따르고 있다고 본다. 나는 이 소설을 매우 고도의 정신 심리적 소설로 여성의 내면세계와 혼돈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일종의 연구 보고서로 읽혔다.



과연 이 어마어마한 철학과 심리학과 정신 분석학적 요소들을 담아 놓은 지하벙커에서 끄집어 낼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가진 독자들이 얼마나 될까가 궁금해졌다. 나는 이 책을 지난달에 이어 두 번을 읽고서야 간신히 바흐만의 의도를 찾아낼 수 있었다.





바흐만의 문체는 서정적이면서도 강렬하며, 깊은 감정의 바닥을 자극하며,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시도하고, 의식 흐름을 통해 내면의 세계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이 과정에서 바흐만은 여성의 정체성과 사회적 억압과 폭력에 대한 비판적 시각, 정신 분석학자인 칼 융의 ‘아니무스’개념을 도입시키면서 반전적 매력과 깊은 여운을 남긴다.



이 책 '말리나'는 단순한 스토리텔링을 넘어 인간 상호 간의 복잡한 감정과 내면의 고통을 깊이 사유하며 철학적·심리학적 문제들을 정교하게 짜인 구조적 장치 속에 녹여낸 문학적으로 매우 완성도 높게 표현한 작품이다. 이런 문학적 실험과 혁신을 통해 문학이 어떻게 개인의 심리적 경험과 내면적 성찰을 깊이 있게 탐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의식의 흐름적 기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더불어 ‘타자‘에 대한 이해와 사랑의 존재적 가능성을 고민한 매우 독특하면서도 너무나 멋진 작품이었다. 조금 난해하기는 하지만 저자가 설정해 놓은 복선을 캐치해 내면 매우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으며 바흐만의 독창적인 문체와 서사 기법이 참으로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등장인물 분석과 스토리 해석 ​



소설은 주인공인 여성 '나'와 그녀의 연인 말리나, 그리고 이반이라는 또 다른 남성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통해 이야기는 전개되는데 '말리나'는 단순한 삼각관계를 넘어 인간 존재의 불안과 내면의 갈등을 드러내며, 주인공의 심리적 혼란을 일종의 몽환적이고 초현실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읽기가 매우 난해하고 해석하는데 높은 집중력이 필요하다.



우선, 주인공 ‘나’는 비엔나에 사는 여성 작가로 매우 가부장적이고 고전적 여인상에 입각한 연애관을 가지고 있으며 이반이라는 두 자녀를 둔 돌싱남 이반을 사랑한다. 또한, 그녀는 자신의 일에 대한 고뇌, 창작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 차 있으며 자신의 정체성과 여성으로서의 존재성에 대한 끊임없는 갈등으로 늘 두통에 시달린다.

비록 이반이 나를 위해 창조된 것이 틀림없다 하더라도, 나 혼자서만 그를 독차지하겠다고 요구할 수는 없다.

36p

그와 함께 있으면 나는 조용해진다. 그를 상대로 말할 때면 응, 곧, 그렇게, 그리고, 그러나, 그럼, 아! 같은 별것 아닌 말들이 어떤 재미있는 소설이나 우화보다도 백배나 더 많은 의미를 지닌 채 내 마음속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친구들이나 동료들이라면 내가 겉으로만 그런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말싸움, 몸짓이나 변덕, 남들 눈에 띄어 보려는 유별난 행동 같은 것들보다 이 별것 아닌 말 한마디가 천 배나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이반에게 일부러 꾸미거나 그런 척하는 행동은 하나도 하지 않는다. 그가 먹고 마실 것을 준비할 때나 가끔씩 몰래 그의 신발을 닦아 놓을 때, 얼룩 제거제로 그의 윗도리를 손질할 때면 나는 오히려 그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46p

말리나는 주인공과 함께 사는 남성으로 이성적이고 안정적인 인물이다. 그는 주인공의 일상적인 삶의 일부이며 그녀의 내면세계와 늘 연결된 존재로 그려지는 등 매우 이상적인 남성상을 보여준다.​



보편적 남성성을 대표하는 이반은 주인공이 사랑에 빠진 인물로 열정적이고 감정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그는 연인에 대한 사랑이나 이해보다는 피상적 만남을 선호하는 듯하며 자신의 내면을 연인에게 절대 내어 보이려 하지 않고 가부장적 체계에 순응해서 살아가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반에게 물어본다. 사랑에 대해서 한 번쯤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 전에는 어떻게 생각했고,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담배를 피우던 이반은 재를 그냥 바닥에 털고는 아무 말도 없이 자기 신발을 찾는다. 두 짝을 다 찾아낸 후 나를 돌아다본다.

뭐라고 말하기 힘든 모양이다.



"그게 사람들의 깊이 생각해야 하는 거야? 도대체 내가 사랑에 관해 무슨 생각을 해야 하지? 그걸 표현할 말이 너한테 필요해? 날 함정에 빠뜨리려는 거지. 아가씨?"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하지만 만약 네가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면……. 그럼 넌 아무것도 못 느껴? 경멸이나 혐오 같은 것도? 만약 나도 아무 느낌이 없다면?"

나는 애가 타서 묻는다. 이반의 목에 매달리고 싶다. 그렇게 해서 그가 나한테서 그렇게 멀리, 단 1미터도 떨어지지 않도록. 겨우 처음 꺼내 물어본 이 말 때문에 그가 내게서 멀어지지 않도록

183p



빈에 살고 있는 작가인 '나'는 헝가리 출신의 자녀 둘을 가진 돌싱남 이반을 사랑한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나'에게 이 사랑은 삶의 모든 것이지만, 이반은 이 사랑을 한낱 즐거움으로 간주하고 '나'에게도 그냥 ‘유희’에 머물기를 유구한다. 그런 이반을 더 깊고 낭만적인 연인으로 만들기 위해 '나'는 자신의 감정을 포장한 체 그가 원하는 대로 따른다. 이반에게 더 다가갈수록 그는 그만큼 멀어지고 결코 타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절망을 깨닫는다.



다른 남자들과 달리 이반은 내가 전화 한 통화에 목을 매거나, 그를 위해 시간을 내거나, 그의 여가 시간에 맞춰 짬을 내는 것을 참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몰래 그런 일들을 하고, 그

에게 나를 맞추고, 그의 가르침들을 생각한다. 그가 가르쳐 주는 것들 중에는 내가 생전 처음 듣는 것들이 많다.

48p

이반은 나에 대한 경고를 받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누구와 사귀고 있는지도 모르고, 자신이 보고 있는 현상들이 허상일 수 있다는 것도 모른다. 이반을 헷갈리게 하고 싶지는 않지만,

내가 이중적인 존재라는 사실, 그러니까 내가 말리나의 피조물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그는 결코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



134p



그러면서 그녀가 왜 그토록 평범한 가정을 꿈꾸었는지를 폭력적이고 가부장적 아버지에 대한 과거와 망상을 조우하면서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악몽에 시달린다. 그리고 악몽의 끝자락에 이르러 '제3의 남자'인 아버지가 자신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니라, 그보다도 더 크고 원형적 존재로서 종교적·구조적 억압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도 나는 "이번에는 장소가 빈이 아냐"라고 말해준다. 이 장소는 어디에나 다 있는 곳이면서 동시에 그 어디에도 없는 곳이다. 시간도 오늘이 아니다. 시간이란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제였을 수도 있고, 그보다 더 오래되었을 수도 있으며, 다시 반복될 수도 있고, 항상 그럴 수도 있으며, 어쩌면 아예 없었던 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서로 뒤섞여 있는 시간들에 대한 척도는 존재하지 않으며, 시간 속에 존재한 적이 없는 일이 벌어지는 비시간(時間)에 대한 척도도 존재하지

231p

핸들 위에 머리를 박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머리채를 잡아당긴다. 아버지다. 어떤 여자가 나를 차 밖으로 끌어내서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는데, 그 얼굴에서 천이 그만 흘러내린다. 그녀의 얼굴을 봤다. 내가 그녀를 알아보고 울부짖자 그녀는 황급히 천으로 다시 얼굴을 가린다. 저 둘이서 나를 죽일 것이다.

269P

이번에도 아버지는 어머니의 얼굴을 하고 있다. 언제가 아버지고, 언제가 어머니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점점 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둘 중 누구도 아닌 제심자라는 의심이 든다.

309p

"당신이 누군지 알아요."

나는 이제 모든 것을 다 이해했다.

....(중략)....

나: 그건 내 아버지가 아냐 나의 살인자야. 말리나는 대답이 없다.

309P

이 모든 것을 알게 된 ‘나’는 내 안의 남성으로서 존재하는 또 다른 ‘나’인 ‘아니무스‘인 말리나와 많은 대화를 통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게 된다. 그러면서 쇤베르크의 ”달에 홀린 피에로“의 일부분, '내 모든 불만을 내던지고, 저 먼 축복의 땅을 꿈꾸네........ 오, 동화 시절의 옛 향기!'를 들으며 내면의 벽 속으로 숨어버린다. ’나‘는 이반을 내 안에서 죽이지 못하지만 나의 또 다른 자아인 말리나를 통해서 이반을 죽이면서 소설은 끝을 맺는다.



결국, 이 소설은 주인공 ’나’와 이반과의 관계에 대한 내적 독백과 심리적 갈등을 ‘나’와 내면에 잠재된 남성적 ‘나’인 말리나와의 고백을 통한 자신의 정체성을 추구해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내 안에서 말리나가 속삭인다. “그들을 죽여, 그들을 죽여."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속삭임이 내 안에서 울린다. 이반과 그 애들은 절대로 안 돼. 그들은 서로 함께 하나를 이루고 있어. 난 그들을 죽일 수 없다고." 정해진 운명대로라면, 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이반은 더 이상 이반이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 누구의 마음도 움직이게 하지 않았다.

416p

말리나가 자기 주변을 찬찬히 둘러본다. 그의 눈에는 모든 것이 보이지만, 그의 귀에는 이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녹색 테두리가 둘러진 그의 작은 찻잔만이 그대로 놓여 있다. 그 찻잔 하나만이. 그가 혼자라는 증거다. 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말리나는 망설이다가 전화기 쪽으로 간다. 이반이라는 것을 그도 안다. 말리나가 말한다.

"여보세요?" 그러고는 다시 잠시 동안 아무 말도 않는다.

뭐라고요?

아니라고요?

그렇다면 제가 제대로 말하지 않았나 봅니다.

착각하신 게 틀림없습니다.

여기 번호는 723144입니다.

네, 웅가르 가 6번지.

아뇨, 없습니다.

여기 여자는 없습니다.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여기 살았던 적이 전혀 없단 말입니다.

저 외엔 여기 아무도 없습니다.

제 번호는 723144입니다.

제 이름이요?

말리나.

발소리. 계속되는 말리나의 발소리. 점점 낮아지다 거의 들리지 않는 발소리. 마침내 정적, 경보도, 사이렌도 울리지 않는다. 아무도 도와주러 오지 않는다. 구급차도, 경찰도 오지 않는다. 이건 아주 오래된, 아주 두꺼운 벽이다. 그 누구도 이 벽 밖으로 빠져나갈 수 없고, 그 누구도 이 벽을 부숴 열 수 없으며, 이 벽으로부터는 이제 더 이상 그 어떤 소리도 새어 나갈 수 없다.

그건 살인이었다.

444~445p

★★★★★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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