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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의 기원 - 세계 질서와 부의 운명을 뒤바꾼 방향의 역사
제리 브로턴 지음, 박세연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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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인류가 만든 방향과 지리의 상징과 비유를 지루하게 나열하는 방식으로 쓰였다. 책을 읽는 재미와 흥미는 없었지만 인용한 책들과 글들에 공감이 가서 좋았다. 책의 완성도는 좋았지만 몰입도를 떨어뜨리는 백화점 상품배열 방식의 서술 구조에 금방 식상함을 느끼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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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의 기원 - 세계 질서와 부의 운명을 뒤바꾼 방향의 역사
제리 브로턴 지음, 박세연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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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점, 그리고 우리가 잃어버린 방향

인류는 오래전부터 하늘과 땅을 관찰하며 방향에 의미를 새겨왔다. 해가 떠오르는 동쪽은 언제나 시작과 탄생의 자리였다. 어둠을 뚫고 솟아오르는 빛은 하루의 문을 여는 동시에 희망과 질서의 표지가 되었고, 그래서 많은 사원과 성당이 동쪽을 향해 지어졌다. 반대로 해가 저무는 서쪽은 쇠퇴와 종결의 자리였다. 태양이 사라지는 풍경은 자연스럽게 죽음과 이행의 서사를 만들었고, 많은 신화 속에서 서쪽은 산 자의 세계와 저승을 가르는 경계로 그려졌다. 남쪽은 따뜻함과 풍요를 상징했다. 햇빛이 넉넉히 내리쬐는 그 방향은 농경과 생명의 활기를 품은 '세상의 한복판'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북쪽은 안정과 불가사의가 공존하는 자리였다. 변치 않는 북극성은 항해자에게 신뢰할 수 있는 기준이 되었지만, 동시에 혹독한 어둠과 추위는 북쪽을 미지의 영역,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경계로 만들었다. 이렇게 인간은 하늘의 별과 태양의 궤적을 관찰하며 방향에 삶과 죽음, 시작과 끝의 이야기를 입혀왔다. 지도 위의 '북'이 '위'가 된 것도 그런 오랜 관측과 관습이 쌓여 자연스러운 것처럼 굳어진 결과였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이 오래된 방향의 언어를 잃어가고 있다. 스마트폰 화면 속 작은 파란 점을 따라 걷는 것이 이제 우리의 일상이다. 수천 년간 하늘과 땅을 관찰하며 쌓아온 방향의 감각은 지도 앱의 화살표 하나로 대체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해가 뜨는 곳과 지는 곳을 헤아리지 않는다. 그저 화면 속 나를 상징하는 점이 어느 쪽으로 움직이는지만 확인할 뿐이다.

이것은 단순한 편리함의 문제가 아니다. 방향을 안다는 것은 곧 세계 속에서 나의 위치를 스스로 가늠하는 능력이었다. 길을 잃어본 경험, 낯선 거리에서 해의 위치로 시간을 짐작하던 감각, 걸으며 몸에 새겨지던 공간의 지도. 이 모든 것이 이제 기술에 위탁된다. 편리해진 만큼, 우리는 세상과 맺던 감각적 관계 하나를 내려놓은 셈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방향이 이제 지리가 아니라 이념의 언어가 되었다는 점이다. '서구'와 '동양', '글로벌 노스'와 '글로벌 사우스' 같은 표현들은 지도상의 위치를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권력과 가치, 우열의 서사를 담은 상징이 되어버렸다. 동쪽이 품었던 탄생의 의미도, 남쪽이 품었던 풍요의 의미도 이제는 정치적 우열의 언어 속에 흡수되어 버렸다. 방향이 정치가 되는 순간, 그것은 소속과 배제, 자부심과 혐오의 경계선으로 쉽게 변질된다.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인지 지도'는 어떤 모양일까. 아마도 그것은 물리적 공간의 지도가 아니라, 이메일 주소와 SNS 계정, 클라우드에 저장된 일정표로 이루어진 지도일 것이다. 우리의 진짜 '주소'는 더 이상 거리와 동네가 아니라 로그인 화면이다. 우리는 실제로 발 딛고 선 땅보다, 화면 속 자신의 위치를 더 자주 확인하며 살아간다. 그 사이 우리를 둘러싼 실제 세계는, 그리고 그 세계가 오랫동안 품어온 방향의 이야기들은 점점 흐릿한 배경이 되어간다.

하지만 이것을 단순히 상실로만 볼 필요는 없을지 모른다. 인류는 언제나 방향을 새로 만들어온 존재였다. 동서남북에 탄생과 죽음, 풍요와 신비를 새긴 것도, 나침반과 자오선을 발명한 것도, 위아래를 나눈 세계지도를 그린 것도 결국은 인간이 만들어낸 상상의 산물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겪는 방향 감각의 재편 역시, 새로운 시대에 맞는 또 다른 방향을 발명해가는 과정일 수 있다. 문제는 그 방향을 기술에게만 전적으로 맡길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우리 스스로 하늘을 보고 바람을 느끼며 길을 찾는 감각을 조금이라도 지켜낼 것인가이다.

결국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파란 점을 따라가는 존재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가끔은 고개를 들어 스스로 방향을 가늠하는 존재로 남을 것인가. 방향은 잃어도 괜찮다. 다만 방향을 찾으려는 그 감각마저, 그리고 그 방향에 깃들어 있던 오래된 이야기들마저 잃지 않기를.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겨진 마지막 나침반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인류가 만든 방향과 지리의 상징과 비유를 지루하게 나열하는 방식으로 쓰였다. 책을 읽는 재미와 흥미는 없었지만 인용한 책들과 글들에 공감이 가서 좋았다. 책의 완성도는 좋았지만 몰입도를 떨어뜨리는 백화점 상품배열 방식의 서술 구조에 금방 식상함을 느끼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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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역사 - 루터의 신성한 공포에서 나치의 차분한 열광까지
김학이 지음 / 푸른역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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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라는 극히 주관적이고 비정형적인 대상을 학문의 영역으로 편입시키는 과정에서 노출된 방법론적 허점은 이 연구가 지닌 학문적 엄밀성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 특히 독일이라는 특정 국가의 특수한 궤적을 보편적 인류의 감정 변화인 양 상정한 지점과 파편적인 기록을 시대 정신으로 치환한 대목은 냉철한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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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역사 - 루터의 신성한 공포에서 나치의 차분한 열광까지
김학이 지음 / 푸른역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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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이 교수의 저서 <감정의 역사>는 16세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독일사의 이면에 숨겨진 동력으로서 ‘감정’을 성찰한 연구서이다. ​지은이는 감정이 단순한 심리 상태가 아니라 시대와 긴밀히 호응하며 변화해온 도덕적 기제이자 생산 요소라고 말한다. 16~18세기에는 종교와 결합해 도덕 공동체를 구축하는 핵심 기제로, 19세기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는 노동을 ‘기쁨’으로 전환하며 시스템을 정당화하는 자본으로 작동했다고 분석한다. 또한 현대에 이르러 감정이 화학과 의료의 영역에서 조절되는 현상과 기업의 생산 요소로 편입된 현실을 냉철하게 짚어낸다.

책은 루터의 문답부터 지멘스의 회고록, 나치 시대의 코믹 소설까지 아우르는 방대한 사료를 통해 독일사의 결정적 장면들을 새롭게 해석한다. 결국 감정의 역사는 현재 우리의 감정이 시대적 산물임을 깨닫게 함으로써,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자아와 사회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성찰의 도구’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역사는 오랫동안 문자와 유물, 경제 지표와 같은 소위 '객관적'이라 일컬어지는 사료들에 천착해 왔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지은이가 시도한 '감정사(History of Emotions)' 연구는 인간의 내밀한 심층을 역사의 동인으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일견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감정이라는 극히 주관적이고 비정형적인 대상을 학문의 영역으로 편입시키는 과정에서 노출된 방법론적 허점은 이 연구가 지닌 학문적 엄밀성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 특히 독일이라는 특정 국가의 특수한 궤적을 보편적 인류의 감정 변화인 양 상정한 지점과 파편적인 기록을 시대 정신으로 치환한 대목은 냉철한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다.

​먼저, 지은이가 활용한 사료의 선택과 해석 방식에 내재한 위험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루터의 <소교리문답>이나 특정 시기의 소설, 혹은 기업가의 회고록은 분명 그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기록된 감정은 본질적으로 ‘선택된 감정’이자 ‘정제된 담론’이다. 문자로 남겨질 수 있었던 계층의 감정이 과연 당대 민중 전체의 보편적 정서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는 의문이다.

​특정 작가의 문학적 상상력이나 권력자의 전략적 수사가 담긴 사료를 근거로 한 시대를 '공포'나 '열광'이라는 단일한 형용사로 규정하는 것은 역사학이 경계해야 할 '일반화의 오류'에 가깝다. 감정은 지극히 개인적이며, 동일한 사건 앞에서도 계급, 성별, 지역에 따라 다층적으로 나타난다. 지은이의 방법론은 파편적인 사료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여 역사의 복잡성을 단순화한 결과, 실체 없는 ‘시대적 감정’이라는 허상을 구축한 셈이다.

​또한, 독일 역사의 흐름을 감정의 진화 단계로 설명하며 이를 인류사의 보편적 도식처럼 제시한 점은 지극히 서구 중심적이며 독일 예외주의적인 발상이라고 본다. 나치즘이라는 극단적인 광기와 전후의 집단적 우울은 독일 사회가 겪은 특수한 역사적 경험의 산물이다. 이를 자본주의 정당화 기제나 도덕 공동체 수립의 일반적 과정으로 포장하는 것은 다른 문화권이 겪은 고유한 감정의 역사를 소거하는 행위이다. 물론, ​독일의 사례가 감정사 연구의 흥미로운 모델이 될 수는 있으나, 그것이 곧 인류 감정 진화의 표준이 될 수는 없다고 본다. 저자는 독일이라는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독일이라는 틀에 세상을 끼워 맞추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는 역사학의 기능인 '현재의 상대화'를 넘어, 특정 지역의 경험을 절대화하는 학문적 기만으로 비칠 소지가 다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의 역사는 우리 시대에 반드시 필요한 연구 분야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 방향성은 저자가 보여준 주관적 해석의 나열이 아닌, 보다 입증 가능하고 체계적인 방법론으로 진화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견해이다. 몇가지 고언을 첨부해 본다.

​첫째, '담론으로서의 감정'과 '실제로서의 감정'을 분리하여 분석해야 한다. 문학 작품이나 통치 문건에 나타난 감정은 시대가 요구한 '감정의 규범'이지 실제 구성원들이 느낀 감정의 총체는 아니다. 따라서 일기, 편지, 재판 기록 등 비공식적 사료를 대량으로 분석하여 공식 담론과의 괴리를 추적하는 다각적인 접근이 요구된다.

​둘째, 감정의 물질적·신체적 기반에 대한 연구가 병행되어야 한다. 저자가 언급한 약물과 화학적 통제는 현대 감정사의 중요한 지점이지만 과거의 감정 역시 먹거리, 주거 환경, 신체적 고통 등 물질적 조건과 떼어놓을 수 없다. 감정을 관념적인 도덕의 영역에서 해방시켜 인간의 생존 조건과 결부된 생생한 반응으로 읽어낼 때, 감정사는 비과학적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비교사적 관점의 도입이 시급하다. 독일의 감정이 특수한 것이라면, 같은 시기 동양이나 아프리카 등 여타 지역의 감정은 어떻게 작동했는지 비교함으로써 '감정의 지역성'과 '인류 공통의 정서'를 구분해내야 한다.

​역사학이 성찰의 학문이라는 저자의 주장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그 성찰은 주관적 확신이 아닌, 엄밀한 사료 비판과 객관적 거리 두기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감정은 시대를 움직이는 동력이지만, 동시에 권력에 의해 기획되고 자본에 의해 가공되는 가변적인 대상이다. ​진정한 감정사의 역할은 '과거에 이런 감정이 있었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 의해, 어떤 목적으로 그러한 감정이 권장되고 기록되었는가'를 파헤치는 역학적 조사가 되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혐오와 분노가 작렬하는 21세기 초반의 한국 사회를 '감정의 감옥'이 아닌 '성찰의 무대'로 전환할 수 있을 것이다. 감정의 역사는 답을 주는 현자의 돌이기 이전에, 우리 자신의 편향성을 비추는 차가운 거울이어야 마땅하다. 이 책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다. 결코,나처럼 이런 표지의 상술에 넘어가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에 글을 포스팅해 본다. ☆☆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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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엄마보다 괜찮은 나로 살기로 했다
이도연 지음 / 고유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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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글을 쓰는 시대다. SNS의 파편화된 피드에 자신의 일상을 끊임없이 던져 넣고, 찰나의 자극적인 문장들에 열광한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적어내리지만, 역설적으로 자신의 삶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진실한 글쓰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20년간 부모교육 현장에서 만난 이도연 작가의 언어 역시, 깊이 있는 사유보다는 자극적인 단문이 익숙한 현대의 현실을 날 것 그대로 반영한다. 하지만 작가는 그 얇고 읽기 쉬운 책이라는 형식 속에 자신의 경험을 단일 주제로 뚝심 있게 꿰어냄으로써, 보통의 에세이가 빠지기 쉬운 산만함과 과시적 오류를 피해 갔다. 이는 칭찬받아 마땅한 성취이다.

​이러한 시대적 맥락에서 이 책은 글쓰기의 본질을 실존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묵직한 화두를 던진다. "내 아이가 행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현대 부모들의 간절한 질문에 작가는 "부모가 먼저 행복하면 된다"라고 단호하게 답한다. 이 문장은 부모 교육을 넘어, 글쓰기의 본질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한 본질 밖의 욕망을 내려놓고, 오로지 자신의 내면을 향한 절실함에서 시작하는 글을 써야 한다는 모범을 작가는 몸소 보여준다.

​대부분의 현대인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사회적 '쓰임새'로 증명하려 애쓴다. 부모는 좋은 엄마라는 역할로, 작가는 인정받는 글이라는 결과물로 스스로를 평가하며 불안해한다. 그러나 삶은 결코 완벽할 수 없다. 불완전한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는 순간 진정한 행복과 진실한 글쓰기가 시작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내면 지옥을 마주하는 행위이다. 자기 의심, 모멸감, 검열이라는 불길 속에서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처절한 희생 제의와도 같다. 하지만 그 불완전함을 껴안고 폭망해도 괜찮다고 느끼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가장 매혹적인 상태의 자신이 되는 자유를 맛본다. 이것이 바로 글쓰기가 주는 정신승리의 미학이다.

​공학도였던 저자는 작은 틈 사이 행복을 선택하는 습관이 인생을 바꾼다고 말한다. 얇고 읽기 쉬운 책이 오히려 독자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강렬한 힘을 갖듯, 글쓰기 역시 거대한 서사가 아니라 일상의 작은 '틈'에서 피어난다. 30, 40대의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커피를 마시며 써 내려가는 몇 줄의 글, 황폐해진 사생활을 토로하는 솔직한 문장이 우리를 치유한다. 저자가 현장에서 "가르치면서 자신이 가장 많이 배웠다"고 고백하는 것은 단순한 겸손을 넘어선 진심의 발로이다. 현장의 절실함이 문장을 빚었기 때문이다.

​그 '틈'은 부조리한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나만의 고유한 앎의 공간이다. 같은 현실을 다르게 볼 수 있도록 내 상태를 좋아지게 만드는 힘, 그것이 바로 글쓰기의 실존적 의미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그 틈을 가능성으로 바꾸어, 오늘을 더 나은 장면으로 만들어가는 실천이다. 특히, 이성적 사유에 익숙한 공대생의 관점에서 이러한 감수성을 끌어냈다는 점은 인상적이다. 후성유전학에 대한 적확한 이해를 부끄러운 듯 내비친 문장을 보며, 작가의 지적 통섭이 가져온 깊이에 주목하게 된다.

​다만, 전문가의 입장에서 감각과 감정의 뇌과학적 메커니즘을 보완하고, 이러한 기억들이 인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설명을 추가했다면 젊은 학부모들에게 보다 명확하고 발전적인 각성을 유발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결국, 현대의 우리들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불완전한 나를 긍정하고 삶의 '틈'에서 자신만의 진실을 길어 올리는 실존적 행위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안도감, 지금의 나로 충분하다는 믿음으로 써 내려간 글은 결국 우리를 가장 우리답게 만들어준다. 그것은 글을 쓰는 행위 자체의 절실함에서 시작되어 삶의 복합성을 껴안고 나아가는 가장 고귀한 정신승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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