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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섬
브루스 디실바 지음, 김송현정 옮김 / 검은숲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언론인 출신 작가가 쓴 매력적인 범죄 스릴러
에드거상 최우수 신인상을 수상한 이 작품의 저자 브루스 디실바는 사실
40년 동안 기자 생활을 한
언론인이라고 한다. 뒤늦게 범죄 스릴러 소설을
쓰게 된 계기는 놀랍게도 ‘87분서
시리즈’로 유명한 경찰소설의 대가
에드 맥베인의 권유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이 책의 서문격인
헌정에는 에드 맥베인의 본명 에반 헌터의 이름으로 붙여진 편지가 삽입되어 있었다. 범죄소설의 거장에게
작가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았는데도 데뷔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는 엄청나게 바빴던 직장과 가정생활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떠나보낸 시간을
보상이라도 하듯이 데뷔작인 이 작품으로 그는 유수의 장르문학 관련 상을 수상했고,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큰
관심을 받았다. 사실 잡지에서 범죄 소설을 평가하는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할 지라도 언론인인 그가 이렇게 훌륭한 데뷔작을 완수했다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평생을 언론인으로서 살았던
그가 기자를 첫 작품의 주인공으로 설정한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의 직업뿐만이 아니라
작품의 배경도 그가 기자 생활을 했던 미국의 가장 작은 주, 로드아일랜드로
삼았다. 저자에게 매우 익숙한
곳이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이 책에 등장하는 시간과 장소에 대한 묘사는 다른 어떤 작품보다 매우 구체적이다.
악당들의 섬, 로드아일랜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자 집합지라고 할 수 있는 뉴욕, 전통과 현대가 함께 공존하고 있는 런던, 수많은 가면이 존재하는 도쿄 이렇게 도시는 범죄 소설에서 언제나 매력적인 배경으로 재탄생했다. 요 네스뵈의 [스노우맨]의 배경인 오슬로와 베르겐이 그랬고, 제임스 페터슨의 [우먼스 머더 클럽]시리즈에서는 샌프란시스코가 그랬다.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가 가가 교이치로 형사가 거닐 거리를 위해 닌교초 거리를 몇 번이고 왕래했던 것도 공간이 가지고 있는 힘을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의 분신이자 이 책의 주인공인 리엄 멀리건의 눈으로 묘사되는 마운트 호프는 우리나라 지방의 작은 소도시 수준의 동네이다. 사람이 살기에 최악의 동네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살고 싶은 생각이 드는 그런 곳은 절대 아니었다. 멀리건이 사건의 중심에 본격적으로 서게 되는 소설 중반부까지 저자는 주로 마운트 호프의 모습과 그 곳이 어떻게 굴러가는 동네인지를 알려주는데 주력하고 있다. 멀리건과 그의 주변인물들이 모두 촘촘한 씨줄과 날줄로 연결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 집 건너 친구 또는 지인인 그런 곳이다. 이런 작은 동네에 어느 날부터인가 범인을 알 수 없는 연쇄 방화 사건이 터지고 불길을 미처 피하지 못한 사망자들까지 나오게 된다. 이런 와중에 이 동네로 이사 온 주인 부부를 다시 찾아온 개나 취재하라는 편집장의 독촉을 피해 멀리건은 사건의 흔적을 추적한다. 그리고 사건의 핵심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이 곳 토박이인 멀리건은 로드아일랜드의 어원이 왜 로그아일랜드인지 실감하게 된다.
“로드아일랜드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 알아, 베로니카?”
“아니요, 하지만 당신이
말해주겠죠, 뭐.”
................(중략)...................
“그중에 하나가
이거야. 식민지 시대에
이단자, 밀수업자, 살인자들이 내러갠싯 만에
정착하자, 매사추세츠의 독실한 농부들이
그곳을 로그아일랜드(악당들의
섬)라고
불렀대. 그리고 로그아일랜드는
로그아일랜드의 변형이라는 거야.”
- p.313
리엄 멀리건, 그가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
지금까지 수많은 추리/스릴러 장르 문학을 읽었지만 언론인이 사건 수사에 중심에 선 작품은 매우 드물었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로도 만들어져 국내외 팬들에게 열렬한 호응을 이끌어낸 스웨덴 작가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 정도가 지금 생각나는 작품이다. 범죄 스릴러 장르의 주인공들은 주로 처음부터 사건의 중심에 설 수밖에 없는 형사, 탐정, 퇴역군인, 검시관, 사건의 피해자나 목격자들이었다. 하지만 브루스 디실바는 끔찍한 음모와 계략, 그리고 부패로 뒤덮인 진실을 찾기 위해 자신의 커리어까지 내걸고 사건을 추적하는 기자라는 주인공 캐릭터를 정말 멋지게 탄생시켰다. 자신이 가장 잘 그려낼 수 있는 기자라는 직업을 주인공의 직업을 선택한 것은 작품의 리얼리티를 살릴 수 있는 동시에 색다른 범죄 누아르의 맛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더이상 진정한 언론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자조하는 요즘과 같은 시대에 멀리건과 같은 사람이 한 명쯤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력적인 캐릭터이다. 몇년 째 이혼 결정을 질질 끌고 있고 그 와중에 한창 나이 어린 여기자와 불륜을 하고 있는 그이지만 오히려 그런 허술한 부분이 이 캐릭터를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품이 가진 또 하나의 큰 특징은 기존 스릴러 장르에서 옵션처럼 내걸었던 충격적인 반전이나 연쇄범죄의 트릭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런 잔재주에 공을 들이는 노력 대신에 진중하게 정공법을 선택한다. 때로는 치열하게 때로는 노련하게 저자가 그려내는 사건의 추적 과정에 독자들이 몰입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엄청난 돈과 사람이 오가는 대도시나 마운트 호프같은 작은 동네나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그 곳에서 부정과 부패의 싹이 틀 수 있다는 교훈을 이 작품을 통해 배웠다.

사족: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로드아일랜드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훨씬 더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