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인 소녀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6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진실은 때론 너무 고통스럽다, <내가 죽인 소녀>

 



초여름의 어느 날, 가족 문제 관련 상담을 의뢰 받은 사와자키 탐정은 약속한 그 집에 방문을 했다가 근처에 잠복해 있던 형사들로부터 봉변을 당하고 만다. 알고 보니 그 집 주인이자 작가인 마카베 오사무의 딸인 사야카가 바이올린 레슨을 받으려고 외삼촌댁에 가다 유괴를 당한 상태였다. 영문도 모른 채, 그 집을 찾아갔던 사와자키는 이 일을 계기로 이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유괴범의 지시로 몸값 6000만 엔의 운반 역할을 맡은 사와자키는 고군분투하지만 낯선 자들의 습격을 받고 쓰러지게 된다. 돈은 돈대로 잃고 유괴된 소녀는 여전히 행방불명이 된 상황에서 사와자키는 소녀의 외삼촌인 가이 교수로부터 또 다른 중대한 의뢰를 받는다.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에 출간된 하라 료의 이 소설은 하드보일드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사와자키는 니시신주쿠의 위치한 낡은 탐정 사무소에서 의뢰를 받아 살아가고 있다. 이번에는 평범한 사람의 정식 의뢰가 아닌 유괴범의 농간으로 사건에 깊숙이 들어오게 된다. 충격적이게도 납치되었던 사야카가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고, 사와자키는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그런 와중에도 가이 교수의 의뢰를 받고 네 명의 사람들을 조사하게 된다. 그들은 모두 교수의 자녀들이었고, 조카의 유괴 사건과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누군가의 조사로 확실하게 밝히고 싶었던 것이 의뢰 목적이었다.


 

말 그대로 발품을 팔며 수많은 사람들을 찾아가 질문하는 조사하는 과정 속에서 유괴 사건과 관련이 있을법한 용의자들이 속속 등장한다. 그 용의자들은 적당히 거짓과 진실을 섞은 말로 사와자키를 속이려고 하지만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경시청 간부들과 메지로 경찰서 형사들의 견제와 무시 속에서도 기죽지 않고 꿋꿋하게 사건을 추적하는 사와자키 탐정의 담담한 모습이 오래도록 잔상에 남는다. 이미 소녀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그 누구보다 소녀가 겪은 일의 진상을 밝히고 싶어 했던 사와자키가 끝내 마주하게 된 진실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와자키는 회피하거나 묻지 않고 끝까지 그 진실을 두 눈으로 똑바로 쳐다보며 끝을 맺는다.


 

진실은 모든 사람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외면하고 싶을 정도로 잔혹한 비밀을 품고 있기도 하다. 특히, 누군가의 억울한 죽음이 품고 있던 진실이 만천하에 드러났을 때 관련된 사람들은 큰 고통과 슬픔을 느끼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사와자키 탐정이 진실을 밝힌 이유는 비단 탐정으로서의 책임감과 소녀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가슴에 구멍을 뚫을 정도의 그 고통이 지나간 뒤에야 우리는 새로운 삶을 바라보며 한 걸음 내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단지 지금은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진실을 외면한다면 결국 거짓 위에서 위태롭게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


 

하라 료 작가의 이력을 보고 있으면, <밀양><> 등 한국 영화사에 걸출한 작품들을 남긴 이창동 감독님이 저절로 떠오른다. 소설과 영화라는 영역에서 두 분 모두 인정을 받았다는 점 외에 과작(寡作)을 하는 창작자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두 분의 작품들과 처음 만났을 땐 왜 그렇게 과작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요즘에는 그저 세상에 소개한 작품들 하나 하나가 소중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하라 료 작가님의 새로운 사와자키 탐정 소설이 언젠가 또 나올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실망하진 않을 것이다. 지금 그가 세상에 내놓은 다섯 편의 장편과 한 편의 단편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기 때문이다.

 

 

 

 

 



출판사 측으로부터 도서를 무상으로 제공받아 자유롭게 쓴 서평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