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스퀘어
안드레 애치먼 지음, 한정아 옮김 / 비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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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안했던 그 시절, 내 곁에 있어준 그들과의 추억을 위하여, <하버드 스퀘어>


 

 과거 속 누군가와 지독한 교류를 했던 특정한 공간은 그때의 감정을 고스란히 소환하는 묘한 힘을 가지고 있다. 아들과 함께 캠퍼스 투어를 하고 있는 소설 속 주인공에게 하버드 스퀘어는 1977년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던 그때의 자신과 재회시켜 주는 공간이다. 대학원을 다니는 주인공은 이미 종합시험에 한번 떨어져서 마지막 남은 기회를 앞두고 아르바이트를 하면 지내고 있다. 하버드 특유의 부드러우면서도 귀족적인 분위기에 섞이지 못하는 주인공에게 카페 알제는 유일하게 편안함을 선사하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1977년 여름을 함께 보냈던 칼라지라는 사람을 알게 된다. 프랑스어로 온갖 것들에 대한 불만을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그에게 주인공은 자연스럽게 끌리게 된다.

 


아마도 그는 나의 대리인이었을 것이다내가 미국에서 잃어버린 원시적인 모습의 나나의 그림자나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다락방에 숨어사는 미친 형제나의 하이드 씨나의 아주 아주 거친 초고가면을 벗고 속박의 쇠사슬에서도 벗어난완성되지 않은 나.”

                                                                                                      -p.76

 


 살면서 누군가에게 다가간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한번 물꼬가 트이면 급속도로 친해지는 것 또한 세상의 이치일 것이다. 자신에게 곁을 주지 않는 미국에서 누구보다 자신을 편하게 보여줄 수 있는 칼리지와 친구가 된다. 튀니지 출신의 그는 첫 번째 아내와 헤어지고 이탈리아 출신의 여성 사업가와 동거를 했다가 남편에게 들켜 하버드 스퀘어로 흘러 들어오게 된 사연이 있다. 둘은 프랑스어로 속 시원하게 수다를 떨면서 마음속 분노와 혐오의 감정을 나눈다. 그 어떤 것들보다도 두 사람 사이를 강력하게 연결해준 고리는 바로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자신들의 처지였다. 베르베르인이자 아랍인인 칼리지와 이집트인이자 유대인인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은 오로지 자신들만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계가 그렇듯이 이들의 우정 역시 외부와 내부의 요인들이 뒤섞여서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미국 사회에서 이방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두 사람이지만 결정적으로 주인공은 하버드라는 엘리트 집단에 한 발을 걸쳐 놓고 있었다. 이민국을 통해 언제든지 추방될 수 있는 칼리지는 그에게 있어서 분신인 동시에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부담스러운 존재였던 것이다. 흥미롭게도 주인공이 후반부에 교제하는 부잣집 여자친구 앨리슨에게도 이런 비슷한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다. 자신과 다르게 완벽하게 미국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앨리슨 역시 주인공인 정확한 선을 긋지 않는다. 주인공의 이런 복잡한 내면이 가장 극적으로 표출되는 순간이 바로 칼리지와의 이별하는 상황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 순간 참을 수 없는 없는 슬픔 사이를 오가는뭐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격통을 느꼈다는 것이다내가 이런 짓을 한 것이다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그동안은 이렇게까지 비열하고 천박한 인간으로 전락한 적은 없었는데.”

                                                                                                           -p.373


 


 칼리지는 이민국에 함께 가서 면담 통역을 해달라는 요청을 하지만 주인공은 거절한다. 물론 영주권 종결을 위한 형식적인 면담이었기에 주인공이 그 자리에 있었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수 있다. 어쨌든 그로 인해 칼리지는 미국을 떠났고 주인공은 하버드 스퀘어에 홀로 남아 공부를 하고 재시험에 합격을 한다. 세월이 흐른 후 아들과 함께 거니는 그곳의 모습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하버드 스퀘어가 가지는 의미는 곧 그 공간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던 이들과의 추억이다. 아마도 1977년 여름날의 추억에서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은 칼리지일 것이다. 비록 그와의 마지막 이별은 동화처럼 아름답진 않았지만 그 모든 감정들이 오롯이 지난 날 자신에게 머물러 있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으리라.

 


 아련한 사랑의 잔상을 섬세하게 다룬 소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으로 익숙한 안드레 애치먼의 이 작품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추억의 씁쓸함을 그려내고 있다. 실제로 하버드에서 학위 공부를 한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들어가 있다는 점은 이 소설을 한층 더 특별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불안정한 시절을 살아가는 청춘에게 있어서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존재는 매우 소중하지만 언제나 모든 관계가 아름답게 끝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부끄럽고 씁쓸한 추억마저 오롯이 내가 안고 가야 하는 인생의 선물인 것이다. 그렇게 기억을 움켜쥐고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특별한 존재라고 말하고 싶다.

 




출판사 측으로부터 도서를 무상으로 제공받아 자유롭게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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