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가 필요 없는 사회
윤은주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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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한나 아렌트가 필요 없는 사회를 꿈꾼다. 한나 아렌트는 정치참여, 공적 영역, 시민성의 회복을 통해 진정한 민주주의를 모색한 사상가다. 아렌트를 읽으면, 우리가 왜 그녀를 필요로 하는지와 우리 사회의 문제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정치철학의 근원으로 고대 그리스에 주목한다. 소크라테스는 산파술을 통해 진리에 다가가고자 했다. 평등한 관계에서 공적 주제에 관해 의견을 나누는 산파술이 정치의 출발이다. 산파술은 상대방을 존중하며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것이고 아렌트에게 이것은 공적이고, 정치적이었다.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보고 민주주의에 회의를 품었다. 그는 철인군주론을 주장하며 현실정치가 아닌 이상향으로의 정치이론을 펼친다. 아렌트는 따르면,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죽음으로 폴리스의 삶에 절망하도록 만들고 동시에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의 근본을 의심하게 만들었을 때 정치사상의 전통은 시작되었다.' 아렌트는 이 전통에서 탈피하려 한다. 이상을 추구하며 개인에 국한된 정치가 아닌, 현실의 다수가 참여하는 정치를 중시한다. 이를 위해 아렌트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주목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폴리스적 동물이다.'라고 말했다. 폴리스는 고대 그리스의 공동체 도시 국가를 의미한다. 폴리스의 시민은 노예가 아닌 성인 남성에 국한되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생존을 위한 노동에 관여하지 않으므로 공적인 활동에 적합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아렌트에 따르면 사적 공간은 생존과 재생산, 생물학적 필요가 지배하는 세계이지만 공적 공간은 그러한 필요로부터의 '자유', 공동체를 향한 봉사와 그로 인한 명예, 탁월함의 세계였다.
근대에 접어들어 이러한 이분법이 위험에 처한다.생존과 노동, 사적 공간의 문제가 공적 공간으로 넘어오면서 공적 공간을 필요의 논리로 오염시켰다. 아렌트는 이를 '사회적 공간'의 출현이라 한다. 아렌트가 말하는 시민성은 공적 공간의 회복이다. 개인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으며 결정을 조율하는 것이 폭력과 차별화되는 권력이고 시민성이다.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기 위해선 사유의 힘이 있어야 한다. 소크라테스가 '성찰하지 않는 삶은 가치가 없다.'라고 말한 것을 두고, 아렌트는 two-in-one, 생각되는 나와 생각하는 나의 일치라고 말한다. 판단력이란 스스로를 타자처럼 생각하는 능력이다. 이러한 능력의 부재가 역사적 비극을 가져왔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아렌트는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을 보고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떠올렸다. 아이히만은 수백만명의 유대인을 효과적으로 죽이는 일을 맡으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아이히만이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일이 가능했음을 아렌트는 말한다.
아렌트의 문제와 해답은 다른 철학자들과 비슷하다. 사적, 공적 공간의 경계, 공론장 구축은 '생활세계의 식민화' 하버마스를 떠올리고, 동일성을 향한 전체주의적 폭력은 아도르노를, 시민성과 공적 영역의 회복은 민주주의의 본질이 정치와 공동체에 대한 규범적 사유와 반성에 있다는 호르크하이머를 연상시킨다.
비슷한 이야기를 한 학자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생각하는 아렌트의 의의는, 노동과 생존의 공적 영역 침범과 사유의 힘을 강조한 것에 있다. 현대인이 굶어죽는 일은 드물지만, 현대인에게 실직은 생존수단과 존엄을 잃는 것이다. 이러한 만성적 불안이 공적 활동을 무너트림을 지적한 아렌트는 옳다.
아도르노는 "독일의 한 수용소는 5만명의 시체를 처리할 수 있는 시설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성으로 생각해낸게 고작 효과적인 시체처리시설이라니 오싹해진다. 2차세계대전, 괴테를 읽는 유대인수용소의 간부를 연합군이 발견한 일화를 보고 알 수 있듯이, 인간은 끊임없이 성찰하지 않으면 쉽게 관습과 공동체압에 굴복함을 알려준 아렌트는 다시 한번 옳다.
현대는 20세기의 전체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같은 생각, 행동, 취향을 강요하고 반대를 배척하고 있지 않은가? 대중매체는 시민에게 비슷한 문화적 취향을, 자본주의는 돈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추구하도록 강제한다. 사람들은 소셜미디어의 근거없는 정보들을 취사 선택하여 고집과 무비판적 동조를 강화하고 그 결과 사유의 힘을 잃어버렸다. 아렌트의 이상인 폴리스의 공론장 회복을 통한 진정한 민주주의 확립, 사유의 힘을 통한 참된 권력행사가 오늘날 찾아보기 어려운 만큼, 우리에게는 아렌트가 필요하다.
한나 아렌트가 필요 없는 사회를 꿈꾸기 위해, 우리에게는 한나 아렌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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