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릴러 영화의 공식인, 남자 주인공을 시험에 들게 하는 팜파탈(femme fatale), 즉 치명적 요부(妖婦)는 남성의 모순을 여성에게 투사한 존재이기에 오랫동안 남자 감독들의 사랑을 받아 왔다.(이는 남성 작가들의 예술적 상상력이 젠더에 의해 제한받는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팜파탈은 남성이 저지르는 폭력과 파괴가 결코 남성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는 남성 판타지의 산물이다. 남성의 성욕은 무한대라서 어디로 ‘분출’될지 모르지만(성의 피해자로서 여성), 성욕 폭발의 버튼을 누른 사람은 남자 자신이 아니라 남자를 유혹하는 여자(성의 유혹자로서 여성)라는 것이다.
이때 남성은 오히려, 모든 성폭력 가해자들이 합창하듯이, 유혹자 여성의 ‘피해자’가 된다. 팜파탈은 남성의 욕망을 맘껏 채워주면서도 남성들을 책임에서 벗어나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