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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연애할 때 - 칼럼니스트 임경선의 엄마-딸-나의 이야기
임경선 지음 / 마음산책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작가도 모른다. 제목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적적해 보이는 표지도 끌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책을 집어든 이유는 뒷표지에 써있는 빨간 글씨 한 줄 때문이었다. '반교훈적, 반가족주의적 에세이'라는. 나는 에세이를 거의 읽지 않는다. 그럼에도 에세이라는 이 책을 집어든 이유는 위로받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육아라는 일상에 빠진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나와 같은 현실에 있는 누군가의 위로다. 허세부리지 않고, 잘난체하지 않고,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는 담백한 위로.그 위로는 가족도, 친구도, 심지어 남편도 주지 못한다. 그래서 난 이 책이 좋았다. 누군지 모르는 이 작가가 난 참 좋아졌다.
무심하게, 건조하게, 쿨한 척 이야기하는 작가는 딸을 사랑해도 보통 사랑하는게 아니다. 당장 눈앞에서 동생을 포크레인으로 내리치고 10분도 넘게 밥을 입에 문채 엄마의 표정 따위는 아랑곳없이 장난질에 빠진 아들과 당면한 순간만 넘기느라 생각조차 못한 것들을 말하는 작가의 마음에 문득 가슴이 쿵, 쳐졌다. 난 한번도 아이의 자라나는 모습을 상상해보지 못했다. 아이가 소년이 되고, 소년이 수줍게 사랑을 하고, 소년이 꿈을 꾸고, 소년이 남자가 되는 모습을 정말 단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다. 왜 그랬을까. 난 어째서 한번도, 이 아이의 그 긴 시간을 한 번도 그려보지 못했을까. 그저 지금의 부서지게 껴안아 주고 싶은 아기같은 모습을 무의식적으로 놓고싶지 않았던걸까. 아이는 분명히 자랄텐데, 그것도 순식간에.
그 작은 생각에 찰나가 못견디게 아쉬워졌다. 미운 세살의 저지레도 어쩐지 여유있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언젠가는 내 품에 안기지 않을만큼 커져버릴, 남자가 될 아이의 모습을 떠올리니 뭉클해 한 번 더, 또 한 번 더 안아보고 싶어졌다. 바로 앞만 바라보고 길고 긴 아이의 시간은 생각하지 못한 내가 미안하고 불쌍했다. 안고 싶은만큼 안고, 뽀뽀해주고 싶을 만큼 입맞춰 주고, 대답해 줄 수 있을 만큼 말해주고, 볼 수 있을만큼 실컷 보아두어야 겠다. 아기 때부터 어린이, 소년의 모습이 모두 더해져 아빠만큼 큰 남자가 될 그 아이를 보고 어색하지 않도록.
마음에 들었던 구절 몇 가지
_엄마는 편하고 즐거우면 죄의식을 느껴야만 '비양심' '무개념'에서 벗어나는 것일까. 왜 엄마는 즐겁고 가벼운 마음으로 일하면 안되는가. 왜 엄마는 자기 시간을 가지면 안 되나. 왜 완벽하지 않으면 안 되나. 가사일을 제대로 꼼꼼히 못한다고, 남편보다 집에 늦게 들어간다고, 애를 남의 손에 맡긴다고, 애랑 충분히 못 놀아준다고 왜 죄의식을 가져야 하는 걸까....... '남들은 다 제대로 잘하고 있는데......' '다들 그래' '무조건 이래야만 해' 같은 생각에 휘둘리면 아이를 키우는 일은 너무나 고통스러워지고, 그러다 아이가 행복해지기 전에 엄마가 불행해진다. 엄마가 불행한 것보단 불완전한 게 백배 낫다. 단, 그렇게 불완전한 엄마임에도 이 세상에서 나만큼 내 아이를 챙기고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누가 뭐래도 아이에겐 '내 엄마'가 가장 완전한 엄마인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기적 같은 아이의 확신을 있는 그대로 행복하게 받아들이면 된다.
_아무리 봐도 부모가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정말로 가급적 아이가 가진 운명을 방해하지 않는 것, 그뿐인 것 같다.
_어쩌면 육아에서 유일하게 맞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이의 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 일일지도 모른다.
_나는 아이에게 '너는 이런 아이였단다'라며 기억하지 못하는 유아기나 유년기의 일들을 알려주기보다는 '나는 이런 엄마였고 여자였고 사람이었어'라며 나를 보여주고 싶었다. 여러모로 불완전했지만 그것이 너를 낳은 사람이고, 너를 낳고 키우는 일은 처음이라 힘들었지만 그래도 열심히 즐겁게 하려고 했다고. 덕분에 꽤 행복했다고.